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숙(山宿), 향악(饗樂), 야반(夜半), 백화(白樺)
산숙(山宿)
ㅡ 山中吟 1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 들물들물 : 더운 느낌을 나타낸 말.
그즈런히 : 가지런히.
얼골 : ' 얼굴'의 고어, 방언
향악(饗樂)
ㅡ 山中吟 2
초생달이 귀신불같이 무서운 산山골거리에선
처마끝에 종이등의 불을 밝히고
쩌락쩌락 떡을 친다
감자떡이다
이젠 캄캄한 밤과 개울물 소리만이다
* 향악響樂 : 잔치노래.
쩌락쩌락 : 시인이 만든 말로 떡을 치는 소리를 나타낸 의성어.
야반(夜半)
― 山中吟 3
토방에 승냥이 같은 강아지가 앉은 집
부엌으로 무럭무럭 하얀 김이 난다
자정도 활씬 지났는데
닭을 잡고 메밀국수를 누른다고 한다
어늬 산 옆에선 캥캥 여우가 운다
* 활씬 : '훨씬' 보다 어감이 작은 말.
백화(白樺)
― 山中吟 4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 시선집 '모닥불'중에서. 1988년 솔출판사)
* 백화白華 : 자작나무
박우물 :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는 얕은 우물.
윗 詩, 4편은 모두 백석의 詩이다.
뭔가 절박하고 혼자 쓸쓸히 떠도는 느낌이 詩에서도 느껴진다.
같은 시기에 왜 백석은 이런 詩들을 썼을까?
자야가 없는 쓸쓸하고 허전한 함흥에서 백석은 겨울을 보냈다.
그는 산이 깊다는 산골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국수집을 겸하는 산골의 여인숙으로 가서 새까맣게 때가 오른 목침을 베어보기도 했다(「산숙山宿」), 밤새 종이등에 불을 밝히고 감자떡을 치는 소리를 들었다(「향악鄕樂」). 자정이 지나서 닭을 잡고 메밀국수를 늘리는 마을에서 여우가 우는 소리도 들었다(「야반夜半」). 그곳은 산을 넘어가면 평안도 땅이 보인다는(「백화白樺」) 첩첩산중이었다.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구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가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산숙山宿」에는 1930년대 함경도 산골의 전형적인 풍경과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이 압축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집에는 손님이 묵는 방에도 밀가루포대와 국수분틀이 있다. 이 방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목침이다. 오래된 목침에는 새까만 때가 올라 있다. 화자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목침에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백석은 여러 편의 시에서 ‘생각한다’라는 서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이 백석의 시에 와서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고 시의 폭을 한없이 넓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당시 생계와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떠도는 우리 민족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시각적으로 자작나무가 가득한 모습을 백석은 자작나무의 쓰임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시인 백석(白石)과 자야(子夜)의 사랑
< 19세에 문단에 등단한 20대 백석 >
광화문통이 갑자기 훤해진다. 녹두빛 양복의 단추를 열어젖히고 검은 물결의 머리를 휘날리며 광화문 네거리를 한 청년이 지나간다. 시인 백석(白石)이다.
그가 지나가는 광화문은 잠시 식민지의 우울한 네거리에서 예술과 지적 교양이 넘쳐나는 낭만의 거리, 파리의 몽파르나스로 변해는 듯하다
(조선일보 1936년 1월 29일) 김기림은 백석을 이렇게 썼다.
시인 백석(白石)은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백용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기행이며, 백석은 문단에 나오면서 사용하게 된 필명이다. 그의 부친은 한국 사진기술사의 초창기적인 인물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며 퇴임 후에는 낙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경영하였다. 백석은 개화한 집안의 분위기에 걸맞게 일찍부터
정규 신식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18년 오산 소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졸업과 동시에 오산학교에 진학하였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함과 동시에 조선일보사 후원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1934년 그의 나이 23세때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그는 조선일보에 근무하면서 자매지《여성》의 편집을 보던 중인 1935년 8월 31일 《조선일보》에 시「정주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는 등단 후 1936년 1월에 시집 『사슴』(선광인쇄, 100부 한정판)을 간행하여 단번에 주요 시인으로 부각되었다.그는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고보 교사로 있다가 1938년에는 교원직을 사임하고 서울을 거쳐 만주 ‘新京’으로 갔다. 이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업무에 종사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그의 고향 정주에 머무르게 되었다.
1948년 10월 《학풍》 창간호에 「남(南)신의주 유동(柳洞) 박씨봉방(朴時蓬方)」을 발표한 후 문학사에서 실종되다 시피했다.
백석의 시(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
- 지은이 : 백석 (1948년 문예지 '학풍' 에 발표된 시 )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제목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
남신의주(南新義州)시 유동(柳洞) 마을에 사는 박시봉(朴時逢) 이라는 사람이 있는 방(方, 방향, 방면) 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주소(화자의 현재 위치)를 나타내는 말로, '박시봉'은 아마도 시적 자아가 세 들어 있는 집주인인 목수의 이름일 것이다.
■ 시 감상
1948 년에 서울에서 발행된 ' 학풍' 지에 발표된 작품인데, 당시 백석은 이미 북쪽에 머물고 있었다. 백석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로 영문학을 공부했던 이른바 모던 보이였다. 신문 기자와 영어 교사도 했던 요즘 연예인들 못지 않게 잘 생긴 시인 백석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사투리로 박시봉 집에 살게 된 과정,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보면서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수 없는 '운명'을 이야기합니다.그리고 '운명'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런 운명에 전적으로 굴복하거나 회피하지 않겠다고 하며 새로운 삶을 다짐한다.
서정적 자유시로 독백적 반성을 토속적 소재와 사투리로 편지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근황을 진솔히 들어내며 무기력한 삶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새로운 삶의 의지를 나타내주고 있다.

북한 인민증에 붙어 있는 백석의 증명사진(왼쪽)
1980년대 중반에 백석 70 대에 촬영한 가족사진(오른쪽)
백석 옆에 있는 이가 해방 후 조만식 통역 비서로 평양에 가 14살 연하 이윤희 여사와 네번째로 결혼하여 평생을 살았으며, 뒤는 둘째 아들과 막내 딸이다. 송준 작가가 구해서 발표했다.
1948년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백석의 시가 발표됐다. 위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다.
일본 유학과 경성에서의 조선일보. 잡지사의 편집일, 평양과 함흥에서의 여고교사 생활 그리고 일제가 대동아전쟁으로
우리 민족 수탈의 절정에 이른 시기에는 세관직원으로 무일푼으로 만주를 떠돌던 백석은 몇개의 시를 남겼는데 위의 시가 그렇다.
당시 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부친 시인 것이다.
당시 백석의 심사를 가장 잘나타낸 시다.
해방후 남북 분단이 되자 북한에 남게 된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해방 직후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솔로호프의 『조용한 돈강』 등을 번역하고 김일성과도 가끔 만났다고 전해진다. 한동안 김일성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던 백석은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의 한인촌에 머물다가 휴전후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숙청을 당해서 고향 가까운 협동농장에서 시달려 오다가 1996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사진은 백석이 북한에서 숙청당한후 협동농장에서 노역에 시달리던 1980년 무렵 부인과 아들,딸과 함께 찍은 것이다.
한국의 현대 시인 김소월, 윤동주, 조지훈, 서정주 박목월 ...등은 많이 알고 있지만 북에 체류한 시인 백석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않았다.
백석(白石)은 1912년 평북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와 일본 아오야마(靑山) 대학 졸업후 귀국 후, 1934년 조선 일보에 취직중1935년 24세에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 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933년대 백석의 시집 <사슴>은 이 땅의 시 토양에 많는 경이를 던졌다. 백석의 1930년-1940 년은 백석에게는 사랑과 낭만의 시절이었으며 이 시기에 통영의 란, 자야 여사등 많는 여인들을 만나며 그의 시심을 마음껏 펼쳤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이 1936년 (25세) 초판 500 부는 발간 되자 마자 팔려 나갔고, 당시 문단의 김기림은 우리 시단에
'포탄을 던져 일거에 광풍을 일으큰 경이 !'라고 했고, 신석정은 시집 <사슴>을 받고 스스로 감동해서 헌시 <수선화> 를 썼다고 하며. 윤동주는 시집에 밑줄을 그어가며 배우며 경탄 했고, 당대 시인들이 이구 동성으로 찬탄했다고 한다.
해방후 우연찮게 시집 '사슴' 을 구한 신경림, 김춘수....등 현대의 시인들은 백석의 시에 매료되어 백석의 화두로 1970년-1990년을 보냈다고 하며, 1930년-1940년 대 백석의 문학은 가장 주옥 같은 경이 그 자체였다고 한다

' 길상화 법명을 가진 '자야(子夜)'
■김영한金英韓(1916-1999)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열여섯 살 때,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있던 청년 백석白石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했다.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다.
김영한은 지난 1951년 서울 성북동 청암장을 인수해 '대원각'으로 개명, 국내 3대 요정의 하나로 키워냈다.
과거 고급 요정의 대명사였던 서울 성북동 대원각(당시 1000억원을 호가)을 법정스님에게 조건없이 시주해 길상사吉祥寺로 변신케 했다.
여기서 우리는 '자야'여사의 글을 함께 감상 해 보기로 한다.
짧은 사랑에 긴 이별
ㅡ시인 백석과 자야 여사와의 사랑
밤이 깊었습니다.
병실의 밤이 고즈넉합니다.
백석! 그대 이름을 또다시 불러봅니다.
세상은 저를 ‘백석의 애인 자야 여사’라고 부릅니다.
제 나이 어느덧 여든셋, 이번에는 걸어서 퇴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깊어가는 이 밤에 그대와의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제가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함경남도 함흥에서였지요.
그대는 시집 『사슴』을 낸 그해, 조선일보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흥시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었습니다.
그대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난 촌사람인데 2년여 서울 생활에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생고보에 있던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같이 있자며 불렀고, 에라 머리나 식히자고 함흥으로 왔던 것이지요.
일본 청산학원 영문과를 우등으로 나온 실력에 서울서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이라, 영생고보에서 아주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였고 그대는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집안이 망하자 1932년 조선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지요.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신 선생이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자 저는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잠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를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한 그대는 술잔을 저한테만 권하면서 관심을 보였지요. 자리가 파하여 헤어지면서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제가 사는 하숙집에 수시로 찾아와 만주에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내뱉곤 하셨는데 그 말씀 또한 진심임을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하셨지요.
저는 기생이었기에 그대의 ‘숨겨 놓은 애인’이 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처는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던 게지요.
그대는 제가 선물한 『당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고 저를 ‘자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저의 본명 김영한은 사라지고 그대의 자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사시던 그대의 부모님은 장가를 가라고 성화였지요.
쉰이 넘은 그대 어머니가 손자를 보고 싶다고 조바심을 냈지요.
한 집안의 장남이 객지를 떠도니까 가정을 꾸려 안정을 취하라고 친척들도 번갈아 가며 충고했습니다.
저 역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야지, 기생 치마폭을 잡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성혼을 부추기곤 했습니다.
그 다음해 그대는 집에 다녀왔는데, 혼례를 치른 뒤 사흘 만에 달아나듯이 집을 나와 함흥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대 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왔습니다.
1937년 4월에는 그대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4월 7일에 그대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처녀 란(蘭)이 결혼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그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이란 분과. 저는 그저 애인 정도였고, 란이란 분과 결혼을 하기 원했던 것 같은데 무너진 사랑탑이 돼버린 것입니다.
다시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38년 봄이었지요.
저는 청진동에 작은 집을 구해 기예를 닦고 있었는데 웬 아이가 쪽지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제일은행 부근 오뎅집에서 그대를 보는 순간, 모든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저는 평생 그대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밤차로 함흥으로 떠나는 그대를 배웅하면서 저는 그대의 아내가 누구이던지 간에 평생 사랑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교사였던 그대는 전선(全鮮) 고보 축구대회에 참가하려고 선수들을 인솔해 서울로 다시 왔습니다. 와서는 선수들을 돌보지 않고 일주일 내내 저한테만 와 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영생여고보로 전보발령이 납니다. 선수들이 유흥장에 간 것이 합동단속교사에게 적발된 것입니다. 몇 달 뒤 그대는 사표를 써 우편으로 부치고는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합니다. 『여성』지 편집을 하다가 조선일보사로 다시 들어갔지요.
그대는 저와 청진동에다 아예 살림을 차렸습니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가 딸린 작은 찬방으로 된 집은 우리의 단란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대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타이를 하나 선물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좋다고 하더라며 저녁 때 들어와서 몇 번이고 넥타이 잘 고른 제 안목을 칭찬해 주던 그대의 자상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 생애에서 그때만큼 밥 짓는 것이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대는 고기보다는 나물반찬을 좋아했지요. 그대의 첫 부인은 아마도 크게 낙심한 채 친정으로 갔을 것입니다.
저와의 살림살이를 알고 있던 그대 부모님은 아들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새장가를들이기로 했습니다.
1939년 6월이었지요. 그대는 충청도 진천으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쪽 사람과 혼인을 하러 가는구나, 저는 짐작했습니다.
부모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해 온 그대인지라 부모님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을 테지요. 보름이 넘게 아무 소식이 없자 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짐을 싸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시각에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자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망설이다가 에라 얼굴이나 보고 완전히 헤어지자고 얘기해야지 하는 생각에 황급히 나가 보았습니다. 그대는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더군요. 저의 독한 마음은 또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새 색시를 버려두고 또다시 저한테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이런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는 모든 것 다 팽개치고 만주로 가서 숨어살고 싶었나 봅니다. 저한테 같이 가자고 몇 번 권했지만 저는 기생으로서의 제 생활이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해 말, 그대는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습니다. 오랜 꿈을 이룬 것이겠지요.
그대의 역마살을 제 사랑이 부족하여 붙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번역하여 출간하고자 서울에 잠시 다녀간 것이 1940년이었고 그 이후 그대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주 안동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지만 함흥고보 제자가 찾아가 보니 중년의 초라한 모습이 되어 있었고 생활도 궁핍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38선에 철조망이 놓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그대의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됩니다. 저는 해방 후 요정 ‘대원각’을 인수했습니다. 장안 최고 요정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허전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월북시인이 아니었음에도 월북시인으로 간주되어 시가 읽히지 못한 세월이 참으로 길었지요.
이동순 시인의 노력으로 그분의 첫 전집이 나온 것이 1987년, 이때부터 저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인 백석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이제는 제가 나서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요정은 불교계에 기증하였고 재산을 정리하여 2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돈을 백석문학상의 제정에 써달라고 기탁했습니다. 그래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백석 시인은 한낱 기생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저는 그 은혜에 조금 보답했을 따름입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러브스토리의 시작은 1936년 함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길을 지나가면 여자들이 자지러졌을 정도였다.
백석이 함흥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1936년, 회식 자리에 나갔다가 기생 김영한을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이 잘생긴 로맨티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손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 우리 사이 이별은 없어요.' 라는 일반인이 했으면 뺨을 후려맞을 느끼한 멘트로 김영한의 마음을 산다.
당시 백석은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는 취미가 있었는데 김영한에게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지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1939년까지 3년간 행복한 동거생활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장애물 없는 러브스토리가 어디 있으랴. 이들 사이에도 장애물이 등장한다.
그것은 집안의 반대였다.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 놓으려 했다.
그러나 여기서 굴복할 백석이 아니었다. 백석은 결혼 첫날밤도 치루지 않고 그의 여인 자야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자야는 보잘것없는 자신이 혹시 백석의 장래에 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언젠간 자야가 자신을 찾아 만주로 올 것을 확신하며 먼저 만주로 떠난다. 만주에서 혼자된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며 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동안이라고 믿었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야 만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오지않는 자야를 찾아 만주에서 함흥으로 내려갔지만 자야는 당시 서울에 있는 상황이었다.
그 후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면서 둘은 각각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시는 마주하지 못하게 된다.
이 후 백석은 북에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1996년 사망하게 된다.
훗날 자야는 당시 시가 1000억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다.
그 대원각이 바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가 된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했던 자야는 늘 담배를 곁에 두고 살았고 결국 폐암으로 1999년 세상을 떠난다.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줄만 못해."
또 자야는 생전에 일년에 단 하루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은 7월 1일, 백석의 생일이었다.

자야의 유언은 '내가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야의 유골은 백석의 시에서처럼 '눈이 푹푹 나리던' 어느 날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자야 김영한의 회고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중에서 발췌한 詩는 백석을 향한 그녀의 뼈저리게 사무친 그리움이 잘 그려져 있다.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 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요정으로 꼽혔던 대원각이 길상사가 된것은 이미 서술한 바다.
1987년 공덕주 길상화(법명) 김영한 여사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아 스님을 친견 한 뒤 당시 싯가 1,000억원이 넘는 음식점이던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청정한 불도량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청하였다.
1995년 법정스님이 그 뜻을 받아들여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을 하고 주지에 현문스님이 취임 했다.
1997년에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한다.
■자야 김영한 여사는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1997년 12월 14일 법정스님으로 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만 받고 절터와 전각을 모두 보시하고 길상사가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기를 바랬다.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소원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은 대원각 시절 여인들이 옷을 갈아 입던 팔각정이 있던 자리에 종이 달린 누각을 세우니 이곳이 바로 범종각이다.
< 자야(子夜) : 본명 김영한(金英韓)/ 법명 길상화(吉祥花) 1900년 -1999년 >
백석(白石) 이 지어줬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였던 백석을 함흥의 한 기방에서 백석을 만났으며,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백석은 그녀에게 청혼도 했고, 당시 진향이라는 기명이 있었지만 '자야(子夜)' 라는 이름도 선사했다.
자야(子夜), 이태백이 수자리간 낭군을 그리는 자야(子夜) 라는 여인의 심회를 읊은 시 자야오가(子夜吳歌) 에서 따왔다. 자야 여사는 노후 마지막 거처에 자야오당(子夜晤堂) 이란 편액 액자를 걸어 두었으며, 백석은 창작 전성기였던 1936년 부터 그녀와 3년간 함께 살며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 시편들을 선사 했다고 한다.
자야 여사는 1999년에 작고하였다.
월북시인이 아니라 재북(在北)시인이었던 백석은 1945년 말 북한에서 재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1996년 사망할 때까지 33년 동안 붓을 꺾고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남쪽의 자야 여사가 그렇게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다 갔다는 것도 분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ㅡ『빠져들다』에서
김영한 여사는 언제 시인이 가장 보고싶냐는 기자의 말에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때가 따로있겠냐는 대답을 했고
대원각을 길상사로 봉헌할때 백억이 아깝지 않냐는 물음에 '백억도 백석시인의 시 한줄만 못하다'고 했다고 한다.

<내 사랑 백석>, 김자야(김영한), 문학동네, 2021년
이 말은 김영한의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 <내 사랑 백석>(1995)을 토대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반영됐으며, 통영 출신의 란(박경련)이라는 여성을 좋아했던 백석이 김영한을 보자마자 좋아했다고 그린 것이다.
김영한은 "<당시(唐詩) 선집>을 사 왔을 때, 백석이 그 책을 읽고 '자야(子夜)'란 호를 지어주었다"라고 주장했다. '자야'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학원(?山?院)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시 <두보나 이백같이>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자야(子夜)라고 주장하는 여인은 김영한 외에도 더 나왔으며, 자신이 '이국의 여인'을 뜻하는 나타샤라는 주장하는 여인도 여럿이었다. 또한, 김영한의 주장을 담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백석의 시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을 가사로 만들어 자야(子夜)와의 사랑을 담은 것으로 그렸으나 이는 실제와 다르다.
<바다>만 해도 통영의 바다를 거닐며 쓴 시로 백석이 사랑했던 박경련(란)을 생각하며 쓴 연가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친구와 결혼한 '란'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뮤지컬에 나오는 백석의 시와 서사는 서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김영한은 "백석이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제안했으나, 내가 백석의 앞길을 막게 될 것을 염려하여 거절했고,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라고 주장했으나, 백석은 1938년 영생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고 있었다.
김영한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 뒷골목에 방 2개가 있는 비좁은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주장했으나, 그 증거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백석은 최고급만을 걸치는 패셔니스트에 결벽증이 있을 만큼 깔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 살림을 차려 자고 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는 편지로 연락하는 시대라 백석의 지인들도 백석에게 받은 편지가 많을 정도로 백석이 편지를 자주 썼는데, 연인에게 편지 한통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백석이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은 명문학교를 다닌 부유한 집안의 신여성들이었다. 첫사랑이었던 '란'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 첫 아내 역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2번째 아내 문경옥 역시 고등교육을 받은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와 어울렸던 여류 문학가들 역시 모두 당대의 신여성들이었다.
김영한은 "백석이 홀로 만주 신징으로 떠났고, 해방 후 백석이 신의주시에 잠시 거주 후 정주로 이동한 사이 6.25 전쟁이 발발해,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라고 했다.
실제 그 기간 동안 백석은 북한의 유명 여성 음악가인 문경옥과 결혼해 2년간 결혼생활을 하고 이혼했으며, 해방 무렵 만난 3번째 아내 리윤희와 이후 50년간 해로한다. 김영한은 "백석은 다섯 여인보다 나를 사랑했다"고 주장했다.
백석 연구자 송준은 1990년대 초반부터 백석과 백석의 시가 끼친 영향과 관련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생전 김영한을 직접 인터뷰했지만 그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매우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김영한이 백석의 시에 대해 거의 모르고, 그렇게 많은 돈이 있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또한, 3년을 연애했다면서도 편지 하나 가진 게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영한이 두 사람 관계를 과장한 것이라는 추측으로 끝을 맺었다.
국문학계에서도 김영헌의 <내 사랑 백석> 이라는 책에 거짓을 많이 썼다고 본다. 백석이 김영한을 만나기 전에 쓴 시를 자신한테 헌사했다고도 했다. 그리고 백석이 직접 자야에 대해 언급한 문헌은 없다.
대원각(大苑閣)
김영한이 기부한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
6.25 전쟁이 끝난 직후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 산골짜기의 한식당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대원각’(大苑閣)이라는 요정을 지어 경영하기 시작했는데, 군사정권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편, 부동산 등기부에 따르면, 김영한이 대원각 부지를 취득하기 전 소유주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박헌영(朴憲永, 1900 ~ 1956)의 동복이부(同腹異父) 누이 조봉희였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圓鏡) 스님은 박헌영의 조카 김소산이 김영한에게 관리 맡겼는데 1955년 김영한에게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1953 ~ 1954년 몹시 혼란스러울 때 김영한은 유력 정치인의 애첩이었고, 그 도움으로 대원각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었다.
길상사(吉祥寺)
1987년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법정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비롯한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절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시주 규모는 건물 40여채와 대지 23,140㎡로 당시 시가로 1,000억원이 넘었다.
법정스님은 처음에 그 청을 사양했다. 그러나 김영한은 근 10년 가까이 법정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다. 결국 법정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이고, 1995년 ‘대법사’로 등록했다가 2년 동안 개·보수를 거쳐 현재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으며, 당시 김영한은 수천 대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김영한은 길상사 건립 당시 '1,000억에 달하는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생각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해졌다.
김영한의 사후
김영한은 1999년 11월 유해를 눈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유해를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기에 따로 묘지는 없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작은 언덕에 김영한의 사당과 함께 그의 공덕비와 백석의 시비(詩碑)가 세워졌으며,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김영한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1950년대부터 대원각을 운영하면서 백석을 기리며 생활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는 유력 정치인의 애첩이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딸 서모 씨가 대한불교 조계종을 상대로 50억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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