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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거(夏安居) - 허형만

하안거(夏安居) 허형만 나도 이젠 홀로다, 이 나이에. 언제라도 목숨 건 사랑 한번 있었던가. 저 미치게 푸르던 하늘도 눈에 묻고 살결 고운 강물도 귓속에 닫은 채 시간의 토굴 속에 가부좌 튼다. 내 살아온 긴 그림자 우련하거니, 누구를 만났던 기억은 더욱 가뭇하거니, 아직도 무슨 미련 그리도 짙어 설풋설풋 서러워지느냐, 울고 싶어지느냐, 알고보면 인연이란 참으로 깊은 우물과 같은 것, 평생을 누추한 내 안에서 우물을 파며 살아온 햇살이며 별들까지 목구멍에 손가락 쑤셔넣어 토해놓고 나도 이젠 홀로다, 이 나이에. 허형만 시집 중에서 夏安居 / 승려들이 여름 장마 때 외출하지 않고 함께 모여서 수행하는 일,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언어가 얼마나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형형색색 꾸밈없는 모습을 ..

- 그의 애송詩 2021.10.11

데자뷰 (deja vu) - 윤성택

데자뷰 윤성택 나에게 스미면서 쇄도하는 새벽 빛은 운명을 가볍게 액세스하며 전원 속 비밀의 순간들을 인증한다 진실은 소멸의 속도로 이동해야 한다 모니터의 검은 점을 통과해 쏟아지는 이메일의 활자들, 점멸하는 입자의 배열이 공중으로 흩날린다 문을 열면 아주 먼 곳일지라도 다른 쪽 문이 열린다 우리의 시간은 종종 다른 곳에 있다 마음은 생각이 광속도로 지나가는 경치이다 나를 데리고 가요 그리고 벌판에 세워두는 거죠 돌 더미 위 색색의 깃발처럼 흩날리는 아침을 기다리는 거예요 깊은 숨을 쉬며 당신과 나는 어떤 깜박임으로 알아볼까요 나의 낮은 당신의 밤이 되어 촤르르 지나고 있어요 무거운 잠수종을 뒤집어쓴 바닥의 수심은 깊다 지상에서 내려온 고무호스로 피가 흐르는 소리, 푸른 기포가 열렸다 닫히면 수면으로 떠오..

- 그의 애송詩 2021.10.11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1 한 미남 청년을 짝사랑하다 바다에 몸을 던진 옛 그리스의 시인 사포 애기세줄나비, 학명은 Neptis sappho Pallas 불빛 속으로 날아드는 그 나비의 모습이 그녀를 연상시켰던 걸까 나비처럼 가벼운 영혼만이 열정 속으로 투신할 수 있다고, 노래하진 않겠다 나비는 불꽃이 자기를 태울 거라 생각진 않았으리라 혹, 불빛은 애기세줄나비에게 환한 거울 같은 건 아니었을까 2 조롱 속의 짝 잃은 문조, 그 안에 작은 거울을 넣어주었더니 거울에 비친 자기를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행복해 했다는 이야기 3 죽음을 걸었던, 너를 향한 내 구애의 말들 덧없음이여, 나는 나 이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날아들었던 당신이라는 불꽃 오랫동안 나는 알지 못했다, 실은 그 눈부신..

- 그의 애송詩 202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