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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여름 민구 여름을 그리려면 종이가 필요해 종이는 물에 녹지 않아야 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크거나 훨씬 작을 수도 있다 너무 큰 해변은 완성되지 않는다 너무 아름다운 해변은 액자에 걸면 가져가버린다 당신이 조금 느리고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 남은 검은색 파스텔로 아무도 오지 않는 바다를 그리자 당신의 여름이 기분이거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여행지라면 시원한 문장을 골라서 글로 쓸 수 있는데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간 뒤에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좋겠다 파도가 치고 있다 누군가는 고래를 보았다며 사진을 찍거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겠지만 고래는 너무 커서 밑그림을 그릴 수 없고 모래는 너무 작아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두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이 오면 ..

- 그의 애송詩 2021.10.16

나는 외로웠다 - 이정하

나는 외로웠다 - 이정하 바람 속에 온 몸을 맡긴 한 잎 나뭇잎 때로 무참히 흔들릴 때 구겨지고 찢겨지는 아픔보다 나를 더 못견디게 하는 것은 나 혼자만 이렇게 흔들리고 있다는 외로움이었다 어두워야 눈을 뜬다 때로 그 밝은 태양은 내게 얼마나 참혹한가 나는 외로웠다 어쩌다 외로운 게 아니라 한순간도 빠짐없이 외로웠다 그렇지만 이건 알아다오 외로워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라는 것 AM. 이른 새벽부터 카톡(kakao talk)신호음이 연달아 울린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자 메시지들. 한 편으로는 감사하고 고맙지만 한 편으로는 이것도 모두 쓸데없는 정신적인 공해다. 사람이 외로울땐 그냥 내버려둬야한다. 울고싶을땐 혼자 울게 둬야 정화(淨化)되는게 아닐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생일이라고해서 언제부터 이렇게 지인들..

- 그의 애송詩 2021.10.16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 신대철

바람이 가진 힘은 모두 풀어내어 개울물 속에서 물방울이 되게 바람을 적시는 비 비 같은 사람을 만나려고 늦 가을의 미루나무보다도 훤칠하게 서 있어본 사람은 보이겠다 오늘 중으로 뛰어가야 할 길을 바라보며 초조히 구름 속을 서성거리는 빗줄기, 빗줄기쯤. - 신대철,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중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비가 내린다. 비에 젖어 본 사람은 안다, 내리는 비와 그 비에 옷깃이 젖으며 무겁게 젖어드는 눅눅한 슬픔을. 그는 떠났고, 먼 길을 떠돌며 그를 그리워해야 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슬프다. 그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나는 구름처럼 떠돌고, 나는 더더욱 그를 그리워할 것이고. 그 깊은 마음 모두 풀어내어 바람으로 한 번쯤 지나칠 수는 없을까, 가만히 가만히 오래전 그 먼 시간을 떠올리며, ..

- 그의 애송詩 2021.10.16

기억 저편 - 윤성택

기억 저편 윤성택 한 사람이 나무로 떠났지만 그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어느 날 나무가 되어 돌아온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떠난 그였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떠난 그가 남긴 유품을 새벽에 깨어 천천히 만져보는 기분, 길을 뒤돌아보면 그를 어느 나무에선가 놓친 것도 같다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살아간다는 건 온 신경을 유목한다는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머물면서 이렇게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간밤에 큰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나는 숲으로 들어갔다. 숲에는 낙엽송 몇 그루가 발아하여 어린 싹이 자라고 울창한 숲은 여전하였다 숲,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그리고 서서이 사라져가는 새벽안개. 숲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큰 나무 하나가..

- 그의 애송詩 2021.10.16

밤기차 - 윤성택

나, 밤기차를 탔었다 검은 산을 하나씩 돌려 세워 보낼 때마다 덜컹거리는 기차는 사선으로 몸을 틀었다 별빛은 조금씩 하늘을 나눠가졌다 종착역으로 향하는 기차는 인생을 닮았다 하루하루 세상에 침목을 대고 나 태어나자마자 이 길을 따라 왔다 빠르게 흐르는 어둠 너머 가로등 속 누군가의 고단한 길이 들어 있었다 간이역처럼 나를 스쳐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차창 밖은 세상의 가장 바깥이었다 함부로 내려설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 기차표를 들여다보았다 가는 곳이 낯설어 지고 있었다 - 윤성택의 '밤기차' 이 기차는 어디로 향하는 기차입니까, 라고 묻고 싶은데 이 나라 말을 알지를 못합니다 이 기차가 어질어질한 속도로 당신을 데려가 어디에 내려놓을지를 알고 싶은데 물음은 물컹 내 귀에 도로 닿습니다 당신의 시간의 옆..

- 그의 애송詩 2021.10.16

장독대가 있던 집 - 권대웅

2021. 5. 13. 장독대가 있던 집 / 권대웅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는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을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 그의 애송詩 2021.10.16

구름의 운명 - 유하

푸른 보리밭을 뒤흔들며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처럼 만져지지 않는 사랑이 나를 흔들고 지나갔다 지나간 바람은 길은 만들지 않으므로 상처는 늘 송사리 눈에 비친 오후의 마지막 햇살 그 짧은 머뭇거림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서 탱자나무꽃은 온통 세상을 하얗게 터뜨리고 산다는 것은 매순간 얼마나 황홀한 몰락인가 육체와 허공이 한 몸인 구름, 사랑이 내 푸른빛을 흔들지 않았다면 난 껍데기를 싸인 보리 알갱이처럼 끝내 구름의 운명을 알지 못했으리라 구름의 운명 - 유하 유하 유하시인의 나이, 1963년생이니 58세. 젊어서부터 감각적이고 세련된 멋을 풍기는 그의 글이 좋았다. 그는 영화감독으로 진출해 좋은 영화도 만들었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2).' '결혼은 미친짓이다(2002)' '말죽거리 ..

- 그의 애송詩 2021.10.16

청동물고기 - 허영숙

청동물고기 허영숙 흔들려야 바람을 읽을 수 있는 산사 추녀 끝 저 청동물고기는 몇 백 년 전쯤 내가 단청장이였을 때 매단 것인지도 모른다 일주문 밖에서 반배를 올리던 목련 봉오리처럼 참한 곡선을 지닌 너를 본 후 가슴에 사모의 별지화를 그려두고 너를 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추녀아래 긴 목 빼고 붓질하는 나를 소리가 날 때마다 올려다보라고 매달았을지도 모를 청동물고기 너는 목련처럼 내게 짧게 피었다 사라지고 붓끝을 따라다니던 내 간절한 기도도 사라지고 달의 옆구리를 돌아 나오는 몇 겁을 지나, 절터 한 귀퉁이 연못의 붉은 잉어로 다시 태어난 내가 몇 백년 전의 숨결을 물고 흔들리는 청동물고기를 올려다보는 밤 달빛에 숨구멍이 모조리 말라 추녀 끝 청동물고기되어 매달린다면 바람으로라도 한 번 쯤 나를 읽어달..

- 그의 애송詩 2021.10.16

낯선 마을의 달 - 심재휘

바람의 경치 / 심재휘 -낯선 마을의 달 겨울과 봄의 사이 또는 낮과 밤의 사이에서 생각하면 나는 어느 쪽에 서 있었던가 낯선 마을의 초입에서 어느덧 달이 뜬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도 젊은 사람들은 마을 공터에 모여 알 수 없는 저수지의 깊이에 관해서 차고 기우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돌리는 깡통 속의 불은 제 목숨으로 속없이 둥글게 빛난다 허나 제자리에서 오래 돌수록 밟음도 지치는 것 그러면 타다 만 불씨들을 발로 비벼 끄듯 엉덩이에 붙은 검불을 털어내듯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잠이 들 것이다 마침내는 어둠에 빚지게 될 터이다 그랬던 것이다 저 낯선 마을의 달이 어둠에 깃들어 사는 것처럼 나는 어느 쪽에도 서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을 하나가 불현듯 내게로 다가와 나를 슬쩍 슬쩍 지나갔..

- 그의 애송詩 2021.10.16

바람의 경치 - 심재휘

바람의 경치 심재휘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와 또 어느 봄날 느티나무 저 높은 가지 끝에도 물이 오를까 싶은 지방도로 끝난 곳에서 우리는 무슨 잎을 피우나 이제 그대에게 어떤 편지를 쓰나 그리운 당신 더 쓸 말은 없구려 이만 생각하면 언제나 누군가 옆에 있었건만 바다로 이어진 제방에 나는 늘 혼자 앉아 있었던 거였다 산기슭에서 연을 날리던 아이들은 바람 부는 들판을 쏘다니다가 어느 뻘밭에서 늙어갔는지 포구의 폐선들 잔물결에도 일렁거린다 때때로 바람은 숲에 몸을 숨기고 우리를 노려보다가도 낄낄대며 나와 새들을 높이 날리곤 하였는데 새들이 바람을 몸에 품으며 바람의 영토에서 훨훨 벗어나는 걸 바람은 몰랐던 거다 몰랐으므로 또한 새가 되지 못하는 나는 당도하지 않은 그대의 소식처럼 떠돈다 그러나 떠도는 것은 그대..

- 그의 애송詩 2021.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