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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억새 - 정일근

2014. 12. 4. 가을억새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성 열차로 고개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 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

- 그의 애송詩 2021.10.13

겨울 갈대 - 윤성택

2014. 11. 11. 겨울 갈대 윤성택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물결은 음파처럼 밀려와 촘촘히 조각을 덧붙이고 있었다 뿌리는 그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물밑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나는 강가를 무작정 걸었다 놀란 새들이 음표처럼 날아올라 수평선에 걸렸다 그 순간 들려주는 연주곡은 코끝이 시렸다, 이별은 떠나온 것이 아니라 두고 온 것일 뿐이라고 노랫말을 붙이고 싶었다 조금 더 잦아지는 물결은 시린 저녁놀을 강 끝으로 옮겨놓았다 생각이 지류를 따라 부질없이 밀려갔다 어느덧 나는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제목도 알 수 없고 구절만 떠오르는 쓸쓸한 노래였다공기방울이 얼음 밑으로 흘러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뿌리의 노래라고 믿었다

- 그의 애송詩 2021.10.13

9월의 이틀 - 류시화

2014. 9. 23. 9월의 이틀 류시화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 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 손까지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

- 그의 애송詩 2021.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