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406

이상한 새 I - 정용화

나는 그 새 이름을 알지 못한다 깃털만 만져도 가슴에 상처 하나씩 갖게 된다는 그 새는 내 입 안 깊은 동굴 속에 살고 있었다 무심코 입을 벌리자 기어이 입 밖으로 빠져 나왔다 새가 빠져나간 자리, 허공이 자꾸 아팠다 햇빛의 온기가 남아있는 돌 위에서 새는 아까부터 연한 과거를 쪼아대고 있다 저녁은 어두워지게 내버려두고 오래도록 물어뜯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병아리로 보였던 새 걷는 것이 전부인 듯 보이더니 날개가 생겼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생기고 부리가 점점 커져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어둠도 가둘 수 없는 새가 날아간다 무엇으로도 저 새를 잡을 수 없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 두고 간 소문만 무성하고 새는 보이지 않는다 노을 너머로 새가 날아간 후에도 상처는 여전히 붉다 - 정용화의 ..

- 그의 애송詩 2021.11.06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 최홍석

때 늦게 꽃잎들이 사라진 봄 그 벚꽃나무를 찾았다 꽃잎 떨어진 자리는 외로웠지만 코 끝을 간지럽히는 아카시아향과 함께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공허의 소리도 들었다 이 세상에서, 공허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나를 키운 팔할이 삶에 대한 공허감이였다 이만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삶의 공허감에서 출발한 허기가 삶의 의미에 목마르게 했기 때문이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는 것이다 [최홍석의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전문]

- 그의 애송詩 2021.11.02

주저흔(躊躇痕 / Skid mark & Hesitation Marks) - 김경주

躊躇痕 (주저흔) 김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이 뒤집어 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

- 그의 애송詩 2021.10.29

실종 - 윤성택

실종 윤성택 뒷걸음으로 지하철 의자에 앉는다 지나는 낯빛에서 이끌려오는 윤곽이 흐릿하다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지만 번번이 전송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전생 어딘가 마주친 것 같은 사람들, 지상의 계단을 바삐 오르내리고 있다 길을 잃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어두운 터널과 터널 사이 그 빈 공간까지 바람이 날리고 상여같이 환한 전철이 들어온다 발걸음이 예서제서 쏟아졌으나 좀처럼 타고 싶지 않다 여기가 세상을 가둔 종점이던가, 출입문이 덜컹 닫히자 둥근 고리들 차례차례 허공에제 몸을 증거처럼 끼워 넣는다 손목시계를 보다가 플랫폼을 거닐다가 사람들 사이를 배회하다가 어둑한 구석에 다시 앉는다 누군가 애달프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일기장, 편지, 메모들은 건너편 붉은 소화..

- 그의 애송詩 2021.10.29

올여름의 인생공부 - 최승자

올여름의 인생공부 최승자 ​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앨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 그의 애송詩 2021.10.26

갯펄 - 이재무

사내는 거친 숨 토해 놓고 바지춤 올리고 헛기침 두어 번 뱉어 내놓고는 성큼, 큰 걸음으로 저녁을 빠져나간다 팥죽 같은 식은땀 쏟아 내고는 풀어진 치맛말기 걷어 올리며 까닭 없이 천지신령께 죄스러워서 울먹거리는, 불임의 여자. 퍼런 욕정의 사내는 이른 새벽 다시 그녀를 찾을 것이다 - 이재무의 詩 앞부분 발췌 몇 장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숨이 턱, 막히는듯 멈추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상에 이런 문장이 있다니! 오래된 문예영화를 한 장면 보듯 욕정이 물씬 묻어나는 싯귀였다 요즘에는 이런 표현을 흔히들 에로틱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라는 말과 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는 있으나 조금의 차이가 있다. 에로틱은 성욕을 일으킨다는 말이고 욕정은 육체적인 욕망을 푼다는 말이다 그러니 욕정적이라는 말이 훨씬 더 강하다고 보겠..

- 그의 애송詩 2021.10.26

토우(土雨) - 권혁제

토우(土雨) 권혁제 평택 삼리에 비가 내렸다 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 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 석탄재 날린 진흙길 따라 드러누운 경부선 철길 나녀(裸女)가 흘린 헤픈 웃음 위로 금속성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차가 얼굴 붉히며 지나갔다 한 평 쪽방의 몇 푼어치 사랑에 쓸쓸함만 더해주는 기적소리 누이의 교성이 흘러 다니는 삼리 누이의 꿈은 거기에 있었다 밤마다 사랑 없는 사랑이 하늘로 가는 문턱을 움켜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축축한 신음소리만 되돌아오는 갈 길 먼 꿈들은, 역광장에 쏟아져 나와 가슴 뚫린 퍼런 그림자로 떠돌아 다녔다 갈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의 품을 찾아서 무뚝뚝한 하행선 열차가 떠나가고 반시간 쯤 후에 비가 내렸다 부활의 율동으로 옷을 벗는 누이, 삼리에 내리는 비릿한 토우. 권혁제 시인..

- 그의 애송詩 2021.10.16

편지를 쓴다 - 류 근

내가 사는 별에는 이제 비가 내리지 않는다 우주의 어느 캄캄한 사막을 건너가고 있는 거다 나는 때로 모가지가 길어진 미루나무 해 질 무렵 잔등 위에 올라앉아 어느 먼 비 내리는 별에게 편지를 쓴다 그 별에는 이제 어떤 그리움이 남았느냐고, 우산을 쓰고 가는 소년의 옷자락에 어떤 빛깔의 꽃물이 배어 있느냐고, 우편배달부는 날마다 내가 사는 별 끝에서 끝으로 자나가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나는 늘 이 별의 한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날마다 우주의 사막을 가로질러가는 시간의 빛살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거다 그래도 나는 다시 편지를 쓴다 비가 내리는 별이여 우주의 어느 기슭을 떠돌더라도 부디 내가 사는 별의 사소한 그리움 한 방울에 답신해다오 나는 저녁놀 비낀 미루나무 위에서 못날 까마귀처..

- 그의 애송詩 2021.10.16

사랑 / Love - 김상미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 Photo :: Chris Yoon (강원도 육백만마지기에서) - Poem :: 김상미의 '사랑' - Music :: Jacob's Piano - Your Melody (2019)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식물이 태양을 향하듯 한 사람을 향한 向日性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의 특성이..

- 그의 애송詩 2021.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