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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하는 자를 위하여... - 호모 노마드(Homo Nomad)

길은 꿈들이 마구 얽히며 이어진 오래된 발자욱의 흔적 유랑의 역사를 기록한 낡은 종이쪽이다. 나는 지구의 삼분의 일을 돌아 기꺼이, 그들은 양들을 먹일 초지를 찾아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길에서 만났다 나는 타국에서 왔지만 그들은 지구라는 행성의 원주민이다. 내가 차가운 울타리 안에서 페허처럼 병들 때 그들은 외로운 변방에서 견고한 내면을 쌓았다 나는 정착의 유혹에 흔들리는 불임의 유랑이지만 그들은 삶의 관성에서 자유로운 다산(多産)의 유랑이다. 내가 푸른빛의 호수를 만날 때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지만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홀한 푸른빛의 일부였다. 나는 떠나온 것 같은데 그들은 돌아온 것 같다. ...그러나 끝내는 도달할 수 없었던 달의 뒤편처럼 아주 캄캄한 유목의 밤 그들이 그곳으로 사..

- 그의 애송詩 2021.10.14

동유럽 종단열차 - 이병률

왜 혼자냐고 합니다 노부부가 호밀빵 반절을 건네며 내게 혼자여서 쓸쓸하겠다 합니다 씩씩하게 빵을 베어물며 쓸쓸함이 차창 밖 벌판에 쌓인 눈만큼이야 되겠냐 싶어집니다 국경을 앞둔 루마니아 어느 작은 마을 노부부는 내리고 나는 잠이 듭니다 눈을 뜨니 바깥에는 눈보라 치는 벌판이 맞은편에는 동양 사내가 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긴긴 밤 말도 않던 사내가 아침이 되어서야 자신은 베트남 사람인데 나더러 일본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을 뿐 그에게 왜 혼자냐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어디를 가느냐 물으려다 가늠할 방향이 아닌 듯해 소란을 덮어둡니다 큰 햇살이 마중나와 있는 역으로 사내는 사라지고 나는 잠이 듭니다 매서운 바람에 차창은 얼고 풍경은 닫히고 달려도 달려도 시간의 몸은 극치를 향해 있습니다 바르샤바..

- 그의 애송詩 2021.10.14

겨울비 I

겨 울 비 도종환 아침부터 겨울비 내리고 바람 스산한 날이었다 술자리에 안경을 놓고 가셨던 선생님이 안경을 찾으러 나오셨다가 생태찌개 잘하는 곳으로 가자고 하셨다 선생님은 색 바랜 연두색 양산을 들고 계셨고 내 우산은 손잡이가 녹슬어 잘 펴지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것마다 낡고 녹슨 게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셨다 툭하면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그땐 이렇게 찢기고 갈라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가장 큰 목소릴 내던 이가 제일 먼저 배신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철창 안에서도 두려움만 있는 게 아니라 담요에 엉긴 핏자국보다 끈끈한 어떤 게 있었다고 하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겁이 많은 선생님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보다 중도가 좋다고 하시면서 안경을 안 쓰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시면서 낮..

- 그의 애송詩 2021.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