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古宮산책 17

사라진 궁궐 慶熙宮

내마음의 궁궐이 사라진 뒤로는 내마음속엔 언제나 비가 내리고 밤하늘의 별도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여름꽃이 한없이 발끝에 떨어지고 산맥들도 강물 곁에 쓰러져 누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남은 자의 편이 되어 떠나는 것이다, 떠나야 한다... 속살대었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빈 터에 오래오래 남아있고 싶었다 이 세상 많은 이를 남기고 宮이 없어진 뒤론 새 한마리 내게는 예사롭지 않고 구름 한덩이 예사로이 하늘 질러 가지 않고 바람 한 줄기 내게는 그냥 오지 않았다 경희궁의 숭정문을 바라보노라면 한때 역사속에 묻혀 사라졌던 애잔한 슬픔이 가슴밑바닥에서부터 치솟는다 경희궁은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적지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경희궁(慶熙宮)은 서울시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로 애초에 태조..

치욕(恥辱)의 세월 - 昌慶宮

아! 치욕(恥辱)의 세월이었다. 조선의 王이 살던 궁궐에 동물우리가 질펀하게 들어서고 궁궐내 가득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흉흉하며 동물들이 쏟아내는 분뇨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은 동대문광장시장에서 나이론 한복을 맞춰입고 너, 나 할것없이 창경원으로 벚꽃놀이를 갔다 삶은계란과 사이다를 싸가지고 벚꽃나무 아래서 쾌락을 섭취하는 유흥의 지역이되었다 세종이 1419년 아버지인 태종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수강궁의 전신인 창경궁.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특히 단풍드는 가을과 하얀 눈이 쌓이는 겨울이면 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정희왕후, 소혜왕후, 인순왕후를 위해 성종이 명정전, 문정전, 통면정 등을 더 짓고 창경궁이라 이름 불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광해군 때 복구했다. 창경궁의 포인트는 깊고 고요..

세계문화유산 昌德宮의 悲哀

'창덕궁'은 엄연히 '宮'이라는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창덕궁'은 '비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러한 이유에는 날조된 역사의 아픔이 있다. 일제 치하의 민족혼 말살 정책, 1904년 지어진 창덕궁 후원의 관리사무소 '비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창덕궁'이라는 말을 쓰지못하게 하기 위해 관리사무소의 이름인 '비원'을 전면에 내걸며 사람들의 인식이 그만 굳어져 버린것이다. 또한 그와 함께 '창경궁'도 宮의 이름이 아닌 동물원 이름인 '창경원'으로 만들어졌다 어떻게 궁궐에다 동물원을 집어넣을 생각을 했을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제의 만행이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야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창경궁이라고 안다지만, 나이든 세대들에게는 아..

景福宮의 午後 IV

화려했던 오백년도 속절없이 흘러가고 권력을 쥔 세도가들이 들끓으며 세력 다툼으로 날을 보냈던 근정전 뜰에 오늘은 나, 홀로이 서있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희미한 그 사람들지 금은 어디에 묻혀 백골되어 쉬고들 계신가? 아! 세월따라 살아보니 나, 조금도 부럽지않다네 서울 경복궁 경내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으며 국가적 의례와 궁중의 실생활을 보여주는 유물 4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바로 뒷편 야외전시장인 추억의거리에는 평범한 서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추억의 거리가 조성되어있어 보는이를 추억으로 젖어들게 한다. 1960~70년당시의 풍경을 실물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추억의거리는 박물관 동편에 개항기 시대의 전차, 한약방, 선술집, 다방, 이발소,...등을구체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1970년대에서 1..

景福宮의 午後 III

조선왕조 오백년의 이끼가 낀 향원정 연못가에서 되짚어본다 나, 이세상에 내려와 백년도 채못살며 어떤 것, 무엇 하나 소유 할 수는 없는것. 이 궁궐을 거쳐가며 권력을 쥐기를 소원했던 그 많은 사람들도 그 어떤 것, 무엇 하나 소유하지 못하고 결국엔 빈 손으로 돌아들 가고 왕족 마저도 역사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져 갔지. 평생을 걸어도, 전부를 걸어도 텅 빈 가슴 뿐이니 세월따라 살다 보면 나, 어느 끝에 가닿을까?... 王들은 수많은 궁녀들과 산책을 하며 취향교(醉香橋) 향기에 취했겠지만 오늘은 나 혼자서 취향교(醉香橋) 향기에 취하여있다 향원정은 1867년 지어진 건물로사진에 보이는 다리인 취향교(醉香橋)를 통해 건너가게 되어있는데원래는 건청궁과의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북쪽으로 놓여져있던 것을6·25전쟁..

景福宮의 午後 II

시대와 도시는 바뀌었지만조선의 제왕들이 거닐었을 그 뜰에 서면 고개를 맞대인 용마루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들린다 어머니를 잃은 어린세자와 끝내 감싸주지않고 母子의 정을 끊은 帝王. 어느 궁궐뜰에선 뒤주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할아버지의 용포를 붙들고 울부짓는 어린 왕자가 있고 강화도에서 붙들려와 영문도 모르고 왕이 되어 시름시름 앓던 강화도령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인왕산 치마바위에 폎쳐진 내쫓긴 아내의 치마를 애절하게 바라보며 애타게 눈물짓는 王도 계시다 500년의 哀史를 내 어이 다 알리야마는 많은 기억을 안고 바라보는 나의 애수어린 회상은 눈물겹다 구중궁궐 사이로 어두운 하늘이 보인다 오랜 뼈아픈 역사를 지닌 경복궁에서 누가 나처럼 고개들어 용마루 한번 제대로 올려다 보았을까 조선왕조 오백..

景福宮의 午後 I

도시는 인간이 만들어 낸 풍경을 담고 있다. 그 풍경이 메마르다 하지만,우리는 그 안에서 물속의 물고기처럼 안락과 휴식을 취한다. 하루 사이에도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서울 빌딩 숲 도심지의 곳,곳에는 인간이 숨 쉴수 있는 아직도 아름다운 숲 속의 빈터가 남아 있다. 경복궁...조선의 제왕들이 거닐었을 그 뜰에 서서많은 기억을 안고 바라보는 나의 향수어린 회상 어두운 구름을 잔뜩 머금은 하늘과 오랜 뼈아픈 역사를 지닌 경복궁은 썩 잘 어울린다 조선왕조 오백년에 서린 어둠을 나는 어렴풋이 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조선 왕조의 법궁.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완성.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