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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나무 - 황지우

2013. 11. 15.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황지우의 에서 발췌 해마다 11월이 오면 사람도 나무가 되어 생의 낙엽을 털어내기 마련이다. 11월은 시간의 환승역과 같다. 지금껏 타고 온 기차에서 내려 갈아탈 기차를 기다리는 ..

- 그의 애송詩 2021.10.12

寒溪嶺을 넘으며 브레히트를 생각함

2013. 11. 10. 브레히트를 생각함 박윤규 한계령 정상, 이젠 내리막이다 기하급수로 따라붙는 가속도를 조절하느라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잡으면 단풍설악은 풍랑 일렁이는 바다가 된다 산동네 식당 앞에 두 바퀴를 세웠을 땐 향로봉에 찔린 하늘 피가 번지고 몇 채 안 보이는 인가엔 저녁 짓는 안개가 환각제 같다 산골식당 문을 젖히고 들어서니 어깨 큰 반백 노인네가 돌아앉아 있다 등은 적당히 굽었고 목엔 역마살 깊이 주름진 강 쥐색 베레모를 푹 눌러 쓰고 느긋하게 산채비빔밥을 먹고 있는 노인의 코트는 지독하게 바랜 검은색이다 그의 왼쪽엔 보다 만 듯 접혀진 책 한 권 '살아남은 자의 슬픔' 노란 표지에 회색 제목 외 더 작은 글씨가 줄을 서 있지만 그건 이미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노인의 식탁모서리를 잡..

- 그의 애송詩 2021.10.12

큰 江 - 김민홍

큰 江 아무도 모르겠지 밤이면 내가 강가에 나가 은밀히 슬픔을 헹구고 돌아온다는 걸 하여 강물은 밤새 퍼렇게 뒤척이고 물고기들은 내 슬픔을 먹고 살찐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사람들의 눈빛이 흐려질 때마다 내가 조금씩 야위어 가는 걸 하여 내 쓸쓸함이 몹쓸 병으로 익으면 다시 강가에 나가 소리죽여 내가 울고 투명한 내 눈물이 썩어 흘러 바다에 닿으면 이윽고 해일이 일고 물고기들이 일제히 배 뒤집어 수군거린다는 걸 끝내 아무도 모르겠지 詩 / 김민홍

- 그의 애송詩 202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