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古宮산책

Romantic palace 德壽宮

Chris Yoon 2021. 11. 12. 07:02

 

덕수궁하면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특히 단풍이드는 무렵부터 그 단풍잎이 떨어져쌓인 초겨울까지가 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게다가 시청앞이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점심시간에 들어가
석조전 미술관도 들러보고 등나무아래 벤취에앉아 시집 몇 페이지 읽다 나올 수 있는 로맨틱한 宮이다
그러나 변화하던 근대화속에 치욕스러움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지막 황실을 잃어버린 곳이
바로 덕수궁이다.

광무황제였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당시만 해도 '이곳'의 이름은 경운궁이었다.
그 후, 일본의 강권에 의해서 왕위를 그의 아들 순종에게 '강제적으로' 양위한 후
아들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아버지인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뜻으로 '덕수'라는 궁호를 올리면서 '이곳'은 덕수궁이 되었다.

.불리고 있는 이름뿐만 아니라 현재 내부에 남아있는 모든 전각들이 '고종'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만큼
덕수궁은 비운의 군주 '고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니 어쩌면 덕수궁은 고종 그 자체요, 고종이 덕수궁의 또다른 모습이다.

 

 

고종황제

한때는 '무능한 군주', '나약하고 겁많고 우유부단한 통치자'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던 고종.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그의 업적이나 개혁적인 성향에 관한 것들이 새롭게 재조명되면서
'명군 고종'이라는 견해들이 속속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고종에 관한 상반된 두가지 견해,

즉, 명군설과 암군설에 관한 시각차가 너무도 커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호불호의 중간점이 없는, 여전히 '불행한 군주'로 전해지고 있다.


내가 서울정동에 있는 서울예고를 다닐때 대한문은 현재의 자리가 아닌, 지금은 車道 한복판에 있었다
그런데 길이 넓혀지면서 대한문을 덕수궁 안쪽으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하루에도 조금씩 조금씩 옮겨지는 대한문.
그래서 대한문은 현위치까지 옮겨진 것이다
그때는 저토록 건장한 수문장도 없었고 철통같은 수비도 없었다
지금의 대한문엘 가보면 아주 건장한 남성들이 수문장 복장을 하고 서있는것을 볼것이다

 

 

그 건장한 수문장옆으로 노란머리의 외국인들이 몰려들어 기념촬영을 해간다.
서양의 미녀들은 저토록 장대하고 마초적인 동양남성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연신 까르륵거리며 푸른 눈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원더플을 외치며 수문장 옆으로 바싹 붙어선다
그러면 한복을 입은 청년이 카메라를 받아들고 순번대로 셧터를 눌러준다
그런데...
수문장 표정이 너무 굳어있다
굳어있을 뿐 아니라 모자를 눌러 내리써서 얼굴이 아예 보이질않는다
좀 더 얼굴을 내놓고 함께 미소지으며 포즈를 취해 줄 수는 없을까?
아쉽다.

 

 

덕수궁에 들어서면 우리는 중화전 앞에 서게될 것이고 중화전 앞에 서면 우리는 '방해와 간섭'을 일삼던 세력과 그사람들 속에서 일생을 살아온 고종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될것이다.
12세에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왕으로 '전교'한 조대비의 수렴청정을 시작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대리정치,
또 아내인 명성황후와 민씨일가에 의한 세도정치, 그리고 비로소 군주로서 홀로서기를 결행한 후에도 줄기차게 이어지던 열강들의 내정간섭까지.
황제였지만 평생을 아슬아슬한 눈치속에서 견디고 살아야만 했던 고종의 가슴 아픈 모습이 중화전앞에 서니 더욱 선명해진다.

 

 

고종이 집무를 했던 중화전 御座

"왕비를 폐위시키시오"
"그렇게는 못하겠오"
그 후, 대답뒤에 돌아온 국모이자 자신의 아내였던 명성황후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참함.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안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타국공사관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굴욕감.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협박에 의해 왕권을 내놓아야만 했던 좌절감.
그 모든 고종의 쓰린 감정들과 안타까움으로 전해져 빈 어좌(御座)를 바라본다.

 

 

양화전 천정의 두 마리 龍의 양각

국왕자신이 자기나라의 역사에 관해 어느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었으며,
집무에 대해서는 매우 부지런하고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냈고
정치적인 사고에서는 진보적이었고

서양의 문물에 관해 호의적이었으며, 교육정책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아
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물질적인 발전을 이루어냈고

성품은 상냥하고 친절하고 온화했던 군주.
진실로 나라를 위하고 발전을 생각했던 군주.

그가 고종이었다.

 

 

그러나 성실하고 유능한 군주이기는 했지만 그는 강인하지는 못한 남성이었다.
고종의 편전이자 침전으로 사용되었고, 그의 승하를 직접 목격한 '함녕전'의 앞에서

'너무 부드러워 탈' 이었던 조선의 불운한 군주를 또다시 한번 확인한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던 내전에서 가장 주요한 전각이다.
그러나 덕수궁의 내전영역은 다른 궁궐이면 마땅히 있어야 할
왕비의 침전은 없다.
그 이유는 명성황후를 비명으로 잃은 후, 고종이 다른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이 대목에서도 고종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꽤 많은' 후궁을 볼 수 도 있었을텐데.

 

 

만일 고종황제가...
명성황후에 대한 정을,
국가에 대한 애착을,
아주 강하게 일본에 대하여 표출하였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재임기간에는 '통치자'라는 신분때문에

만일을 대비해 비록 조심하였다 하더라도,
군주의 자리를 억지로 빼앗긴 후에는 억울함이나 울분이 폭발하지도 않았을까?

국민들에게 국가를 되찾으라는 명을 내린 후 '국권회복운동'이나 '자결'등의 방법으로

적극적인 항거를 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저 서양식 건물 석조전을 어린시절에는 아무 의미없이 멋있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도리아式의 로코코 건축양식.
저 석조전이 치욕스런 장소였다는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덕수궁 석조전(동관)은 고종황제의 처소와 사무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1899년 영국인 하딩(J·R Harding)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900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석조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왕가 미술관’으로 변형되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내부가 크게 훼손되어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조선 왕족들과 총독부 관리들이 기념촬영을 한 모습.

앞줄 중앙에 모자를 벗은 고종과 그의 왼쪽에 순종이 보인다.

 

 

이젠 쓰라린 기억은 잊어야한다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약 13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훼손된 대한제국 황궁의 모습을
건립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고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회복하기 위한 사업으로
‘대한제국 역사관’(가칭) 복원공사를 진행해왔으며,
2013년 말 개관을 목표로 현재 내부 장식물과 가구 등을 제작하고 있다한다.

 

 

덕수궁에서 왕이 집무를 보던 편전인 석어당은 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덕수궁이 궁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중심 건물이다.
이 곳은 임진왜란때 선조가 임시로 거쳐하던 곳이자,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곳,
또한 광해군이 폐위되고 나서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석어당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다.
그래서인지 건물자체에는 화려함을 느낄 수는 없고 소박한 기풍이 있는 건물이자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기도 하다.

 

 

빼놓을 수 없는 덕수궁 돌담길.
이곳에는 학교가 몰려있었다
내가 다니던 서울예고를 비롯해 이화여고, 경기여고, 배재등이 있어 덕수궁 돌담아래는 아침마다 학생들로 가득찼고
학교가 파하면 삼삼오오 짝을지어 걷던 심심치않게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모두 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변했고 옛법원 자리도 시립미술관으로 변했다
그리고 광화문연가를 작곡한 이영훈의 기념비가 쓸쓸히 있을뿐이다
변하지않은게 있다면 성프란치스코 성서회가 그대로있고 이끼낀 돌담이 그대로이다

사진은 작년 연말에 갔을때와 이번에 갔을때를 같은장소에서 비교하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