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古宮산책

'휴버트 보스(Hubert Vos)- 그는 최초로 한국인의 초상화를 그린 푸른눈의 서양인이었다

Chris Yoon 2021. 11. 12. 07:13

휴버트 보스(Hubert Vos)그는 최초로 한국인의 초상화를 그린 푸른눈의 서양인이었다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있었다. 당시 화재로 고종황제의 어진(御眞)은 소실되었지만,
파란눈의 화가'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가 초상화를 제작할때 왕실의 윤허를 받아
화가 소장용으로 한 점 더 제작하였던 '고종황제 어진(御眞)'은 다행히 오늘날 남아있게 되었다.
보스(Vos)는 당시, 1911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종 황제가 자신이 그린 민 상호의 초상화를 본 후에
고종의 어진(御眞)과 당시 황세자이던 순종의 초상화를 그리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왕의 어진(御眞)은 의자에 앉은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휴버트 보스(Hubert Vos)'는 서 있는 모습의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인 어진(御眞)의 배경에 묘사되고 있는 '일월오악도'의 묘사 대신에,
배경을 과감한 서양화 기법에 의한 여백으로 처리하였다.
고종 황제의 상반신 부분적 묘사에는 '보스(Vos)'의 숙련된 초상화가로서의 기량이 잘 표현되고 있다

또한 '보스(Vos)'는 편지에서 "황제와 그 백성들의 미래에 대해 슬픈 예감을 갖고 떠났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 공관에 머물며 당시 대한제국의 정세에 대해 소상히 알고있었던 '보스(Vos)'는 그래서
고종 황제의 표정을 조금은 우울하게 묘사하였다.
'보스(Vos)'는 이어, 그의 편지에서, "황제는 자신이 제작한 서양화 어진(御眞)에 만족하였고,

황제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미술사가 이구열은 이에 대해 당시 고종 황제가 '보스(Vos)'에게 하사한 선물은 만원이었으며
이는 당시 기와집 몇 채 값이었다 한다.

'보스(Vos)'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국은 가장 흥미로운 나라 중 하나로, 언덕과 골짜기, 고요한 강, 꿈같은 호숫가에 정말로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고 있다.
그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종 중의 하나로, 늘 유령처럼 흰 옷을 입고
마치 꿈속에서 처럼 조용히 걸어 다닌다"라고 했었다.

 

 

Hubert Vos가 그린 민상호의 초상화 & Hubert Vos가 그린 고종 황제의 초상화

 

 

고종황제를 알현하는 부분

" . . . . 서울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을 알현할 기회가 있었다.
왕을 알현하는 일이 고위 관리들일 경우에는 그리 중대한 관심사가 아니나
왕이 미국인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의 경우 그것은 이 나라에서 모종의 사건과도 같았다.
누각은 완전히 트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건물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탁자를 앞에 둔 채 한가운데에 왕이 앉아있었고 그 뒤로 네댓 명의 관리가 서 있었다. 계단 꼭대기에 이르자 홍영식은 얼굴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바닥에 엎드렸다.
조선인들이 왕 앞에서 행하는 부복(俯伏)이었다.
홍영식이 부복하는 동안 영사와 나는 연속되는 세 번의 절 중에서 첫 번째 절을 시작했다.
절을 하며 나아가기를 되풀이해 마지막 절이 끝났을 때는 왕 앞의 탁자에 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왕은 우리를 접견하려고 일어섰는데 약 서른 살 가량의 나이에 키는 조선인의 평균치보다 좀 작아 보였다.
1인치쯤 커 보이게 하는 신을 벗는다면 5피트 7인치 정도 될 성싶었다.

왕의 의복은 대체로 관리들이 입은 궁중복과 유사했으며 부분적인 장식만 달랐다.
모자는 관리들의 것과 비슷했으나 그들 것이 검정색인 반면 왕의 모자는 짙은 청색을 띠었다.
겉옷 역시 관리들의 옷과 거의 같은 모양이었으되, 색깔은 밝은 적색이었다.
조선에서는 적색이 왕을 나타내는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리띠 역시 장식은 화려했지만 형태는 다른 것과 유사했다.
가슴 장식으로는 학이 아니라 중국에서처럼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왕의 첫인상은 무척 호감을 주었다. 그의 웃음은 특히 타인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왕의 따스한 눈길 속에서 나는 그가 비록 격식상 한 말이었지만,
진실로 이날의 만남을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알현하는 동안 그리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으나
꼭 오랜 만남이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자리였다.

우리에게는 왕자를 알현하는 일이 또 남아 있었다.
왕자는 왕과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은 채 우리를 맞았다. 그는 열 살 정도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러나 왕자로서의 격리된 궁중생활과 강요된 위엄은 그를 실제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으며,
부친에게서 느껴지던 조화의 미는 결여돼 있었다.
그러나 아직 청춘을 모르고 성년에 도달하지도 않은 어린애에게서 그런 흠을 잡아낸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일 것이다. 왕자의 복식은 모자, 겉옷, 허리띠, 가슴 장식 등이
모두 왕의 차림과 유사했으며 신발도 낮은 것이었다.
옷 색깔만 달랐는데 그의 옷은 왕의 옷보다 색이 엷은 적색이었다.
엄한 궁중생활로 표정을 잃어버린 듯, 그는 시종 의무적인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안색은 유난히도 핏기가 없어 보였는데, 나중에야 호분(胡粉)을 썼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극동지방에 흔히 있는 관습이기도 했다.
왕자의 눈은 동양인 중에서도 가느다란 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반쯤 졸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
두 명의 키 큰 대신이 뒤에 서서 허리를 굽혀가며 그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고 있었다.
그는 마치 석상처럼 앉아서 신하들의 귓속말을 받아 어린 목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하곤 했다.
무언가 묻고 나서 대답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모습은 흡사 권위와 무력(無力)이 혼합돼있는 상태처럼 보였다.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창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왕자는 거의 번개같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뜰을 가로질러 돌아가는 일행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로써 모든 일정이 끝이 났고
우리는 곧 궁을 출발해 다시 한 번 넓은 바깥뜰을 지나 가마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사람들>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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