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치욕(恥辱)의 세월이었다.
조선의 王이 살던 궁궐에 동물우리가 질펀하게 들어서고
궁궐내 가득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흉흉하며 동물들이 쏟아내는 분뇨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은 동대문광장시장에서 나이론 한복을 맞춰입고 너, 나 할것없이 창경원으로 벚꽃놀이를 갔다
삶은계란과 사이다를 싸가지고 벚꽃나무 아래서 쾌락을 섭취하는 유흥의 지역이되었다
세종이 1419년 아버지인 태종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수강궁의 전신인 창경궁.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특히 단풍드는 가을과 하얀 눈이 쌓이는 겨울이면 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정희왕후, 소혜왕후, 인순왕후를 위해 성종이 명정전, 문정전, 통면정 등을 더 짓고 창경궁이라 이름 불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광해군 때 복구했다.
창경궁의 포인트는 깊고 고요한 춘당지와 풍기대 옆에서 내려보는 영춘헌, 집복헌, 양화당, 통명전 풍경이다.
그런데 어찌 이 고요한 궁궐에다 동물원을 집어넣고 놀이동산을 넣을 계획을 했을까?
생각할 수 없는 일제의 만행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야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창경궁이라고 안다지만,
나이든 세대들에게는 아직도 '창덕궁'은 '비원', '창경궁'은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된 인식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 가슴아푼 현실이다.
가는길 : 창경궁은 창덕궁을 거치거나 종묘를 거쳐 갈 수가 있다.
아니면 대학로에서 전철을 내려 명륜동을 거쳐 걷다보면 홍화문이 나온다
창덕궁과 이어진 창경궁을 들어가려면 따로 입장료를 1000원 더 내야하고
종묘로 통하면 그냥 갈 수있다
창경궁이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宗廟)와 통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왕궁 중에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그 중 큰 화재는 인조 때와 순조 때에 일어났다.
인조 때의 화재는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빚어진 것으로
통명전·경춘전·환경전·양화당 등 내전의 대부분이 타 버렸으나 인조 11년(1633) 복구되었다
정조는 1777년 통명전 북쪽 언덕 위에 왕의 생모인 홍씨(洪氏)가 거처할 자경전(慈慶殿)을 건립하고
그 옆에 환취정(環翠亭)을 다시 지었다.
순조 30년(1830)에 큰불이 나서 환경전·함인전·공묵각(恭默閣)·경춘전·숭문당(崇文堂)·영춘헌(迎春軒)·
빈양문(賓陽門) 등이 불탔다. 이들 건물은 순조 34년(1834)에 거의 복구되었다.
이러한 화재 및 건물의 변화와 함께 창경궁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숙종 때 신사년(辛巳年)의 변고와 신임년(辛壬年:신축년과 임인년)의 사화(士禍),
그리고 영조 때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변고이다.
비운의 왕자였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던 곳은 선인문(宣仁門) 안뜰이였다.
선인문(宣仁門) 안뜰에 놓인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동안을 신음하면서28세의 젊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했는데 영조는 세자가 죽은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한다.
이 삼복더위에 뒤주에 넣어 죽이고 시호를 내린들 무엇하리
그밖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이야기도 전해지고 숙종시절때는 그 유명한 장희빈이 인현왕후였던 민씨를 폐위시키고 인현왕후를 저주하기위해 꼭두각시등 동물의시체를 통명전 주변에묻어 두었던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은곳도 이곳 창경궁이었다.
시대가 변하며 장희빈도 많이 재해석되고 있다1960년대 김지미가 나왔던 장희빈은 사랑과 권력을 손에 쥔 절세의 요부로 간악하고 악독하게 그려졌으나 최근 김태희가 나온 '장옥정 사랑에 살다'를 보면 임금인 지아비의 사랑과 자신이 낳은 세자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지고지순한 집착의 여인,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사라져간 비운의 여성으로 매우 인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신분상승을 뛰어넘은 장희빈의 적극적인 성격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던지라 야담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선과악이 뚜렷한 장희빈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믿지를 않았었다
그간 우리는 인현왕후를 善의 이미지로 몰아가기 위해 장희빈을 얼마나 못되게 매도했던가?
뉘엿뉘엿 해가 지는데 나는 장희빈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취선당을 찾았다
그러나 취선당은 전각은 남아있질않고 그 터만 쓸쓸히 남아 있었다
창경궁도 다른궁궐들 처럼 임진왜란때 불에 탔다가 1616 광해 8년에 재건되었다
왕조의 상징이였던 궁궐은 일본의 훼손에 의해 왕궁으로서의 존엄성 마저 잃게 되었는데
1907년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은 대부분 다 헐어내고 그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 했고
그것도 모잘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창경궁이라는 명칭마저 창경원으로 격하 시켰다
그 치욕(恥辱)의 세월...
도저히 용서가 되질않는다.
뿐만 아리라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부르는것도 부족해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해서 맥을 끊어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경복궁도 도로를 개설해서 궁을 크게 훼손시켜 놓았다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궁궐의 모습을 되살린게 1983년이였으니
70년을 넘게 치욕속에 살아야 했던 그 세월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고 오열이 밀려온다
아직까지 많은 전각은 복원못했지만
다행히도 뒤늦게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창경궁에서의 왕실문화를 느낀다.
창경궁(사적 123호)은 성종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예종비 안순황후,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궁이다.
때문에 생활주거공간이 내전이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으며 창덕궁과 아울러 동궐이라는 궁역을 형성하면서
창덕궁의 부족한 주거공간을 보충해 부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옛집을 찾은것같고 금방이라도 나를 길러준 乳母라도 뛰어나와 반길것같은 분위기다
창경궁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거의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대부분 재건 되었다한다인조 때 이괄의 난, 순조때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다시 소실되었으나 명전전,명정문,홍화문만이 화재에서 살아남아 17세기 조선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명전전은 조선 궁궐의 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한다
그 명전전에 햇빛이 드리우며 문살을 어루만진다
明政殿은 국보 226호로 창경궁의 으뜸되는 건물이며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법전 중 가장 오래 되었으며,
다른 궁의 법전이 남향인 것과 달리 동향이다.
인조임금이 즉위한 곳이며 인조가 반정 후 이곳에서 하례를 받았다
영춘헌은 정조가 거처하던 곳으로 1800년 6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집복헌은 1735년 사도세자가 1790년 태어난 곳으로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영빈 이씨, 순조의 어머니는 후궁 수빈 박씨로
후궁들이 머물렀던 곳이었다
창경궁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이곳을 춘당지(春塘池)라고 한다.
큰 연못을 대춘당지, 작은 연못을 소춘당지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지금 두 연못은 전부 춘당지는 아니었으며 아래쪽의 큰 연못은 내농포(內農圃)라고 부르던,
왕이 직접농사를 지으며 농정을 살피던 논이었는데 1909년 일본인들이 이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고
이후 1986년에 한국식 연못으로 재조성하였다.
큰 연못 북쪽에 인접한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춘당지라 부르던 원래의 연못이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일제는 1909년 궁내 전각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권농장(勸農場)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春塘池)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왜식(倭式)으로 변모시켰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培養堂)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남아 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삼았다.
통명전에는 회화류를, 양화전에는 고분벽화의 모사류(模寫類)를, 경춘전에는 도자기와 칠기류를,
명정전에는 석각품(石刻品)을, 그 행각에는 행렬의장기구와 토기품을 진열하고 영춘헌은 관리사무소로 만들었다.
일제는 1911년 자경전 터에 2층의 박물관을 건립하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맥을 절단하고 도로를 설치하여 창경궁의 궁원을 파괴하였다.
1915년에는 문정전(文政殿)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하였으며,
1922년에는 왕궁의 원내에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 밭을 만들고
1924년부터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1960년대 초,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은 코끼리와 호랑이등 동물우리가 질펀하였고
궁궐내 가득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흉흉하며 동물들이 쏟아내는 분뇨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은 동대문광장시장에서 나이론 한복을 맞춰입고 너, 나 할것없이 창경원 벚꽃놀이를 갔다
삶은계란과 사이다를 싸가지고 벚꽃나무 아래서 쾌락을 섭취하는 유흥의 지역이되었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 되어 남녀학생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나도 이무렵 어린조카들과 줄을서서 표를 끊어 비행기며 회전목마를 탔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을 회상하는데, 이는 그 시절의 즐거움을 못 잊어서가 아니라
내 사라져간 유년의 미련이 아쉬워서이다
창경궁이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한 것은 1983년 동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이관시키면서부터다.
1983년 12월에는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불리던 명칭을 '창경궁'으로 회복시켰고,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 및 왜식 건물을 철거하고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없어졌던 문정전, 명정전과 명정문 사이 좌우의 회랑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그리고 벚꽃나무 등 왜식으로 변형된 궁원의 수종(樹種)을 소나무ㆍ느티나무ㆍ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하여 한국 전통 원림을 조성하였다.
명정전은 성종 15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건물로,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명정전의 남쪽으로는 왕의 집무처인 문정전이 남향하여 명정전과 직교하며 서있다.
그 뒤쪽에는 숭문당(崇文堂)이 있는데 이 건물은 왕이 태학생(太學生)들을 접견하여 주연을 베풀었던 곳이다.
숭문당 밖으로는 내전의 전각들이 전개된다.
숭문당의 서북쪽으로 함인정(涵仁亭)이 있고, 그 좌우로는 담이 둘러져 있다.
이 담 뒤편으로 환경전·경춘전 등의 침전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내전의 정전인 통명전이 있다.
통명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큰 규모의 건물이며, 정면에 넓은 석조 월대가 있다.
광해군 8년에 재건되었다가 순조 34년 복원된 이 건물은 창덕궁 대조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다.
환경전·경춘전의 규모도 통명전과 같으며, 모두 익공식으로 조선 후기 침전의 건축양식을 잘 남기고 있다.
정자인 함인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평면을 가진 건물로 이익공의 간결한 구조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각 건물들 주변에는 사방에 월랑(月廊)·행각 등이 가로놓이고 사이사이에 통용문이 나 있어서
건물과 건물들은 제각기 독립된 공간을 구성하였다.
통명전의 서쪽에는 연못이 조성되고,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통명전 북쪽 언덕 위에는 환취정이 있다.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의 남쪽 경계에는 왕세자인 동궁(東宮)의 처소가 마련되어 이곳에도 많은 전각들이 자리잡고 있다.
인조 때에는 이곳에 저승전(儲承殿)·경극당(敬極堂)·낙선당(樂善堂)·숭경당(崇敬堂)·시민당(時敏堂) 등의 건물이 있었다.
그 뒤 몇 차례의 화재와 재건을 거쳐 고종 때에는 낙선재(樂善齋) 등의 건물이 일곽을 이루었다.
이 궁은 장조(莊祖)·정조·순조·헌종 등의 많은 왕이 태어난 곳이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출입문을 명정문(明政門)이라 하고, 궁의 정문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翼閣)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을 건너는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다리를 지나면 명정문 (明政門)이 있다.
홍화문은 성종 15년(1484)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문은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문루로 다포계 공포를 갖춘 우진각지붕을 하였다.
명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전인 명정전이 있고 그 앞에는 자연석을 깐 넓은 마당이 있으며,
가운데 좌우로 품계석(品階石)이 놓여 있다. 이 부분은 사방이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제 해가진다
홍화문(弘化門)이 문을 닫을 시간이다
- Chris Yoon
'- 그의 古宮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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