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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의 <너에게 묻는다>

유목의 하늘에 양떼를 풀어 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 낮게 깔려있는 하늘은 늘 푸르렀고 상형문자의 구름은 천천히 자막으로 흘러갔던 것인데 하늘이 펄럭일 때 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양떼 울음을 들었던 것이다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었거나 잊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망쳤던 그 집 아마도 그 집은 소금이 가득했던 창고 아버지는 비와 눈을 가두어 놓고 바다를 꿈꾸었던 것인지 밤새 매질하는 소리 들리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봉한 소금처럼 우리는 태어났던 것 유목을 배우고 구름의 상형문자를 배웠으니 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하늘인 것 또한 알 수 없는 일 내가 잠깐 이 생의 언덕 위에 올라 발 밑을 내려다 볼 때 울컥 목젖이 떨리면서 깊게 소금에 절여 있던 낱말을 뱉어낼 수 있었던 것 여기..

- 그의 애송詩 2021.10.14

떠도는 차창 - 윤성택

떠도는 차창 윤성택 가로등에서 은행잎이 쏟아져 내렸다 조금씩 말라가는 것은 금간 화분 같은 상점, 휘감던 뿌리들이 틈틈마다 창문을 틔운다 누구나 타인을 데려간 시간 속에서 그리운 이름이 자신을 데리고 나올 때가 있다 창문은 산화된 필름처럼 하나의 색으로 한 장면만 비춰온다. 빛에 갇힌 거리를 바라보지만 가깝거나 먼 네온에 잠시 물들 뿐 기억에게 이 도시는 부재의 현기증이다 몇몇이 버튼을 누르듯 과거에서 내리고 나도 버스에서 내리면 당신은 시선을 바꿀 것이다 종점까지 밀려가는 버스를 탄 사람은 머지않아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는 밤 나는 눌러 줄 때에만 붉은 빛이 스미는 심장이거나 기다림, 벽이었다고 어느 손이 나를 불러들인다 몇 년 전 바람에도 잠시 잠깐 먼 거리에 붉은 빛이 돈다 미련도 없이 작별도 없이 ..

- 그의 애송詩 2021.10.13

베로니카의 지나친 눈물 - 김영찬

베로니카의 지나친 눈물 김영찬 한때 나는 중앙아시아의 뜨거운 모래바람이었나 바이칼 호반의 호면(湖面)에 떠도는 뜬금없는 구름 구름의 문양임을 자처했네 한때의 나는 마적단의 말발굽에 채인 돌 멩 이 구둣발에 채여 튕겨나간 돌멩이의 무거운 침묵 돌멩이의 돌멩이 돌멩이의 뜨겁던 열애(熱愛) 감정이 메말라 무덤덤한 마파람이기도 했네 한때 나는 또 모서리가 닳고 닳아 그토록 훼손 된 취주악의 낡은 악절 갈대의 음유(吟遊)이기를 바랬지만 악보는 찢어지고 비바람에 흔들린 음정, 악상(樂想)의 일부는 천궁에 부딪혀 머리 찧기도 했네 한때의 나는 정처 없는 꿈사냥꾼, 해거름 초저녁별처럼 은밀하던 밀애(密愛)는 어둑어둑 어쩌다가 부활절 새벽을 불러들인 여기는 도무지 어디 누구의 영토일까 베로니카의 눈물에 젖은 수건과 수건..

- 그의 애송詩 2021.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