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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공항 - 김광규

2013. 3. 12. 해변의 공항 김광규 간이역처럼 고즈넉한 해변의 공항 빠리를 오가는 소형 제트기가 하루에 네 차례 뜨고 내린다 지중해의 눈부신 햇빛 투명한 공기와 라벤더 향기 속에 은빛 날개가 바다 위로 날아오른다 열한 시에 통관대를 닫고 직원들은 점심 먹으러 나간다 비행 스케듈을 잘못 잡은 외국 승객 몇 명만 남아 대합실을 지키다가 이층 레스토랑으로 옮겨 앉아 오후 비행기 편 기다리며 프로방스 포도주를 맛본다 예정에 없이 한참 쉬어 간 이곳을 여행객들은 나중에 관광 명소보다 오래 기억할 것이다 사진 / 프린세스 줄리아나 공항(Princess Juliana International Airport)은 마르턴(네덜란드령 세인트 마틴, 구 네덜란드령 안틸라스의 일부)에 있는 국제공항이다 세인트 마틴의 해..

이사 - 박영근

1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 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 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이 적 서툰 노래 내가..

- 그의 애송詩 2021.10.11

재즈빌 (Jazz Ville) - 정재학

재즈빌 (Jazz Ville) 정재학 여권을 보여주십시오, 트럼펫 모양의 아파트에 다다르자 재즈빌 관리자가 말했다 그의 옷에는 마일스 데이비스 얼굴이 새겨진 배지가 박혀 있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위해 화성학과 블루 노트를 공부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여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권 연장을 위해서는 존 콜트레인과 칙 코리아의 모든 음반을 들어야 한다 우선 목이 말라 빌 에반스 칵테일을 주문했다 모자에 세 개의 날개를 가진 새가 앉는다 내 머리카락이 북을 치기 시작하자 피아노 건반 위로 기차가 지나간다 나는 악보에는 그릴 수 없는 건반과 건반 사이의 음들을 듣고 있었다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음표로 만들어진 문을 찢으며 들어와 자신들의 몸뚱이만 한 하모니카를 불었다 고막이 터질 지경이었다 나는 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