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406

송산서원에서 묻다 - 문인수

송산서원에서 묻다 문인수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 이쯤에서 그만 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 저것 캐묻는다. 찔레 덤불이 겹겹 앞을 가로 막으며 못 들어가게 한다. 돌아서고 싶을까. 찔레 가시에 찔리며 억지로 들어선 마당, 그리고 뒤꼍. 풀대들, 풀떼며 잡목들이 불학무식하다. 공부하고 싶을까. 작은 마루에 방 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까.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줄을 쳐, 토종 강냉이 수십 다발을 주렁주렁 널어두었다. 산새 부리들, 들쥐 다람쥐 청설모… 잇자국들이 대를 이어 상세하다. 이 빠진 세월은 또 얼마나 길까. 누군가 버리고 간 한 무더기 세로쓰기 책들, 대강 넘겨보니 사법고시 준비를 한 것 같다. 그리고 취사도구 몇 잘살까. 거미줄이며 먼지가 이렇게 ..

- 그의 애송詩 2022.08.14

6월의 살구나무 - 김현식

6월의 살구나무 김현식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기억나는 일이 뭐 아무 것도 없겠는가? 6월의 살구나무 아래에서 단발머리 애인을 기다리며 상상해 보던 피아노 소리 가늘고도 긴 현의 울림이 바람을 찌르는 햇살 같았지 건반처럼 가지런히 파르르 떨던 이파리 뭐 기억나는 일이 없겠는가? 양산을 꺼구로 걸어놓고 나무를 흔들면 웃음처럼 토드득 살구가 쏟아져 내렸지 아! 살구처럼 익어가던 날들이었다 생각하면 그리움이 가득 입안에 고인다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살구처럼, 하얀 천에 떨어져 뛰어다니던 살구처럼 추억은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추억의 건반 위에 잠드는 비, 오는 밤 연일 폭우가 쏟아지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어두운 하..

- 그의 애송詩 2022.08.12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 심재휘

오리바위 십리바위 심재휘 경포 바다는 열걸음만 들어가도 키를 넘어서 오리바위는 바라보기만 했다 몸 크면 가보리라 했다 그 바위 뒤에는 가물거리듯 십리바위가 있어서 간혹 거기까지 헤엄쳐 갔다 온 아이들은 서둘러 어른이 되었다 ​ 십리바위 너머로는 바위도 없이 바다가 넓기만 했다 흔히들 망망대해라 했다 ​ 아버지 손을 잡고 해변을 나오다가 그 먼 저녁 바다를 다정하게 돌아보고는 했다 ​ - 심재휘 詩集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中 '오리바위 십리바위' - 심재휘 꼭 경포바다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어렸을적 자라던 마을에는 넓고 깊은 냇물만있어도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들은 이름들이 붙어있었다. 오리바위, 십리바위, 새 바위, 용바위, 거북바위... 여기서 시인이 살던 경포바다에 있는 바위들은 오리,..

- 그의 애송詩 2022.08.01

오늘 치 기분 - 오은

오늘 치 기분 오은 ​ 깃털을 보았다 마음이 가벼워지려는 찰나 깃털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눈이 절로 깜빡였다 저 멀리 솟구치는 것이 있었다 눈이 부셨다 햇볕이 따갑다고 해도 좋다 햇볕이 뜨겁다고 해도 좋다 온몸으로 햇빛을 보았다 바람이 포근하다고 말해도 좋다 바람이 부드럽다고 말해도 좋다 온 마음으로 공기를 마셨다 오늘 치 기분이 생겼다 오늘 치 기분이 생겼다 생긴다는 것 없던 것을 가지게 된다는 것 당분간 내 것이 하나 는다는 것 몸 속에 있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걷지 않아도 움직움직하고 있다는 것만 안다 깃털을 보았다 떨고 있는 깃털을 보았다 방으로 돌아오면 따갑고 포근하다 뜨겁고 부드럽다 오늘 치 기억으로 이루어진 시간을 보았다 잠들기 직전 떠오르는 풍경이 꾸무럭꾸무럭 꿈에 나타난다 꿈에..

- 그의 애송詩 2022.07.29

詩의 배경을 찾아서 - 백석(白石)의 산숙(山宿)​, 향악(饗樂)​, 야반(夜半)​, 백화(白樺). 그리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산숙(山宿)​, 향악(饗樂)​, 야반(夜半)​, 백화(白樺) 산숙(山宿)​ ㅡ 山中吟 1 ​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 * 들물들물 : 더운 느낌을 나타낸 말. 그즈런히 : 가지런히. 얼골 : ' 얼굴'의 고어, 방언 향악(饗樂)​ ㅡ 山中吟 2 ​ 초생달이 귀신불같이 무서운 산山골거리에선 처마끝에 종이등의 불을 밝히고 쩌락쩌락 떡을 친다 감자떡이다 이젠 캄캄한 밤과 개울물 소리만이다 * 향악響樂 : 잔치노래. 쩌락쩌락 : 시..

- 그의 애송詩 2022.07.25

다시 잠드는 동안 - 윤성택

별의 소리는 날마다 천구를 긁는다 시간의 촉감에는 시선이 새겨져 빛을 흘리는 푸른 밑줄에 대한 심경이 있다 나는 도무지 잠들 수가 없어서 잠든 시간에 가서 나를 깨우고 맨발로 꿈을 앞세워 한없이 걷는다 별은 조금씩 내면에 흠집을 내면서 어제와 다른 위치로 명멸한다 몸속으로 궤도를 도는 별들, 나를 지나는 공(空)의 작은 균열 그 핏기를 따라서 섬이 환하게 켜진다 윤성택의 중 다시 잠드는 동안 잠이 오질 않는다. 벌써 몇 달째 病的인 불면이다. 항암치료를 하면서부터 였다. 의사는 이야기했다. ' 잠이 안오면 수면제 처방을 해드릴까요?' '아뇨. 습관되면 좋지않을듯해서요.' 그리고 밤마다 잠이들기 위해 애를썼다. F.M.을 틀어놓고 잡생각을 없애며 몰두해서 음악과 방송진행자가 읽어주는 시인의 시를 듣는다는것..

- 그의 애송詩 2022.07.23

누가 조용히 생각하는 이를 가졌는가 - 박노해

누가 조용히 생각하는 이를 가졌는가 파도치는 밤바다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긴 이를 본 적이 있다 그는 격류 속에 두 발을 딛고 깊은 생각으로 길어 올린 빛을 어둠 속의 등대처럼 발신하고 있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갈 때 긴박한 행동들이 사고능력을 압도할 때 누가 조용히 생각하는 이를 가졌는가 속도 빠른 변화의 한가운데서 심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직관하는 사람 미래의 눈빛으로 전체를 뚫어보며 시대정신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사람 누가 조용히 생각하는 이를 가졌는가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중. '누가 조용히 생각하는 이를 가졌는가' 작년 7월부터 올 7월, 일년이라는 인내끝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공백을 미처 8월이 오기도 전에, 7월 한달 30을 채우기도 전에 그는 간다. 총총한 ..

- 그의 애송詩 2022.07.21

무화과가 익어가는 순간 - 조용미

무화과가 익어가는 순간 조용미 ​ ​ 비가 큰 새처럼 날아다닌다 큰 새의 깃털들이 옆으로, 위로 흩어지고 있다 ​ 바람은 비를 데리고 옆으로, 옆으로 ​ 많은 먹구름이 지나갔다 더 많은 바람이 지나갔다 비는 다시 돌아왔다 ​ 그 자리다 ​ 무화과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시들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고마나루 삵의 발자국은 발톱을 오므리고 걷는다 ​ 초록이 바람을 끌고 날뛰고 있다 ​ 태풍이 위서처럼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 나는 큰 새의 그림자를 덮고 있다 ​ —《시와 사상》2020년 겨울호 장장 7개월간의 항암치료를 끝내고 병원문을 나선지 이제 3일이 지났다. 3일동안 나에게는 많은 심적 변화가 있었다. 밖의 세상과 담을 쌓고 거실유리창으로 보이는 남한산성에서부터 내려오는 세상풍경을 보니 요즘이 장마철이란걸 알..

- 그의 애송詩 2022.07.19

찬란 - 이병률

찬란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 그의 애송詩 2022.07.17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길이 끝나면 지난해 여름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꽃씨가 난다 고요히, 고요히, 그가 세상을 떠난다 지금 마악 꽃씨가 난다 한 줌의 영토에 뿌리를 두고 거대한 폭풍우에 흔들리면서 최선을 다해 피어난 작은 꽃 흐린 세상에 맑은 숨결 보내준 풀꽃들이 한 생의 몸을 말려 검은 씨앗에 담고서 흰 날개를 펴고 다음 생을 향해 떠난다 가을바람이 부는 날은 고요히, 고요히, 지금 마악 꽃씨가 난다.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중. '길이 끝나면, 꽃씨가 난다, '. 지난해 여름, 카메라를 들고 강원도의..

- 그의 애송詩 2022.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