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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어둠 - 김민홍

2014. 3. 6. 등 뒤로 어둠을 지고 그 여자가 돌아온다 새벽, 날이 밝으면 그 여자의 어둠은 동그랗게 뭉쳐져 그 여자의 가슴 속에 멍으로 숨어있다가 밤이면 다시 온통 은폐된 방으로 풀어져 커피와 섞이고 음악과 섞이는 그 여자의 어둠의 세포를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며 그 여자가 울고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그 여자의 시간 속에 나는 소외된 채 어슬렁거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소외가 내 인생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당연히 소외되어야할 것도 같고 끝내 삶에서 소외되어 혼자 가야할 길을 가늠하다가 갑자기 섬뜩해져 다시 그 여자의 어둠을 들여다 보고 그 어둠에 내 어둠을 대어보기도 하다가 서로 키가 맞지 않는 쓸쓸함을 꿰매다가 쓸쓸함이 내 인생이라는 생각도 잠시하다가 그러다가 그 여자 다시 어둠을 지고 새벽길을 ..

- 그의 애송詩 2021.10.12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

- 그의 애송詩 2021.10.12

맙소寺 - 이용한

2014. 2. 22. 맙소寺 이용한 절로 날이 저물어 모텔 맙소寺를 찾아가는 길짐승 한 마리 눈에 비친 雪經이 그렁하다 눈이 없으면 눈물도 없었겠지 입도 없고 아랫도리도 없는 죽어서 난 佛像한 나무가 될 거야 눈이 내려 진창인 고랑을 짐승이 겨우 희미한 두발로 건넌다 승도 중도 아닌 인생과 즘생의 경계를 지나는 중이다 그에게 생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직립보행이고 먹고 사는 게 공연한 만행이다 길 밖에 버린 무수한 뼈들이 살과 피를 발라낸 명백한 증거다 그러니 이번 세상에선 제발 사랑에 빠지지 않기를 짐승에게 사랑이란 肉食에 다름아닌 빠져서 깊어지지 않기를 저만치.... 불 켜진 맙소寺는 애당초 강물에 빠진 달 같은 것이다 서걱이는 한 잎의 화두이고 구천을 떠도는 물고기자리에 불과하다 그는 오래 생선가시..

- 그의 애송詩 202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