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406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안개의 나라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갯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음으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시인 김광규(1941~ ) 시인 김광규는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에서 수학했다.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한 이후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으로 녹원문학상을, 1983년 두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김수영문학상을, 1990년 다섯번째 시집 『아니..

- 그의 애송詩 2022.04.22

불안한 순간들 - 신현림

불안한 저녁의 순간들 신현림 뚜껑 없는 향수병처럼 내일을 위한 향기가 새어 나간다 그는 흔들의자처럼 흔들린다 불안한 저녁의 시간들을 감잣국 같은 음악으로 마음을 덥혀도 혼자서는 힘들다 흰 도화지를 바람 속에 날리며 그는 힘들어 한다 괴로움은 밖에서만 오는 줄 알지만 괴로움은 대부분 스스로 만드는 것 만족할 수 없는 마음에서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데서 갈 곳이 있고 부를 친구가 있고 어딘가에 묶여야 안정되는 사람이라 수시로 찾아드는 쓸쓸함에 그는 헐거운 가스레버처럼 위험하다 그의 몸은 거칠게 넘실댄다. 빨간 해를 넘어 파도가 덮친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을 바꾸기 위해 파도를 감고 온 하루를 뛰어넘는다 때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흔들릴때가 있다. 인간의 본질적으로 타고난 불안감때문이다. 힘든 항암치료를 ..

- 그의 애송詩 2022.04.15

4월 오후 - 박용하

시인 두보는 꽃잎 한 조각 떨어져도 봄빛 줄어든다 했네 왕벚 꽃잎 떨어져 허공을 밟고 자두 바람 몰려와 나뭇가지 핥네 사람 싫어하는 내게도 좋아 죽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이 세상에서 나가면 세상 빛이 줄겠지 오늘 살구꽃 무참하게 진다야 당신 가슴속은 뭐하는지 이 마음은 묻는다 너 보고 싶어 네 눈빛 건지고 싶어 못 견디게 견디는 사월 오후 세상일 하나같이 내 뜻과 멀고 네 몸 역시 내 맘 같지 않네 4월 오후 / 박용하 올해의 벚꽃은 꽤나 오래간다 피어나자 말자 바람불고 비 한번 오면 나비떼 날아오르듯 지는게 벚꽃인데 올해는 비도, 바람도 없이 그 짧은 벚꽃의 생애를 곱게 내버려 두었다. 지금 새벽 3시, 창문으로 내어다보니 어둠속에서도 하얀 벚꽃이 눈부시다. 나는 지금 4차 항암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

- 그의 애송詩 2022.04.08

불안 - 신현림

불안 신현림 지극히 혼란스런 의식이 새벽강처럼 고요해졌으면, 실수와 후회, 치욕스런 기억에 시달릴 때 시원스레 소나기가 쏟아졌으면, 잔인한 말 던진 자를 용서했으면, 그냥 잊었으면, 권태롭고 적막한 오후 세시경이면 전화라도 그냥 수다스럽게 울렸으면, 나처럼 이 시대의 나약한 바보 울보들이 천천이 비빔밥을 먹고 커피 마시듯 음미했으면, 갑작스런 사건에 놀라 허둥대지 않으며 추억의 지진으로 시간이 사망하지 않았으면, 진지함과 활달함의 변주곡 속에서 하루가 무사하고 우리 애인들 모두 안녕하였으면, 어서 쓸쓸한 저녁이 갔으면, 이 불안의 바퀴도 날아갔으면, 온몸 미칠 듯 번지는 칸나 같은 바퀴가 멈췄으면, 제발 멈췄으면. 우리는 안전불감시대에 살고있는지 이미 오래다. 마스크를 쓰고 지낸지 벌써 3년이다, 처음엔..

- 그의 애송詩 2022.03.21

칠판 - 류 근

칠판 류 근 당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큰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당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깊어진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나 혼자 노을 속에 남겨져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당신 맨 처음 바라보라고 서쪽 하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청동의 별 하나를 그려두기도 하였다 때로는 물의 이름을 때로는 나무의 이름을 때로는 먼 사막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 와서 하늘이 내 입술과 가까워지면 푸른 사다리 위에 올라가 가장 깨끗한 언어로 당신의 꿈길을 옮겨 적기도 하였다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물고기 한 마리 우산을 쓰고 지평선을 넘어오는 자전거 하나 밤과 개벽을 가르는 한 올의 안개마저 돌아와 아낌없이 반짝이곤 했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

- 그의 애송詩 2021.11.30

있는 힘을 다해 - 이상국

있는 힘을 다해 이상국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마리 물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처음 이상국시인의 詩集을 사게한 이상국시인의 詩다 간결하면서도 전해주는 메시지가 대단히 크다 내가 처음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들어간후, 신입생 미술수업을 받던 때, 홍익대학의 교수진들은 그 이름도 쟁쟁한 예술인들의 집결지였다 남관, 박서보, 김원, 천경자, 김정숙, 김찬식, 전뢰진, 최기원, 하종현... 그외 지금은 대단한 작가로 우뚝선 분들이 조교 내지는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서양아저씨처럼 키가 훌쩍 크고 피부는 해맑으면서도 머리는 반백에 빨간..

- 그의 애송詩 2021.11.30

흰 웃음소리 - 이상국

흰 웃음소리 이상국 내가 한 철 인제 북천 조용한 마을에 살며 한 사미승을 알고 지냈는데 어느 해 누군가 슬피 울어도 환한 유월 그 사미는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고 동네 처자는 치마폭에다 그걸 받는 걸 보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바람이 다 집어 먹고 흰 웃음소리만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북천 물소리가 그걸 싣고 가다가 돌멩이처럼 뒤돌아보고는 했다 아무 하늘에서나 햇구름이 피던 그날은 살다가 헤어지기도 좋은 날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환해진다 세상을 살면서 청빈한 마음을 잃지않으려 나름대로 법문을 공부하고, 도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산다는 것은 곧이 곧대로 법문대로 행하라는 말이 아님을 나, 이제야 알겠다 어느 산중에 스님 한 분이 절집에서 개를 기르며 나이든 구도자의 길을 홀로 걷고계..

- 그의 애송詩 2021.11.30

마종기 / 대화(對話) 와 Mickey Newbury / All my trials (나의 시련)

Father & Son 대화(對話)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야.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꺼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

- 그의 애송詩 2021.11.30

유리병에 담긴 소식 - 남진우

유리병에 담긴 소식 유리병에 담긴 소식 남진우 유리병에 소식을 적어 바다에 띄운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문지방에 도로 밀려와 있다 상어의 잇자국과 폭풍우가 머물다 간 흔적이 남아 있는 유리병 어둠의 물살이 핥고 지나간 자리에 서서 나는 담배를 피우고 조간신문을 주워든다 한때 망명 정부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얼마나 많은 정부가 백지 위에 세워졌다 쓰러졌던가 유리병에 담긴 편지를 구겨버리고 창 밖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떼를 바라본다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내 심장과 머리를 분할한다 서류와 잡담 사이 유리병은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고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나는 긴 편지를 쓴다 아무도 내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끊임없이 소식을 적어 유리병을 띄워보낸다 그 어디에도 없는 누군가에게 가 닿기를..

- 그의 애송詩 2021.11.14

꼬막 - 박노해

꼬막 박노해 벌교 중학교 동창생 광석이가 꼬막 한 말을 부쳐왔다 꼬막을 삶는 일은 엄숙한 일 이 섬세한 남도南道의 살림 성사聖事는 타지 처자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모처럼 팔을 걷고 옛 기억을 살리며 싸목싸목 참꼬막을 삶는다 둥근 상에 수북이 삶은 꼬막을 두고 어여 모여 꼬막을 까먹는다 이 또롱또롱하고 짭조름하고 졸깃거리는 맛 나가 한겨울에 이걸 못 묵으면 몸살헌다 친구야 고맙다 나는 겨울이면 니가 젤 좋아부러 감사전화를 했더니 찬바람 부는 갯벌 바닷가에서 광석이 목소리가 뻘 그림자다 우리 벌교 꼬막도 예전 같지 않다야 수확량이 솔찬히 줄어부렀어야 아니 아니 갯벌이 오염돼서만이 아니고 긍께 그 멋시냐 태풍 때문이 아니겄냐 요 몇 년 동안 우리 여자만이 말이시 태풍이 안 오셧다느 거 아니여 큰 태풍이 읎어서..

- 그의 애송詩 2021.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