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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Love - 김상미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 Photo :: Chris Yoon (강원도 육백만마지기에서) - Poem :: 김상미의 '사랑' - Music :: Jacob's Piano - Your Melody (2019)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식물이 태양을 향하듯 한 사람을 향한 向日性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의 특성이..

- 그의 애송詩 2021.10.16

청호동 조도 - 이상국

청호동 조도 이상국 청호동 방파제 너머 떠다니는 섬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장화를 신은 채 청호동 사람들마저 잠들고 흥남이나 청진물이 속초물과 쓰린 속으로 새섬 근처에서 캄캄한 소주를 까다가 쓰러지면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 섬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헐떡거리며 짐승처럼 날다 바다의 벽에 다치고 돌아와 죽은 듯이 잠드는 청호동 방파제 너머 새섬을 사람들은 모른다. 청호동 사람들의 동해 밑바닥 국적없는 고기를 잡거나 모래위에 집짓고 아이들을 낳는 사실을 믿거나 믿지 않는 건 무서운 일이다. 나룻배 끊기면 흐르는 땅 모래 껴앉고 아바이들 잠드는 청호동 방파제 너머 이남 물과 이북 물이 야 이 간나이 새끼 마이 늙었구만 하며 공개적으로 억세게 무너지면 동해속으로 사라질 청호동은 잠시 객지일 뿐이고 ..

- 그의 애송詩 2021.10.16

그 저녁, 해안가 낡은 주점 - 박승자

2021. 7. 29. 그 저녁, 해안가 낡은 주점 박승자 저녁, 그 술자리가 꺼지지 않는 촛불이 될 수 있을까 수목이 빽빽한 내일의 숲이 될 수 있을까 일행들은 취해서 술잔이 엎어지고 웃음이 낮은 천장에 박쥐처럼 매달린 밀물이 밀려든 해안가 낡은 주점 소란을 즐겁게, 팽팽하게 감당해내던 서로의 얼굴을 비추던 앙금이 가라앉는 탁주 마주 앉은 자리, 이 자리가 끝나면 아무도 모르는 긴 이별의 숲으로 당나귀를 끌고 가겠지, 아무도 당나귀 방울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가끔 그 해안가를 걸쳐온 바람이 귓불을 얼리겠지 별은 더 고요하고 적막하겠지 지상의 시간으로 흐르는 별의 맥박을 짚으며 이미 정령이 되어버린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한없이 쓸쓸한 사랑을 정령의 치마폭에 눈물과 함께 쏟아낼 것이다 당나귀가 숲을 나가자..

- 그의 애송詩 2021.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