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古宮산책

조선왕조 계보

Chris Yoon 2022. 2. 8. 03:53

조선왕조 계보

 

조선왕조 계보

조선왕조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집권했던 왕조이며 창건자인 1대 태조를 시작으로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총 27명의 왕이 승계했습니다. 조선왕조 계보의 국성은 전주 이씨이며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군주의 직함도 황제로 바뀌었고 1910년까지 통치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조선왕조 계보를 순서대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 태조 (1392-1398) : 이성계, 고려말 무신이었는데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케 함. 1392년 조선왕조를 세우고 조선의 제1대 왕이 됨.

조선의 역사는 고려의 무장 이성계(李成桂)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의 왕족과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웠다.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에 화령부(和寧府, 함경도 영흥)에서 이자춘(李子春)과 최한기(崔閑奇)의 딸인 영흥 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결(中潔), 호는 송헌(松軒)이고, 본관은 전주로 시조인 이한(李翰)의 21대손이다.

 

 
 

2대 정종 (1398-1400) : 1대 태조의 둘째 아들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로 책립되었으며 즉위 당시 나이가 만 41세였음. 형제들 중 이성계의 무인적 기질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후에도 정통성 시비로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했음.

 

 

 

3대 태종 (1400-1418) : 1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4대인 세종대왕의 아버지로 휘는 (이)방원. 태조 6년에 무인정사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정종을 옹립 후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 정종이 후사가 없어 3대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사병을 없애고 관직 제도를 개혁함.

 

 

 

4대 세종 (1418-1450) : 3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조선 시대에 태어나서 왕족으로 왕위에 오른 첫 임금이 됨. 32년이라는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겨 조선의 황금시대를 연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주요 치적으로는 훈민정음 창제, 한반도 이북 지역의 국경 정립,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음악 등 전 분야를 발전시켰다는 점. 능력면에서나 인성면에서 전무후무한 국왕으로서 높이 평가받음.

 

 

 

5대 문종 (1450-1452) : 4대 세종의 맏아들로 유교적 이상을 바탕으로 한 정치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짐.

조선의 5대 왕 문종은 1414년(태종 14) 세종과 소헌왕후의 첫째 아들로 한양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이다. 부왕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3년이 지난 1421년(세종 3)에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문종은 성품이 인자하고 명철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음악과 여색은 즐기지 않았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6대 단종 (1452-1455) : 단종은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세종은 이때 "원손(元孫) 이홍위는 천자(天資)가 숙성하고 품성(稟性)이 영특하고 밝은데, 지금 나이가 스승에게 나갈 만큼 되었으므로 너를 명해 왕세손을 삼는다."라고 했다.

1450년(문종 즉위)에는 문종의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 불과 12세였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靖亂)으로 유명무실한 왕이 되었다. 5대 문종의 아들로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해 정치적 야심에 희생된 비운의 소년 국왕으로 알려짐.

 

 

 

 

7대 세조 (1455-1468) : 4대 세종의 둘째 아들(수양대군).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군주가 되었으며 13년 동안 재위하다 병으로 상왕으로 물러난 지 하루 만에 승하함.

세조는 1417년(태종 17)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8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다. 문종이 형이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동생이며, 단종은 조카다. 1428년(세종 10)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고쳐서 함평대군(咸平大君)으로, 다시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해졌다. 세종 말년인 1445년(세종 27)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쳤다.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

 

 

8대 예종(1468-1469) : 7대 세조의 둘째 아들로 친형 의경세자가 사망한 후 왕세자로 즉위하였으며 세조 말년에 대리청정을 수행하다가 세조 사망 후 즉위했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승하함.

예종은 1450년(세종 32)에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황(晄), 자는 명조(明照)이며 세조가 즉위하자 해명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형인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가 세자로 책봉된 지 2년 만인 1457년(세조 3)에 죽어서 둘째 아들인 그가 세자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랐다.

 

 

 

9대 성종 (1469-1494) : 7대 세조의 손자이자 연산군과 중종의 아버지. 별다른 외침 없이 태평성대가 지속되던 시기 왕이 되었으며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을 비롯하여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

성종은 1457년(세조 3) 세조의 큰아들 덕종(의경세자)과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혈(娎)이며,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 세자였던 아버지 덕종은 그가 태어나던 해 20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어졌으나 1469년(예종 1) 11월 28일 예종이 급서하면서 예종의 다섯 살 난 원자 제안대군과 자신의 형 월산군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10대 연산군 (1494-1506) : 1476년(성종 7)에 성종과 윤기무(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9대 성종의 맏아들이자 폐비 윤씨의 아들이며 조선 최초 반정으로 폐위됨. 폐위된 후에도 광해군과 함께 복위되지 못한 왕으로 조선 역사상 조/종으로 끝나는 묘호를 받지 못한 군주 4명 중 한 명.

폭군으로 유명하며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음.

성종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융(小隆)이고, 1483년(성종 14)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11대 중종 (1506-1544) : 제9대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함. 중종은 1488년(성종 19)에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이다.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실록에는 그의 성품에 대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청단(聽斷)을 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열상으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신하들이 일으킨 반정으로 1506년(연산군 12)에 왕위에 올랐다. 본인 스스로는 전혀 반정의 뜻이 없었음으로 준비되지않은 왕이었다.

 

 

 

 

12대 인종(1544-1545) : 11대 중종의 맏아들. 성품이 온화하고 효심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재위 8개월만에 사망하여 조선 왕조 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임.

1122년 4월, 등에 난 종양으로 병석에 누운 예종이 한 달 만에 갑작스레 사망하자 14세의 어린 왕태자 해(楷)가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고려 제17대 왕 인종(仁宗)이며 예종의 맏아들이자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예종 4년(1109)에 태어났다.

인종은 부왕 예종이 죽자 매일같이 통곡하여 효자왕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여서 신하들과의 관계도 원만했으나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하여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비롯한 여러 환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13대 명종 (1545-1567) : 11대 중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문정왕후 윤씨. 12세에 즉위하여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치고 외척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는 혼란을 겪으면서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 사화, 을묘왜변 등을 거치게 됨.

조선 제 13대 왕이자 중종의 둘째 아들이며 인종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환, 자는 대양. 윤임 일파의 대윤과 윤원형 일파의 소윤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가 치열한 가운데,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1553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하게 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켰다. 

 

 

 

14대 선조 (1623-1649) : 11대 중종의 손자로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고 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이 활발해지도록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겪음.

조선 제 14대 왕이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초명은 균, 개명은 연.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즉위하여 사림을 널리 등용하고 유학 경서와 저술을 간행하였으나 재위 중 동서, 남북 등 붕당이 갈라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가가 크게 흔들렸다. 백성들이 전쟁에서 활약하고, 또 전쟁으로 많은 서류들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갖추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면서 신분제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보여준 왕답지 못한 행적 때문에 현대에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15대 광해군 (1649-1659) : 14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 최초로 후궁 태생의 서자이면서 왕세자에 책봉된 인물. 격동기인 조선 중기에 실리외교를 택하고 대동법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함. 그러나 당쟁으로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으며 난국에 처한 상황에서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대처했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23) 부부의 무덤은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낮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왕릉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고 비석에는 총탄 자국도 군데군데 있어서 보는 이들을 서글프게 한다. 그 언저리에 있는 단종의 왕비 송씨의 화려한 사릉과 너무나 대조가 된다. 

 

 

 

 

16대 인조 (1623-1649) : 14대 선조의 손자. 조선의 네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더불어 왕의 신분으로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린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왕이다.

조선 제 16대 왕이자 선조의 손자로 이름은 종, 자는 화백, 호는 송장. 서인들이 광해군을 왕위에서 내쫓고 옹립했으므로 서인들이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했으며 반정공신들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왕권을 강하게 내세우지 못했다. 인조는 중화사상을 중시하는 서인들의 영향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다.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켰고, 이후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 병자호란을 일으키자 인조는 청에게 항복하고 신하의 관계를 맺었다. 

 

 

 

17대 효종 (1649-1659) : 16대 인조의 둘째 아들. 효종은 1619년(광해군 11)에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으로, 인조반정 후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지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와 군사력을 성공적으로 복구한 것으로 평가 받음. 북벌을 국시로 내세웠으나, 실제 북벌의 의지가 컸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은 것으로 알려짐.

 

 

 

18대 현종(1659-1674) : 17대 효종의 아들로 불륜으로 태어난 왕이다.

강조의 정변으로 대량원군 순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고려 제8대 왕 현종이다. 현종은 992년 태조의 아들인 안종 욱(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과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종이 죽자 과부가 된 헌정왕후가 숙부인 안종 욱과 불륜을 저질러 낳은 아들이 바로 현종이었다.

헌정왕후가 산고로 죽는 바람에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다시피 한 현종은 성종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다. 비록 정상적인 혼인관계에서 출생하지는 못했지만 부모가 모두 왕족이고 헌정왕후는 성종의 여동생이었으므로 성종은 조카인 현종을 아들처럼 기른 것이다.

남인과 서인의 당쟁을 일컫는 예송논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져 무능하고 심약한 이미지가 있으나 군사력 증강과 서양문물, 과학 기술 등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짐.

 

 

 

19대 숙종 (1674-1720) : 18대 현종의 아들로 장남의 수난을 겪지 않은 유일무이한 군주.

숙종은 1661년(현종 2) 8월 15일에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 효종은 명성왕후의 침실에서 용이 이불을 덮고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에 효종은 원손을 얻을 좋은 징조로 여겼는데, 효종이 죽고 2년 후에 숙종이 태어났다. 이름은 순(焞), 자는 명보(明普)이다.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 농업 생산력 발달, 화폐 경제 정착 등 업적이 많으나 인현왕후와 희빈장씨 사이에서의 로맨스로 유명하고 당쟁과 궁중 암투가 극에 달한 시절을 지니며 총 45년 10개월에 달하는 조선 왕조 사상 두 번째로 긴 재위 기간에 오름.

숙종의 환국정치는 그의 애증 관계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희빈 장씨 사사 이후에 펼쳐진 노소당쟁은 숙종이 그의 아들들에게 가졌던 태도도 무관하지 않다.

 

 

 

20대 경종 (1720-1724) : 19대 숙종과 희빈장씨의 아들로 조선 제 20대 왕으로 이름은 윤, 자는 휘서. 1689년 원자로 정해진 뒤 노론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이듬해 소론의 지지를 받아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부왕 숙종은 이이명을 몰래 불러 후사는 연잉군으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 즉위 다음해인 1721년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허락했는데 이에 크게 반발한 소론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시 친정을 했다. 1722년에는 노론 일파가 왕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고변이 있자, 노론을 모두 숙청했고 두 해에 걸친 신임사화로 소론이 전권을 장악했다. 

아버지와 달리 4년밖에 재위에 오르지 못하고 37살의 나이로 사망함. 신임사화 등 노론과 소론 당쟁의 절정기에 재위함.

 

 

 

21대 영조 (1724-1776) : 19대 숙종과 숙빈최씨의 아들로 숙종에게는 둘째 아들이고, 경종에게는 이복동생이다. 6세에 연잉군으로 봉해지고, 경종 즉위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이다.

조선 왕 사상 가장 장수하며 붕당 대립 완화, 왕권을 강화하고 당쟁을 제거하기 위해 탕평책 실시,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이고 신문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사도세자의 비극 등 불운한 가정사를 겪음.

 

 

 

22대 정조 (1776-1800) : 21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와 더불어 조선 최고의 부흥기를 이끈 것으로 평가 받음. 탕평책을 계승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해 규장각 설치, 새 활자인 임진자, 정유자 등을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킴으로써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것으로 알려짐. 의빈성씨와의 로맨스로 유명하며 만 23세에 왕위에 오른 후 49세에 사망하였는데 조선왕들이 고질적으로 겪던 유전병인 종기로 고생하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승하한 것으로 알려짐.

자신을 지키기위해 문(文)과 무(武)를 겸한 임금으로 수원성에 가면 그의 영정을 볼 수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선왕조의 왕이다.

 

 

 

23대 순조 (1800-1834) : 22대 정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공, 자는 공보, 호는 순재. 

정조의 건강 악화로 갑작스럽게 1800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1804년부터 순조가 직접 국정을 관장했다. 친정 이후에도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 일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거친 것을 시작으로 1811년 홍경래의 난을 겪으면서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김조순 등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힘들어짐.

그런 가운데 백성의 생활은 '삼정의 문란'에 따라 도탄에 빠졌고,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24대 헌종 (1834-1849) : 헌종은 1827년(순조 27) 7월 18일에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가 일찍 죽고 할아버지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8세에 즉위하게 됨. 순조의 뒤를 이어 1834년(순조 34)에 즉위했다. 이때 헌종의 나이 불과 8세였다.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이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탓에 헌종은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이어 1837년(현종 3)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를 왕비로 맞이했다.

헌종은 매우 잘생긴 외모를 가졌으며 궐의 아름다운 궁녀들과 모두 관계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사는 없었다.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가 1843년(헌종 9)에 죽자 이듬해 홍재룡(洪在龍)의 딸 효정왕후(孝定王后)를 계비로 맞이했다. 이 밖에 두 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이들 모두 후사를 잇지 못했다.

안동 김씨와 풍양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려 힘겹게 왕권을 유지하다 자신도 23세의 이른 나이에 승하함.

 

 

25대 철종 (1849-1863) : 철종은 1831년(순조 31)에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다. 전계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서자다. 전계군의 일가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와 사면을 반복했다. 전계군의 이복형인 상계군(常溪君)은 정조 때 홍국영의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유배된 후 죽었고, 아버지 은언군은 신유박해(순조 1) 당시에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상계군의 부인)와 함께 사사되었다. 전계군 본인도 큰아들 회평군(懷平君)이 역모에 연루되어 옥사하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전계군은 세 명의 부인으로부터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으며,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 철종이다.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강화도령이라고 불린다.

 

 
 

 

26대 고종 (1863-1907) : 고종은 1852년(철종 3)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이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대비(신정왕후 조씨, 익종의 비)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이름은 희(熙),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초자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이다.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로 12세의 나이에 즉위한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정조의 직계후손이 끊어지고 철종마저 후손이 없이 사망하여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익종의 양자가 된 후 왕으로 즉위함. 11세의 나이에 왕이 되어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받았으며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 혼란한 시기를 겪다 일제강점기를 맞고 1919년 승하함.

 

 

 

27대 순종 (1907-1910) :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에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두었으나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 순종은 2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34세가 되던 1907년 7월 20일,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이다. 독살미수사건으로 아편을 넣은 커피를 마셔 틀니를 끼고 살아야 했으며 고종의 헤이그 밀사가 일본에 발각된 후 강제 즉위하게 됨.

고종은 세계의 여러 나라에 일본의 조선에 대한 주권 침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할 것을 종용했다.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고종도 황태자도 참석하지 않은 양위식을 자기들 멋대로 거행했다. 어쨌든 이렇게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순종은 이름만 황제일 뿐 아무런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해 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순종은 9세 때인 1882년(고종 19)에 민태호(閔台鎬)의 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와 혼인했다. 그러나 순명효황후는 1904년에 34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다. 이후 순종은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순정효황후(純貞효皇后)로 맞이했으나 역시 후사를 보지 못했다.

 

 

 

조선왕조 계보

 

지금까지 조선왕조 계보를 정리해 봤습니다. 약 500여년에 걸친 조선왕조 계보를 간략하게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는 하나 어린 시절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하면서 외웠던 것처럼 우리의 역사를 좀 더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기록에 실수가 있을 경우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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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명의 왕을 모두 포함한 조선왕조 계보는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의 순서이니 필요하신 분들은 외우시는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담이지만 27명의 왕 중 어진으로 제대로 얼굴을 알 수 있는 왕은 총 5명이라고 하는데요,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이라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지였던 부산에서 당시 전해지던 40여 점의 어진이 불에 타 훼손되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조선왕조 계보뿐만이 아니라 남은 우리의 역사가 쉽게 잊혀지지않고 오래도록 후손들에게까지 고이 남겨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