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560

11월 - 정군수

11月 정군수 아내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간다 불빛 사이로 잎이 진다 겨울로 가고 있는 은행나무 아내는 말이 없다 그 손금에서도 잎이 지고 있다 문을 닫지 말아야지 겨울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찬바람이 이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다 벌거벗은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가고 있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이 밤 그들은 얼마나 긴 성을 쌓을까 구급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다 지려는가 몇 잎 남은 은행잎이 바람에 실려가다 아내와 나의 발등에 떨어진다 (정군수·시인, 1945- )

- 그의 애송詩 2021.10.15

11월 - 최갑수

11월 최갑수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11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11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11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 편을 슬렁슬렁 읽어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11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 그의 애송詩 2021.10.15

11월의 나무 - 황지우

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황지우·시인, 1952-) 11월. 나뭇잎이 많이 떨어진다. 나뭇잎을 떨구는 11월의 나무는 패배한 것일까? 여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