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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북호텔에서 (여러 날의 저녁에) - 박정대

지구의 북호텔에서 (여러 날의 저녁에) 박정대 북호텔의 남쪽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남들은 누군가의 육체를 갖기 위하여 이곳에 온다지만 나는 나를 버리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 자꾸만 저 별에 남겨두고 온 어린 아들이 생각난다 아들이 찰흙으로 만들었던 잠자는 곰도 생각이 난다 나는 그 잠자는 곰을 내 전화기 옆에 두었었다 지금도 그 잠자는 곰을 깨우기 위해 전화벨이 울리고 있을까 북호텔의 남쪽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렁이는 차들을 본다 돌아갈 곳이 없어도 필사적으로 돌아가는 저 거룩하고도 장엄한 지구인들의 歸家, 차가운 유리창에 입김을 뿌려 주석도 없는 황혼의 유서를 쓰면 멀리서 지구를 물고 날아오르는 검은 새 한 마리

- 그의 애송詩 2021.10.16

바다의 그늘 - 심재휘

그늘 심재휘 그늘이 짙다 8월 해변에 파라솔을 펴면 정오의 그늘만큼 깊은 우물 하나 속없이 내게로 와 나는 그 마음에 곁방살이하듯 바닷가의 검은빛 안에 든다 한나절 높게 울렁거리던 파도가 슬픈 노래의 후렴처럼 잦아드는 때 더운 볕도 기울고 그늘막도 기울어 조금씩 길어지던 그늘은 어느덧 바닷물에 가 닿는다 물빛을 닮은 그늘은 넉넉하다 우물 안의 맑은 샘물처럼 그늘은 이제 바다에서 흘러나온다 바다 속의 넓은 고독으로부터 슬며시 빠져나온 손 하나가 내 발을 덮고 가슴을 덮는다 곧 있으면 제 빛의 영토로 돌아갈 찬 손 하나가 그러나 그늘은 큰 그늘 속으로 돌아갈 뿐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으나 다만 내가 못 볼 뿐이니 밝았다 저무는 것은 내 안의 빛이었으니 넓은 넓은 바닷가에 내가 덮고 있는 그늘 하나 해질녘의 ..

- 그의 애송詩 2021.10.16

기념사진 - 황인찬

기념사진 황인찬 "우리들의 잡은 손 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아프다는 생각으로 변해 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을 하고나면 많은 사진을 촬영해온다. 더구나 그 여행이 일몰이나 일출을 목적으로 떠난다면 날씨, 해가 뜨고 지는 시..

- 그의 애송詩 2021.10.16

절실하다는 것 - 정일근

절실하다는 것 정일근 죽으러 간다는 나의 출항신고에 전화기를 든 채 하얗게 굳어 버리는 이 백리 밖 너의 모습이 아프게 읽힌다 바다로 떠나는 사람을 위해 울지 마라 바다에선 하늘과 바다가 하나이듯 바다에서 살고 죽는 일도 하나다 신대륙을 찾아 떠났던 대항해시대부터 많은 배들이 바다로 떠났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돌아온 것도 아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박수를 받으며 귀향한 사람에게 바다는 훈장 같은 영광이지만 아직도 회귀하지 않는 사람에게 바다는 수평의 푸른 무덤이지만 바다에서의 일은 바다만이 아는 것이지만 나는 너에게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귀신고래가 회유하듯 열망하는 기다림으로 돌아올 것이니 출항에서 귀항까지 바다는 절실한 기도 같은 것 나는 바다에서 너는 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

- 그의 애송詩 2021.10.16

<섬>에 관한 명상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안다 섬이 왜 바다에 홀로 떠 있는 것인지 떠나간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은 백사장에 모래알이 왜 그리 부드러운지 스스럼없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인지를 안다 섬은 그리움의 모래알 거기에서 울어 본 사람은 바다가 우주의 작은 물방울이라는 것을 안다 진실로 우는 사람의 눈물 한 방울은 바다보다도 크다 바다 갈매기는 떠나간 사람의 잡을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서해의 작은 섬에서 울었다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는 섬의 마음을 보고 울었다 그 외로움이 바로 그대가 오고 있는 길이라는 걸 그대가 저기 파도로 밀려오고 있는 작은 길이라는 걸 알고 눈이 시리도록 울었다 밀려와 그대 이제 이 섬의 작은 바위가 되어라 떠나지 않는 섬이 되어라 - 원재훈 全文 한 번이라도 그리움..

- 그의 애송詩 2021.10.16

오후 3시, 꽃 피지 않는 배롱나무 - 류승희

오후 3시, 꽃 피지 않는 배롱나무 류승희 애인과 자주 보던 흰 배롱나무 아래 오래된 애인과 다시 앉는다 한동안 얼굴이 젖어 있더니 날마다 이가 빠져 남은 이가 없다며 오늘은 말이 없다 기쁨은 기쁨으로 살기가 힘들고 슬픔도 마찬가지여서 죽고 싶다던 애인, 꿈을 꾸면 애인은 관흉국(貫凶國) 사람이 되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웃고 있다 철심으로 종이를 묶듯 심장과 심장에 구멍을 뚫고 서로를 꿰어 하나가 되고 싶다던, 그렇게 너덜해지고 싶다던 애인, 우리가 피웠던 꽃들을 밟고 찬란한 봄이 얼룩질 때 구멍 난 가슴을 손으로 후벼 파며 뜨겁게 울던 애인은 어디로 갔을까 꽃이 핀 자리 꽃향기는 자취도 없고 손닿는 곳마다 서걱거리는 모래가 돋아나는 오후 세 시, 꽃 피지 않는 배롱나무 뜨거운 그늘 아래, - 오..

- 그의 애송詩 2021.10.16

목백일홍(木百日紅) - 손택수

2021. 7. 18. 술 취한 백일홍 1 손택수 백일홍 아래 누가 술병을 세워놓고 갔다 백일홍과 함께 대작이라도 했던가 해 떠라 해 떨어져라 술병을 기울였든가 술만 먹으면 몸에 난 상처자국들이 먼저 붉어져오곤 했다가 시려오곤 한다 내가 까마득 잊었다고 생각한 상처들, 흉터가 없으니 이제 다 나았다 훌훌 털어버린 기억들, 살갗 위로 고개를 내밀곤 한다 연고로 매끈해진 살갗 속에서 욱신거리는, 술만 먹으면 제 상처와 대작을 하면서 필름이 끊길 때까지 가야 하는 사내들이 있다 꽃펴라 꽃 져라 반쯤 마신 술병 앞에 놓고 백일홍 빛이 그늘까지 점점이 물들어 간다 술 취한 백일홍 2 손택수 백일홍 아래 누가 술병을 세워놓고 갔다 지는 꽃과 함께 대작이라도 했던가 해 떠라 해 떨어져라 술병을 기울였던가 빈 술병 앞..

- 그의 애송詩 2021.10.16

제라늄 살리기 - 신정민

* 솔 #건반이 올라오지 않는 이유는 詩가 되지 못했다 솔,도 아니고 라,도 아닌 반음 음을 높이는 과정에서 무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옥타브에서 소리가 꺼지곤 했다 이른 봄 서리에 탄력을 잃은 피아노 건반 뚜껑을 활짝 열어놓았다 햇볕을 좋아하는 음계들 * 간유리 속의 불빛 사철 꽃이 피는 부지런하고 예쁜 제라늄은 추위가 치명적이다 시든 제라늄을 살리고자 애를 쓰면서 그린 일기 형식의 그림은 아크릴 캔버스에 배어있다 둥근 얼굴과 화폭 귀퉁이의 주홍빛 꽃잎은 밖도 아니고 안도 아닌 분명한 불투명 * 죽은 이후에야 인정을 받는 화가들, 이라고 썼다가 많은 미술가라고 고쳐썼다 시들고 있는 꽃을 살리는 화가를 알아보지 못한 건 나쁜 시력 때문이다 안경을 쓰고서야 알게 된 세상의 반음들, * 그래서 런던행 ..

- 그의 애송詩 2021.10.16

해남길, 저녁 - 이문재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 했다. 그곳에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릴텐데... 해남길, 저녁 이문재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놀빛 물려놓은 바다의 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아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먹빛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 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 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머리가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

- 그의 애송詩 2021.10.16

禪林院址에 가서 - 이상국

禪林院址에 가서 이상국 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禪林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禪林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번이고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채는 아직 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禪林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 그의 애송詩 2021.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