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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에 물들다 I - 청송 주산지 I

가을은 또 훌쩍 깊었다 내가 병들어 아픈 사이에 투명한 햇살을 내리쬐다, 새벽 안개를 몰고왔다, 구절초를 한무더기 피우고 이슬을 맺게 했다가, 푸르던 사과를 붉게 익히다가, 들녁을 누렇게 물들이며 깊었다. 병원에서 나와 쇠잔해진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지으며 말했다. '그래, 한숨지을거 없어. 해마다 언제는 안그랬나?' 병원에서 퇴원을하여 여행을 떠났다. 달라진 세상풍경을 보고싶었다. 사우(寫友)가 해마다 간다는 곳을, 함께 가자고 부탁하여 먼 길을 달려갔다. 과연 세상을 달라져있었다. 새벽, 해가 떠오르기전에, 햇살이 피어날때 호수의 물안개도 피어난다면서 사우는 여관문을 나서 길을 떠났다. 나는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사우를 먼저 보내고 천천이 발걸을을 떼어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루 내쉬며 한걸..

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XV - 석굴암(石窟庵 )

토함산 석굴암 부처님을 뵈러갔다 오는 길. 마음이 돌처럼 무겁다. 아서라, 아직도 내가 수양이 덜 되어 그런것을... 上. 오래전, 우리가 본 석굴암 (당시에는 문이 없어서 동녁에서 오는 아침햇살이 부처의 얼굴에 비치며 닿았다 한다. 자료 사진) 下. 이번에 내가 찍은 석굴암 사진. 오로지 이것 한장 밖에 찍을 수 없었다. 경주 토함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석굴암은 신라 때 김대성이 만든 것이다 석굴암은 특이하게도 화강암이라는 단단한 바위를 동굴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그 안에는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오랫동안 변함없이 보존되도록 매우 과학적으로 꾸며져 있다. 한가운데 느긋하게 앉아 있는, 단아하면서도 근엄한 부처의 모습도 돌로 만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천 년 동안이나 잘 보존되..

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XIV - 불국사 III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불국사의 복원 공사도 중단되었고, 이미 세워졌던 건물들도 낡고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가 일제 침략기를 맞았다. 1924년에 대규모의 보수 공사를 하면서 다보탑을 해체 · 수리하였다. 그 때 탑 속에서 금동 불상 · 사리 장치 등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나 행방 불명되었고, 관련된 기록 자료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 후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하였다. 이 때, 그 때까지 옛 터로만 방치되어 오던 자리에 무설전 · 경루 · 관음전 · 비로전 · 화랑 등이 복원되고, 대웅전 · 극락전 · 범영루 · 자하문 등이 새롭게 단청되었다. 불국사 경내 면적은 38만 8,570㎢이며,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에는 국보급을 비..

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XIII - 불국사 II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삼았던 신라 사람들이 뛰어난 솜씨로 토함산에 정성스럽게 만든 보물이 바로 불국사이다. 불국사는 ‘부처의 나라’라는 뜻이다. 불국사는 고려 시대에 만든 역사책《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에 김대성이 세웠다고 했다. 그러나 불국사의 내력을 적은 《불국사 역대 고금 창기》에 따르면 이 절은 528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또,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절의 규모를 크게 늘렸고, 문무왕 때인 670년에 무설전을 새로 지었으며, 751년에 낡고 규모가 작았던 이 절을 당시의 재상 김대성이 크게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자료를 참고로 할 때, 불국사는 처음에 작은 규모로 세워졌던 것을 김대성이 크게 늘려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

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XII - 불국사 I

이곳에선 산새도 조심하여 울고 다람쥐도 눈치를 보며 도토리를 줏는다. 천년 사찰 불국사 가는 길, 참으로 추억도 많은 길이로구나. 나, 언제 이승의 업을 벗고 한 마리 산새되어 이곳을 찾아 올 수 있을런가? 나에게 불국사는 가끔 가본 사찰이다. 처음,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시작하여 청년기시절의 여행,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족들과의 여행까지하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때마다 불국사는 인파로 북적이는 사찰이었다. 봄철엔 봄철대로, 여름에는 신록을 즐기려고, 특히 가을철엔 현란한 색의 아웃웨어를 입은 등산객들이 찾아오는 명승사찰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코로나때문일까? 아무도 없는 불국사 경내에 들어서 포토죤을 차지하여 조용히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이곳이 포토죤이다. 불국사가 가장 불국사답게 멋있게 나오는 자리...

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XI - 포석정 (鮑石亭)

- 어이! 영의정, 시 한 수 읊고 한 잔 하게나. - 그러지, 다음은 자네 우의정 차례네, 자네도 시 한 수 준비하고 있게나. 우리가 서울에서 부터 경주까지 기차를 타고 하루 왼종일 수학여행을 왔던 고등학교 2학년 그 해, 이맘때쯤 가을이었다. 우리는 포석정을 둘러서서 사진을 찍으며 티없이 맑은 얼굴로 장난을 쳤다. 그 중에 세 명 여자애들은 소식을 모르고, 한 명은 청년작가로 그림을 그리다가 갓 마흔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나만 이렇게 낙엽같이 남아 홀로 서 있다. 포석정 (鮑石亭)은 경주 서쪽 이궁원에서 열리는 연회를 위해 만든 것으로 시냇물을 끌어들여 포어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에 물을 흐르게 하고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유상곡수(..

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X - 미추왕릉 (味鄒王陵)

미추왕릉은 1969년 8월 27일에 사적 제175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6만 159㎡이며, 무덤의 지름은 56.7m, 높이는 12.4m이다. 이 왕릉은 경주 황남동고분군 가운데 잘 정비, 보존되고 있는 대릉원(大陵苑) 내에 있다. 미추왕의 성은 김씨이며, 신라 제12대 첨해왕(첨해이사금)이 아들없이 죽자 추대받아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이 되었다.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이며, 갈문왕(葛文王) 김구도(金仇道)의 아들이다. 왕비는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262년에 왕위에 즉위하여 284년 승하할 때까지 23년간 재위하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백제의 침입을 물리치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왕이 승하한 뒤 능의 이름을 대릉(大陵)이라 하였다.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이라고도 부른다. 능..

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IX - 대릉원(大陵園)

대릉이라고 사람들은 부르나 서로와 서로를 이어주는 山이 되었구나 우리도 죽어 저토록 서로 이어지며 산이 되었으면. 친구야, 너는 내 옆에 묻혀라. 나는 네 옆에 묻혀 한 점 솔향기 함께 맡으며 누워 있자구나. 대릉원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서 따온 것이며, 신라시대의 왕,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독특한 무덤군이다.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들이 있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VIII - 교촌마을

서라벌 1000년 교촌마을에 밤이 깃든다. 늬엿늬엿 지는 저녁해를 보내고 나그네들은 또 어디서 잠을 잘까 그 소란하게 몰려다니던 사람들도 모두 어디론가 가버리고 옛 흙담 골목길은 고즈넉하다 이제 내가 나그네가 되어보련다. '교촌마을'은 향교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즉 교촌마을이 경주에 있는 교촌마을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향교가 있는 마을은 모두 교촌마을이라고 보면 된다. 경주 향교는 신라 신문왕 2년(682년)에 국학이 세워졌던 곳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향학, 조선시대 향교로 명맥이 이어졌다. 교촌마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경주교동법주가 있다 아쉽게도 향교도 내부를 고치느라 사진촬영이 불가피했다.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VII - 월정교

월정교는 낮에봐도 좋지만 밤에 보면 더 좋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면 누각과 다리기둥에 켠 불이 잔잔한 수면에 어리며 색다른 영상을 만들어낸다. 약간 중국건축의 느낌도 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잔잔하고 고즈넉하고 애잔한 느낌이 이건 틀림없는 우리의 것이다. 석양무렵부터 늦은 밤까지 이만큼 좋은 느낌을 주는 다리도 드물리라. 웅대하고 스케일이 큰 철다리보다 목조로 된 다리라서인지 훨씬 푸근하고 애잔하기까지 하다. 이 다리를 복원하기 위해 사학자들은 이곳을 서성대며 불탄 나무조각과 기와조각을 얼마나 줏어 들었을까. 거룩하여라. 그 시간의 흐름마저. 월정교는 통일신라 시대 서라벌에 세워졌던 다리였다. 세트로 지어진 일정교와 함께 국왕이 사는 궁전인 경주 월성과 그 남쪽 남천 건너편의 남산(경주)쪽 지역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