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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하다는 것 - 정일근

절실하다는 것 정일근 죽으러 간다는 나의 출항신고에 전화기를 든 채 하얗게 굳어 버리는 이 백리 밖 너의 모습이 아프게 읽힌다 바다로 떠나는 사람을 위해 울지 마라 바다에선 하늘과 바다가 하나이듯 바다에서 살고 죽는 일도 하나다 신대륙을 찾아 떠났던 대항해시대부터 많은 배들이 바다로 떠났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돌아온 것도 아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박수를 받으며 귀향한 사람에게 바다는 훈장 같은 영광이지만 아직도 회귀하지 않는 사람에게 바다는 수평의 푸른 무덤이지만 바다에서의 일은 바다만이 아는 것이지만 나는 너에게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귀신고래가 회유하듯 열망하는 기다림으로 돌아올 것이니 출항에서 귀항까지 바다는 절실한 기도 같은 것 나는 바다에서 너는 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

- 그의 애송詩 2021.10.16

<섬>에 관한 명상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안다 섬이 왜 바다에 홀로 떠 있는 것인지 떠나간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은 백사장에 모래알이 왜 그리 부드러운지 스스럼없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인지를 안다 섬은 그리움의 모래알 거기에서 울어 본 사람은 바다가 우주의 작은 물방울이라는 것을 안다 진실로 우는 사람의 눈물 한 방울은 바다보다도 크다 바다 갈매기는 떠나간 사람의 잡을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서해의 작은 섬에서 울었다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는 섬의 마음을 보고 울었다 그 외로움이 바로 그대가 오고 있는 길이라는 걸 그대가 저기 파도로 밀려오고 있는 작은 길이라는 걸 알고 눈이 시리도록 울었다 밀려와 그대 이제 이 섬의 작은 바위가 되어라 떠나지 않는 섬이 되어라 - 원재훈 全文 한 번이라도 그리움..

- 그의 애송詩 2021.10.16

오후 3시, 꽃 피지 않는 배롱나무 - 류승희

오후 3시, 꽃 피지 않는 배롱나무 류승희 애인과 자주 보던 흰 배롱나무 아래 오래된 애인과 다시 앉는다 한동안 얼굴이 젖어 있더니 날마다 이가 빠져 남은 이가 없다며 오늘은 말이 없다 기쁨은 기쁨으로 살기가 힘들고 슬픔도 마찬가지여서 죽고 싶다던 애인, 꿈을 꾸면 애인은 관흉국(貫凶國) 사람이 되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웃고 있다 철심으로 종이를 묶듯 심장과 심장에 구멍을 뚫고 서로를 꿰어 하나가 되고 싶다던, 그렇게 너덜해지고 싶다던 애인, 우리가 피웠던 꽃들을 밟고 찬란한 봄이 얼룩질 때 구멍 난 가슴을 손으로 후벼 파며 뜨겁게 울던 애인은 어디로 갔을까 꽃이 핀 자리 꽃향기는 자취도 없고 손닿는 곳마다 서걱거리는 모래가 돋아나는 오후 세 시, 꽃 피지 않는 배롱나무 뜨거운 그늘 아래, - 오..

- 그의 애송詩 2021.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