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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숲 - 류근

2013. 9. 24. 빈숲 류근 가을엔 그 숲에 가지 못했다 낮은 십자가와 여자들만 사는 집, 그리고 몇 그루의 꽃나무들이 일으키는 삼각의 숲 내가 자주 생각에 잠겨 있던 숲은 봄과 이른여름의 것이었다 마침 한 여자와 결별했으므로 그 이후의 계절이 거기 다녀갔는지 알 수 없다 멈춰 있는 것은 조금 아프거나 편안한 기억들 뿐 구름조차 세상에 온 것들은 잠자코 멈춰 있지 못한다 그 숲의 가을에 가지 못했다 멈춰지지 않는 상처로만 명멸을 거듭하는 숲, 봄과 이른 여름에만 존재해서 더 이상 결별이 이룩되지 않는 숲, 그리고 이제는 불타는 여자가 오지 않는 숲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성모 순례지는 병인년(1866년) 대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무명 순교지이다 남양 순교지(聖母聖地)는 다른 순교지..

- 그의 애송詩 2021.10.12

흐르는 강물처럼 - 유하

흐르는 강물처럼 유하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길의 쓸쓸한 행복과 아무에게도 다가가지 않고 오직 자기 내부로의 산책으로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때 나는 다른 기쁨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

- 그의 애송詩 2021.10.12

가득과 가족 사이 - 이희섭

2013. 9. 20. 가득과 가족 사이 이희섭 아내와 여행을 가다가 싸우고 돌아오는 길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에 들어간다 '가득이세요?' 라는 말이 '가족이세요?' 라는 말로 들리는 순간 가득과 가족 사이에서 잠시 묘연해진다 가득이라는 것은 바닥난 속을 온전히 채우는 것이고 가족이라는 것도 서로의 빈곳을 채워주어야 하는데 아내는 옆자리에서 눈감고 메마른 유전을 건너가고 있다 아무리 채우려 해도 금세 빠져나가는 사소한 빈틈 서로 다른 곳을 적시고 있는 건 아닐까 가득이 가족으로 들리는 배후가 궁금해진다 연료가 소진되며 자동차가 굴러가듯 그동안 우리 사이에 소진된 것은 무엇인가 소모되는 것들의 힘으로 일상을 지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닥난 가족을 가득 채우러 다시 길을 떠난다

- 그의 애송詩 202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