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古宮산책 17

조선왕조 계보

조선왕조 계보 조선왕조 계보 조선왕조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집권했던 왕조이며 창건자인 1대 태조를 시작으로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총 27명의 왕이 승계했습니다. 조선왕조 계보의 국성은 전주 이씨이며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군주의 직함도 황제로 바뀌었고 1910년까지 통치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조선왕조 계보를 순서대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 태조 (1392-1398) : 이성계, 고려말 무신이었는데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케 함. 1392년 조선왕조를 세우고 조선의 제1대 왕이 됨. 조선의 역사는 고려의 무장 이성계(李成桂)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의 왕족과 권문세족을 몰..

덕수궁 돌담길의 회고

2022년 신년을 맞아 나의 학창시절에 고등학교가 있던 덕수궁 돌담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1960년대에는 광화문에서 서소문일대, 덕수궁 근처에 많은 고등학교가 있었다. 서울고, 경기여고, 배제고, 서울예고, 이화여고가 있었다 그중 나는 서울예고를 다녔고 현재 서울예고는 세검정으로 이전을 했고 내가 다니던 서울예고는 서울예원이라는 이름으로 예원중학이 사용을하고 고풍스러운 이화여고도 아직 자리를 지키고있다. 내가 다닐때의 1960년대의 광화문일대는 아침이면 등교하는 고등학생들로 번잡했다. 당시에 지하철은 없었고 시내버스나 열명가량이 타는 작은 합승버스, 돈이 있는 부유층의 자제들은 두세명이 어울려 택시로 합승을 하기도 했다. 시청앞 광장의 좌측은 명동으로 빠져나가는 길로 조선호텔, 미도파백화점이 있었고 우측..

겨울, 종묘

텅 비었던 머리속을 나도 '생각'으로 가득채웠다 하늘은 일식(日蝕)처럼 해가 가리워져 흐리고 삭정이 같은 겨울나무들이 빈 까치집을 품고 있는데 겨울고궁을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나를 만들어 나가는 '생각'이리라 잔설이 남은 겨울 고궁, 종묘를 걷다가 유난히도 '생각'에 잠겨있는 눈(眼)들을 만났다 이국에서 온 남자와 여자의 눈은 생각에 가득 잠겨보였다 특히 남자의 눈이... 남자는 여자를 깊이 사랑하는듯 보였고 여자도 남자를 깊이 신뢰하는듯 보였다 Pasternak의 소설 가 떠오르는 얼굴들이었다 여자는 얼마나 라라의 모습을 닮았나? 남자 또한 얼마나 젊은시절의 지바고를 떠오르게 하는 얼굴인가? "Where you fom?" 내가 물었다 "Sweden... Then where did y..

운현궁에서

행진곡 (行進曲) 서정주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醉)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 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 난타(亂打)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 7,8월의 뜨거운 뙤약볕도 아랑곳없이 서울의 5大 古宮을 찾아다니며 사진촬영과 자료수집하기를 한 달여, 이젠 끝내야할듯 합니다 제가 자란 서울, 그동안 왜 관심을 기우리지않았었는지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 어린시절, 벚꽃놀이를 가서 동물원 구경을하며 놀이기구를 탔던 창경궁 - 학교가 끝나고 하교길에 들려 2층 누각에서 잠을 잤던 경회루 - ..

seoul, seoul

서울풍경 1899, 휴버트 보스, 캔버스에 유채, 31x 69cm 역사 속 그림의 풍경화를 보면 그속으로 빠져들며 그시절 내가 실제 살았을지 모를, 꿈을 꾸고만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데쟈뷰에 젖어들곤 한다. 저 멀리 산 밑, 희미하게 보이는 경복궁 근정전. 그곳 경복궁으로부터 광화문, 정동에 이르는 길이 한 눈에 그려져있다. 하얀 도포를 입은 사람들이 시간 너머에서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다. 처마를 마주대고, 물결치듯 너울거리는 기와들을 본다. 근대화의 삶의 터전이자 중심이었을 그 거리에 현대의 빼곡한 빌딩도시가 오버랩된다. 시대는 빠르게 흘렀지만가만히 찾아보면 아직 그 시대의 향기와 정서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들이 있다. 그곳을 걷거나, 잠시 멈춰 서있거나, 바람속에 섞여오는 그때의 소리를 들을 때면 ..

'휴버트 보스(Hubert Vos)- 그는 최초로 한국인의 초상화를 그린 푸른눈의 서양인이었다

휴버트 보스(Hubert Vos)그는 최초로 한국인의 초상화를 그린 푸른눈의 서양인이었다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있었다. 당시 화재로 고종황제의 어진(御眞)은 소실되었지만, 파란눈의 화가'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가 초상화를 제작할때 왕실의 윤허를 받아 화가 소장용으로 한 점 더 제작하였던 '고종황제 어진(御眞)'은 다행히 오늘날 남아있게 되었다. 보스(Vos)는 당시, 1911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종 황제가 자신이 그린 민 상호의 초상화를 본 후에 고종의 어진(御眞)과 당시 황세자이던 순종의 초상화를 그리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왕의 어진(御眞)은 의자에 앉은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휴버트 보스(Hubert Vos)'는 서 있는 모습의 고종..

胡 蝶 夢 (나비의 꿈)

胡 蝶 夢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내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다가 누워 잠들어있는 나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는건가? .. 원래 나비인 내가 사람이 되는 꿈을 꾸었던것인가?" 장자의 '나비의 꿈' 호접몽 [胡蝶夢 ]이란 중국의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자아(自我)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하는 말이다. 요즘 고궁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자료수집을 하느라 종묘의 망묘루(望廟樓) 방 한 칸을 빌려 향대청을 바라보며 책을 읽는다 망묘루(望廟樓)는 임금이 제사를 지내기위해 종묘로 온 후, 잠시 머물러 쉬면서 사당을 ..

王과妃의 신주 49위가 모셔진 宗廟(종묘)

훠이, 훠이. - 이승에서 못 다 푼 삶. 저승가서 잘 푸시오. 한 나라의 임금이었을망정 왜 한이 없으리오. 임금이 승하해도 용마루에 올라 그의 옷을 흔들어 그의 임종을 알리는 풍습은 같았다. 종묘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반드시 도읍지에 세워야 했고, 그 위치나 형식등도 따로 규정한 제도에 의거해 정해야 했다. 지금 서울의 종묘는 1395년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주례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하였다. 건립 후 모시는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 규모를 ..

마지막 皇孫, 李錫

마지막 皇孫, 李錫 그의 삶에는 “나라는 망했지만 사람은 살 수밖에 없는 비극”이 드리워져 있다. 그를 탐구하는 것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우리의 비극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의 뿌리, 비극적 뿌리도 이제는 대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히트가요 의 가수 이석(李錫)은 고종황제와 귀인장씨 사이에 태어난 의친왕(1877∼1955)의 아들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마지막 황제 순종이 태어났고, 의친왕보다 스무살 어린 영친왕은 고종과 귀인엄씨 사이에 태어나 일본왕실의 이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해 외아들 이구 씨를 두었으나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이석은 남자로는 마지막 생존해 있는 고종황제 가계의 3세가 된다. 무너진 왕조의 허망한 역사와 비애를 대변해온 대한제국 황제의..

Romantic palace 德壽宮

덕수궁하면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특히 단풍이드는 무렵부터 그 단풍잎이 떨어져쌓인 초겨울까지가 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게다가 시청앞이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점심시간에 들어가 석조전 미술관도 들러보고 등나무아래 벤취에앉아 시집 몇 페이지 읽다 나올 수 있는 로맨틱한 宮이다 그러나 변화하던 근대화속에 치욕스러움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지막 황실을 잃어버린 곳이 바로 덕수궁이다. 광무황제였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당시만 해도 '이곳'의 이름은 경운궁이었다. 그 후, 일본의 강권에 의해서 왕위를 그의 아들 순종에게 '강제적으로' 양위한 후 아들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아버지인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뜻으로 '덕수'라는 궁호를 올리면서 '이곳'은 덕수궁이 되었다. .불리고 있는 이름뿐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