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가을 - 조병화

Chris Yoon 2022. 9. 29. 01:21

 

가을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푸른 모자를 높게 쓰고

맑은 눈을 하고 청초한 얼굴로

인사를 하러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더웠었지요"하며

 

먼곳을 돌아 돌아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높은 구름의 고개를 넘어오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나보다.

멀리 남한산성이 붉은빛을 띄우기 시작하더니 집앞의 메타세콰이어 나무도 갈색으로 물이 들었다.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오나보다.

 

몇 해전 몽촌토성위에서 보이는 우이동의 백운대를 열심히 찍었던 적이있다.

우이동의 백운대는 각도에 따라서 한 남자가 누워있는 모양을 연출한다.

특히 죤 F 캐네디를 닮았다.

나는 누워서 사진을 찍고 산의 능선을 비교하여 보았다.

이 산을 젊은 시절부터 좋아했다.

특히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시간이면 산의 실루엣은 두려움을 줄 정도로 젊은 죽은 남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살다가 또 다시 먼 빛으로 보면서 산을 상기했다.

 

가을이 오면서 더 가까이 다가오는 산.

그 산은 나를 닮아있었다.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의젓한 모습이다.

나도 대학졸업을 하던날 아침,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싸가지고 제일먼저 성북동 큰 누나 집으로 갔었다.

언제보다 맑은 눈을 해가지고 학사모를 높이쓰고 누나에게 인사를 했었다.

"그동안 참으로 더웠었지요"라며.

 

대학공부를 하며 신세를 많이졌던 큰 누나.

내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몇일간 잠을 못 주무셨다면서 곰탕을 택배로 보내 주셨다.

그 누나가 지금 91세시다.

 

尹馝粒(윤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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