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古宮산책

덕수궁 돌담길의 회고

Chris Yoon 2022. 2. 7. 07:15

2022년 신년을 맞아 나의 학창시절에 고등학교가 있던 덕수궁 돌담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1960년대에는 광화문에서 서소문일대, 덕수궁 근처에 많은 고등학교가 있었다.

서울고, 경기여고, 배제고, 서울예고, 이화여고가 있었다

그중 나는 서울예고를 다녔고 현재 서울예고는 세검정으로 이전을 했고 내가 다니던 서울예고는 서울예원이라는 이름으로 예원중학이 사용을하고 고풍스러운 이화여고도 아직 자리를 지키고있다.

내가 다닐때의 1960년대의 광화문일대는 아침이면 등교하는 고등학생들로 번잡했다.

당시에 지하철은 없었고 시내버스나 열명가량이 타는 작은 합승버스, 돈이 있는 부유층의 자제들은 두세명이 어울려 택시로 합승을 하기도 했다.

시청앞 광장의 좌측은 명동으로 빠져나가는 길로 조선호텔, 미도파백화점이 있었고 우측의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의 좌측에는 제일 높은 빌딩인 KAL빌딩이었고 KAL빌딩을 돌아 육교를 건너면 T.B.C.방송국이 있었고 정동길목을 따라가다가 서울예고와 이화여고 정문을 지나서 서소문쪽으로 빠지면 문화방송국이 있었다. 그래서 창밖을 보면 정동길목엔 M.B.C.와 T.B.C.방송국을 오가던 잘생기고 옷을 멋있게 입었던 남자탤런트 김용건이나 예쁘게 재잘거리며 깔깔대던 김자옥이 지나다니곤 했다.

 

나는 시청앞 K.A.L. 빌딩앞에서 버스를 내려 지각을 하지않으려 빠른 걸음으로 정동길목을 걸었다.

그러다보면 같은 학교 급우들과 함께 만나 걷기도했는데 때로는 선배 금난새형이 함께 옆에서 걸으며 파리한 내 얼굴을 보고 배가 고픈줄알고 '너, 빵 사줄까?'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던때도 있었다. 

 

 

당시 덕수궁의 대한문은 덕수궁 돌담과 떨어져서 시청앞 광장 한가운데에서 남대문과 서울역으로 빠져나가는 길 한복판에 있었다.

서울의 차는 많아지고 교통혼잡으로 시청앞 도로가 확장되면서 어느날부터인가 대한문을 덕수궁 돌담쪽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침마다 등교길에 보면 대한문은 조금씩 조금씩 시청앞광장 도로에서 덕수궁 돌담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시청앞 광장에는 대형분수가 있었는데 대한문이 덕수궁 돌담옆으로 옮겨지면서 시청앞의 분수도 사라졌다.

 

 

이쯤해서 나는 덕수궁의 역사에 관해서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덕수궁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격동기의 시초이자 근세조선(近世朝鮮) 이씨왕조가 500년간 군림하다가 패망, 문을 닫은 고궁이다.

 

덕수궁의 역사

사적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말 고종이 살던 곳이다.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1615년(광해군 7)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이 되었으며 1618년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으로 불렸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했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건물의 건립이 이뤄졌다. 그 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 침전인 함령전, 보문각 등이 지어졌으며 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고 소공동의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정궁이 되었다.

1900년(광무 4)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정문인 인화문 및 돈례문·회극문·영성문 등의 전문이 완성되었다. 그해에 선원전이 불탔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과 관명전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으며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석어당·함령전 등이 중건되었다. 이때 정문의 이름을 대안문이라 했다.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곳에 살면서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이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종의 거처가 되었다. 1910년 근대건물인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전이 건립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함령전에서 죽었다. 1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 골목은 덕수궁이 작아서인지 더 운치가 있다.

그중 낙옆지는 가을부터 눈이 내리는 겨울까지 특히 그 진가가 발휘된다.

나는 서울예고를 다니며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는 일반수업을, 오후 6시부터는 자연스럽게 실기실로 가서 밤늦게까지 실기를 남아서 했다. 그러다가 교문을 나서면 보통 10시이후였다.

그 시간의 정동길목은 밤이 내리며 가로등이 켜지고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이 많았다.

파란 가스불아래 군밤을 굽는 리어카 상인들이 있었고 연인들은 군밤을 사거나 연탄불에 굽는 오징어를 함께 들여다보며 서있는데 가스불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로맨틱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이다음에 성인이되면 나도 저렇게 밤늦은 덕수궁골목에서 군밤이나 구운 오징어를 사먹으며 아름다운 연애를 해봐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성인이되어 덕수궁 골목에서 만나자고 약속을하고 돌담길을 걸었던 연애들은 모두 밤늦은 덕수궁 골목을 나오면서 끝나버린 이별을 초래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서 경기여고를 지나 나오면 바로 광화문 사거리였다.

당시 광화문사거리는 지금처럼 방대하고 크지가 않았다.

가끔씩 외교사절로 다른 나라의 대통령들이 올때 우리는 김포공항에서 들어오는 대통령의 카퍼레이드를 아현동쪽에서 부터 시청앞, 광화문일대에 태극기를 흔들며 양쪽 도로를 가득메워 환영을 하러나갔다.

당시의 고등학교 학생들의 의무적 수업의 형태였다.

물론 좋은 학교는 시청앞이나 광화문일대에 자리를 잡게하고 조금 질이 떨어지던 학교는 서소문쪽으로 밀렸다.

 

광화문과 덕수궁사이엔 극장이 두개 있었다. 하나는 아카데미 극장이었고 또 하나는 동시상영을 하던 5층 건물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카트린느 드뇌부가 열아홉살때 출연한 '쇌부르의 우산'이라던가, 진 세벅의 '슬픔이여 안녕' '애정의 순간'등 주로 명화들을 많이 보았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에릭 시걸 원작인 '러브스토리'를 보았다.

광화문과 경복궁 사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엔 당시 시민회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온 패티김이 처음으로 길옥윤과 박춘석이라는 양대산맥의 손을잡고 세련된 대형 쇼를 열었고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화재가 된 윤복희도 이봉조와 손을잡고 쇼를 가졌다.

우리는 그 쇼를 보기위해 성인처럼 사복을 입고 긴 줄을 서서 입장권을 구입했고 T.V 쇼가 아닌 진짜 쇼를 구경했다.

젊은날의 패티김과 윤복희는 무척이나 세련되고 멋이있었다.

 

그 후, 대법원은 서초동으로 옮겨지며 그 자리엔 현대미술관이 들어섰고 T.B.C.와 M.B.C.방송국도 좀 더 넓은 규모를 찾아 이전을 했고 경기여고와 서울예고, 배제고도 강남으로 이전을 했고 지금은 이화여고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도 남아있는 추억의 장소가 있다.

정동길목을 걷다보면 좌측에 있는 정동교회다.

나는 그곳을 3년간 드나들며 전교생이 보는 예배를 일주일마다 보고 예배가 끝나고나면 일주일간 연습한 음악과 급우들의 악기연주, 성악, 이중창 등 즉 무대에 서기전의 리허설같은 시간을 보는것을 좋아했다.

지금은 그 앞에 '광화문연가'를 작곡한 이영훈의 추모비가 너무 쓸쓸하게 있을 뿐이다.

 

Where have the flowers gone?

덕수궁 골목을 아침마다 교복을 입고 뛰어들어가 공부를 했던 그때의 어린 청춘들...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 Chris Yoon

 

 

1960년대 덕수궁 돌담길을 다녔던 서울예고 시절과 현재의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