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사랑의 출처 - 이병률

Chris Yoon 2022. 12. 28. 22:10

 

 

산에서 사랑을 파낸다

새 떼처럼 마음이 운다

 

사랑에게 손을 뻗어 손을 달라고 했다

눈에 파묻힌 사랑은 손에 뿌리를 꼭 쥐고 있었다

 

사랑은 손을 내미는 대신 일생에 단 한 번

여름이 올 것이라 했다

그 여름이 오면 대륙 깊숙이 이 뿌리를 심어달라 했다

그 뿌리 속에 최선이 들어 있다고 했다

 

치밀한 여름이 왔다

여름의 조각들이 대륙을 붙들지 못해서

사랑은 뿌리가 드러났다

 

한사코 표식을 드러내겠다고

겹겹의 세계 바깥으로 나오고 만

사랑의 뿌리를 파낸다?

사랑은 뿌리여서 퍼내야 한다

 

뿌리가 번지고 번져서 파낼 수 없게 되어서

다시 되묻는다

온몸에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한다

 

사랑이 끝나면 산 하나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퍼다 나른 크기의 산 하나 생겨난다

 

산 하나를 다 파내거나

산 하나를 쓰다 버리는 것

사랑이라 한다

 

 

- 이병률 [사랑의 출처]

 

 

 

이젠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토막토막 생각이 떠오르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뒤죽박죽 생각이 날 뿐이지 한가지의 사건으로 놓고 볼때 한편의 영상물같은 그 기억들은 더 디테일하게 충격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떠오른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오래된 일이니만큼 내가 중학교 3학년, 지금 생각하면 어리지만 당시의 나는 알것은 다 아는 성숙하고 진지한, 같은 또래들하고는 어울리지도 않는 모범학생이었다.

 

당시 나는 어쩌다가 나보다 열살가량 더 많은 형을 알게 되었다.

그 형은 그때 군에 있었는데 사진도 잘 찍고, 사진뒤에다 매직펜으로 그림도 잘 그려서 주었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수영도 잘하고 등산도 잘하고, 주먹도 잘쓰는 아주 멋진 청년이었다.

그때, 형은 여의도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여의도는 사람이 살지않는 조그만 모래섬으로 군 비행장이 있고 비가 오면 홍수가 나서 군인들이 외출도 못나오는 곳이었다.

나는 그때 미술을 잘하는 학생으로 고교입시를 앞두고 있었는데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보고 형은 자신도 미술대학을 진학하려고 했었다면서 이루지못한 기대를 나한테 건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와 나의 인연은 더욱 굳어졌고 나는 서울예고를 거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운좋게 마칠 수 있었다.

형은 제대를 하고 영자신문사에 근무를 하면서 사진을 예전보다 더 잘 찍고 등산을 하면서 알피니스트의 꿈을 꾸고있었다.

그리고 그의 꿈처럼 알프스 몽블랑원정대에 나가게 되어 맹훈련을 받고있었다.

 

 

 

1967년 1월,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오는데 무심코 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며 나는 임시뉴스를 듣고있었다.

알프스 몽블랑원정대팀, 등반중 눈사태로 조난. 그러면서 조난자명단에 그의 이름이 나왔다.

 

형은 등반도중 텐트를 치고 내일 다시 오르기로하고 잠자리에 들었다한다

그런데 눈사태가 형의 텐트를 덮쳤다한다.

구조작업은 몇일동안 계속되었고 형의 텐트를 발견했을땐 평소 그의 잠버릇처럼 옆으로누워서 마시다만 양주병과 카메라가 머리맡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훗날 그 카메라에 든 휠름들은 인화되어 신문회관에서 그의 유작전이 열렸다.

 

나는 성인이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날때의 나이를 훌쩍넘겼고 직장에 들어갔지만 그를 잊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꿈에도 나타나지않았고 점점 나의 기억속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사랑은 손을 내미는 대신 일생에 단 한 번 여름이 올 것이라 했다

그 여름이 오면 대륙 깊숙이 이 뿌리를 심어달라 했다

그 뿌리 속에 최선이 들어 있다고 했다

 

산 하나를 다 파내거나

산 하나를 쓰다 버리는 것

그것을 사랑이라 한다

 

 

- 尹馝粒 (윤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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