- 그의 애송詩 406

강화도 여관 - 심재휘

강화도 여관 심재휘 나는 떠날 때부터 이 강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마지막 단추를 꿰며 닥쳐올 산책과 해안도로 너머의 일몰을 예감하듯 그곳으로 떠나는 우리의 여행은 지나치게 즐거웠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어느 생애와 눈을 떠도 감아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또 다른 생애만 있을 뿐이었구요 나는 그곳의 달빛 속에 당신을 몰래 버리고 왔습니다 나는 이 강의 어느 먼 기슭쯤에 살며 오늘도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혹은 밀려나갈 때처럼 무수히 나를 용서하세요 내가 천천히 흘러 강 하구에 이르더라도 다시 그 섬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달빛에 떠도는 섬 하나는 되겠습니다 강화도 바닷가의 어느 바람 부는 여관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대를 생각하겠습니..

- 그의 애송詩 2023.01.30

사랑의 출처 - 이병률

산에서 사랑을 파낸다 새 떼처럼 마음이 운다 사랑에게 손을 뻗어 손을 달라고 했다 눈에 파묻힌 사랑은 손에 뿌리를 꼭 쥐고 있었다 사랑은 손을 내미는 대신 일생에 단 한 번 여름이 올 것이라 했다 그 여름이 오면 대륙 깊숙이 이 뿌리를 심어달라 했다 그 뿌리 속에 최선이 들어 있다고 했다 치밀한 여름이 왔다 여름의 조각들이 대륙을 붙들지 못해서 사랑은 뿌리가 드러났다 한사코 표식을 드러내겠다고 겹겹의 세계 바깥으로 나오고 만 사랑의 뿌리를 파낸다? 사랑은 뿌리여서 퍼내야 한다 뿌리가 번지고 번져서 파낼 수 없게 되어서 다시 되묻는다 온몸에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한다 사랑이 끝나면 산 하나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퍼다 나른 크기의 산 하나 생겨난다 산 하나를 다 파내거나 산 하나를 쓰..

- 그의 애송詩 2022.12.28

가을 - 조병화

가을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푸른 모자를 높게 쓰고 맑은 눈을 하고 청초한 얼굴로 인사를 하러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더웠었지요"하며 먼곳을 돌아 돌아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높은 구름의 고개를 넘어오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나보다. 멀리 남한산성이 붉은빛을 띄우기 시작하더니 집앞의 메타세콰이어 나무도 갈색으로 물이 들었다.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오나보다. 몇 해전 몽촌토성위에서 보이는 우이동의 백운대를 열심히 찍었던 적이있다. 우이동의 백운대는 각도에 따라서 한 남자가 누워있는 모양을 연출한다. 특히 죤 F 캐네디를 닮았다. 나는 누워서 사진을 찍고 산의 능선을 비교하여 보았다. 이 산을 젊은 시절부터 좋아했다. 특..

- 그의 애송詩 2022.09.29

무화과 숲 - 황인찬

쌀을 씻다가 창 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하루종일 잠을잤다. 벌써 몇일째이다. 밤새 두세번을 깨었다가 이내 또 잠이 든다지만 그렇게 오전 10시까지 자고일어나 또 다시 거실 소파로가서 음악을 켜놓고 비몽사몽간에 잠이든다. 그러다보면 오후 5시가 넘는다. 하루종일 잤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항암치료를 하는동안 꼬박 밤을 새우며 근 1년간을 지냈었다. 항암치료중의 주사약 부작용이 여러가지인데 불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난 9월16일, 금요일밤부터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다. 항암치료를 받고 마지막으로 총 정검을 받으며 암세포는 없어..

- 그의 애송詩 2022.09.28

중국인 맹인 안마사 심재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심재휘 ​ 상해의 변두리 시장 뒷골목에 그의 가게가 있다 ​ 하나뿐인 안마용 침상에는 가을비가 아픈 소리로 누워 있다 ​ 주렴 안쪽의 어둑한 나무 의자에 곧게 앉아 한 가닥 한 가닥 비의 상처들을 헤아리고 있는 맹인 안마사 ​ 곧 가을비도 그치는 저녁이 된다 ​ 간혹 처음 만나는 뒷골목에도 지독하도록 낯익은 풍경이 있으니 ​ 손으로 더듬어도 잘 만져지지 않는 것들아 눈을 감아도 자꾸만 가늘어지는 것들아 ​ 숨을 쉬면 결리는 나의 늑골 어디쯤에 그의 가게가 있다 ​ ​ - 시집 2014 문예중앙 ​ 시인은 언젠가 상해의 변두리 시장 뒷골목을 배회한 적이 있었나보다. 그러다가 맹인 안마사에게 지친 몸을 맡겼던 적이 있었을것이다. 나도 중국을 여행하며 맛사지를 받아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

- 그의 애송詩 2022.09.10

올여름의 인생공부 - 최승자

올여름의 인생공부 최승자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밤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서는 흘러가지 않았다. 앨튼 죤은 자신의 에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x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xx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

- 그의 애송詩 2022.08.31

人生(Life)

胡 蝶 夢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내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다가 누워 잠들어있는 나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는건가? .. 원래 나비인 내가 사람이 되는 꿈을 꾸었던것인가?" 장자의 '나비의 꿈' 호접몽 [胡蝶夢 ]이란 중국의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자아(自我)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하는 말이다. 종묘의 망묘루(望廟樓) 방 한 칸을 빌려 향대청을 바라보며 책을 읽는다 류시화의 시를 읽는데 시들이 모두 연관성을 가지고 물흐르듯 흐르며 이어진다. 나는 류시화의 나비 + 사물들은 저마다 내게 안부를 묻는다 + ..

- 그의 애송詩 2022.08.28

이번 여름의 일 - 최지인

이번 여름의 일 최지인 시베리아가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나리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날려버린 시간을 만회하려고 애를 썼다 운이 나빴다고도 할 수 있다 며칠째 두통에 시달리는 너에게 괜찮아질 거라는 말만 잠을 청하며 슬픔에 잠기곤 했는데 어제 집계된 감염자의 수와 두려움과 가난과 외로움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돈 버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다 갓 서른을 넘겼을 뿐인데 다 늙어버린 것 같다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이것은 모두 이번 여름의 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과 얼마나 멀어진 걸까 폭우가 계속되는 계절 고양이들은 어디서 비를 피하는 걸까 - 최지인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 그의 애송詩 2022.08.19

폐정 - 심재휘

폐정 심재휘 무너진 흙담에 둘러싸여 오랫동안 집터인 곳 사라진 집으로 누가 오셨는지 늙은 복숭아나무 잎들이 슬몃슬몃 문 여는 소리를 낸다 신발 한 켤레로 평생을 살다가 돌아와 이제 흩어지기 직전의 바람 집터에 가득 핀 보리가 삶을 탕진한 바람을 봄 햇살 속에 누인다 보리밭에 누워 마지막으로 눈을 떠보는 바람 뒤란 우물에서 한없이 퍼 올리던 앵두꽃 피는 저녁이며 담장에 기대 올려다보던 구름의 질주여 마르지 않고 흩어지지 않던 날들이여 맑은 우물을 기억하는 자의 최후란 이제는 다만 뚜껑이 닫힌 해질녘의 어두운 구멍 하나 바람을 불러 잠재우는 폐정 하나를 갖는 것 *폐정[廢井] 쓰지 않고 버려 둔 우물 심재휘시인의 시, 폐정[廢井]을 읽을적마다 무너진 흙담에 둘러싸여 오랫동안 남아있는 집터, 그곳에 숨은듯 서..

- 그의 애송詩 2022.08.18

자리 - 조용미

자리 조용미 무엇이 있다가 사라진 자리는 적막이 가득하다 절이 있던 터 연못이 있던 자리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 꽃이 머물다 간 자리 고요함의 현현, 무엇이 있다 사라진 자리는 바라볼 수 없는 고요로 바글거린다 흔적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숲이 우거지고 잡풀이 허리까지 자란 산중에서도 사람이 살다간 흔적은 남아있다. 편편하던 집터가 다시 풀밭이되어 남아있고 뒷뜰에는 유실수가 심어져있고 질그릇 깨진 조각들이 오래된 집터속에 묻혀있다. 寫友와 촬영을 다니다보면 잡목과 잡초가 우거진 터에 뭔가 흔적이 남은 자리가 눈에 띈다. 언젠가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를 촬영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 여기는 집이 있던 자리네요. 봐요, 저쪽에 집터가 희미하게 보이고 장독대놓았던 자리에 돌이 아직 몇개 남아있네요. 강원도 시..

- 그의 애송詩 2022.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