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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장석남 / 정원숙

2013. 12. 27.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장석남 점등시간 77번 좌석버스를 탔다 나는 페루에 가는 것이다 시드는 화환처럼 해가 진다 바람은 저녁 내내 창 유리의 흰 페인트를 벗겨내고 있다 이른 산책의 별이 하나 비닐 봉지처럼 떴다 허공에 걸려 있는 푸른 풍금 소리들 나를 미행하는 이 깡마른 적막도 끝내 페루까지 동행하리라 철망 위에 앉아 우는 새 새의 울음속에 등불이 하나 내어 걸린다 페루의 유일한 저녁 불빛 밤새 파도들은 불빛으로 낮게 포복해 몰려와 몸을 씻고 있다 불빛을 따라간 한 목숨을 씻어주고 있다 나는 내내 페루에 가고 있는 것이다 -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 지성사, 1995)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정원숙 이곳은 페루 자줏빛 달이 뜨는 섬 깨진 알을 ..

- 그의 애송詩 2021.10.12

화이트 크리스마스 - 나태주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택시를 기다리며 3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나태주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 그의 애송詩 2021.10.12

갈대 - 정호승

2013. 12. 4. 갈대 정호승 내가 아직도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내 발밑에 물결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아무도 살지 않는 강변에 사는 것은 실패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강한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하다는 것을 죽은 새들의 정다운 울음소리 들으며 온종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의 삶이 진정 괴로운 것은 분노를 삭일 수 없다는 것이었나니 내가 아직도 바람 부는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날아간 하늘이 햇살에 빛나기 때문이다 벌써12월, 그러나 바람은 잠들고 하늘은 유리창같이 맑다 나무들은 아직 다 떨어내지 못한 나뭇잎 몇 장을 매달고 서있고 호수에는 지친 갈대가 흐느끼듯 조용히 서있다 그 아래, 어디서 왔을까?농병아리 한 마리 헤엄치며 놀고있다 또 한 해를 떠..

- 그의 애송詩 202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