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여행자의 詩 114

驛馬煞 I am Free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 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가자,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 김수영시인의 '아픈몸이'의 부분, 1962.5.30 열일곱, 사춘기 나이에 심하게 열병을 앓으며 움신을 못했다. 살고 싶다는 염원 하나로 밖으로 나와 냉면 한 그릇을 사먹고 역으로 나가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그 후, 나의 병은 씼은듯 나아 신록의 청춘을 맞았다. 그렇다. 역마인생(驛馬人生)은 가둬 놓으면 시름시름 앓는다 갈 곳이 없어도 떠나야한다. 비록 잘 곳이 없어 타관의 역 대합실에서 잠을 자더라도 역마살(驛馬煞)을 풀어 주어야 한다 나는 이 봄에 詩와 음악을 가지고 먼나라로 떠다녔던 나의 지나간 여행을 회상하려한다 다녀온 후, 뭐라고 할 말..

사랑의 시차 - 최영미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 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面璧)한 두 세상. 사랑의 시차 - 최영미 Historia De Un Amor(사랑의 역사)에 대하여 한달동안 음악을 선곡하고 들으며 이제야 나이가 제법 들었다고 '사랑'에 대하여 언급하려니 사랑에 대한 정의를 어느정도 내릴 수 있을것 같다. 우리가..

여행이라는 그리움 - 윤성택

In Night Train 여행이라는 그리움 윤성택 나는 저녁의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든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 객실은 아직 정돈되지 않은 소리들로 분주하다 자리를 찾아 옮겨다니는 발소리. 그리고 덜컥 짐을 얹는 소리. 휴대폰 벨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나는 아직 책장을 펼치지 않고 차창 밖을 바라본다. 저만치 잿빛의 구름떼가 몰려오고 있다. 아니, 그것이 착각이라는걸 나는 곧 깨닫는다 몰려오는 것이 아닌, 우우우 어디론가 몰려가는 구름 떼들. 착각 속에서 나는 아린 기억을 깨문다. 기차가 출발하기도 전 이미 여행은 시작된 것이다. 여행은 덜컹거리며 막 내 기억의 터널을 지난다. [Laurentiu Gondiu]Nostalgic De Ploaie

너는 기차를 타고 떠났다 - 김충규

너는 기차를 타고 떠났다 김충규 너는 기차를 타고 떠났다 이후로 나는 철길에서 서성거렸고 아무 역에서나 기웃거렸다 기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가슴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듯했다 가슴이 깊이 패였다 네 마지막 이미지가 유령처럼 내 영혼의 허허벌판 위로 떠돌아다녔다 내가 늙어가는 동안 아직도 너를 승객으로 태운 기차는 남국의 해변을 가고 있거나 북국의 거친 눈발을 뚫고 있을까 나는 늙어가는데 너는 이별하던 순간의 젊음을 간직한 채 나보다 싱싱한 사내와의 연애를 꿈꾸고 있을까 내 뼈는 침목처럼 단단해져서 내 육체를 기차처럼 견뎌내고 있지만 먼 훗날 기차가 녹슬고 나면 침목들의 간격은 무참히 일그러지겠지 기차는 새벽에도 자정에도 떠나고 일몰에도 떠나지만 내게 돌아오는 기차는 없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면 내 몸을 간..

시간의 동공 - 박주택

The Time of the Pupil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 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죽길죽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안에 너무 많은 자신을 가두고 북적거리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잠이 휘다니, 기억의 풍금 소리도 얇은 무늬의 떫은 목청도 저문 잔등에 서리는 소금기에 낯이 뜨겁다니, 갈기털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

몸속의 몸 - 최승자

몸속의 몸 최승자 끝모를 고요와 가벼움을 원하는 어떤 것이 내 안에 있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부풀어 오르고 다시 가라앉았다 부풀어 오르는 무게 없는 이것 이름할 수 없이 환한 덩어리 몸속의 몸 빛의 몸 몸속이 바다속처럼 환해진다 - 온 몸이 공중으로 떠오를듯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한 차례 추위가 물러가더니 이제 봄날같이 바람이 잠잠하다 떠나고 싶다. 먼 남쪽바다를 찾아서...

모두가 추억이다 - 홍영철

모두가 추억이다 버리지 마라, 모두가 추억이다 세월이 가면 모래도 진흙도 보석이 된다 너의 꿈은 얼마나 찬란했더냐 너의 사랑은 또 얼마나 따뜻했더냐 부는 바람도 내리는 비도 그치고야 말 듯이 아픔도 슬픔도 언젠가는 지칠 때가 올 것이다 - 홍영철의 '모두가 추억이다 멀리 남쪽의 바닷가에서는 새끼를 품은 고래의 울음소리와 동백의 향을 실은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던가! 이제 내 나이가 몇인가... 저 사진은 내 나이 스물여덟살때의 사진. 경남 진주로 출장을 갔다가 사천 비행장의 조종사로 있는 친구를 불러내 남일대 바닷가에서 한나절을 놀다 왔던 사진이다 봄이 오던 시기였다. 바닷바람은 추운데 바지까지 걷어올리다 못해 벗어던지고 한나절 시간을 보냈다 가만이 사진을 들여다보면 저 시절이 언..

Sète 해변 - Georges Brassens

Sète 나는 원래 英詩나 불란서詩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와 정서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詩라 하더라도 가슴에 와 닿질 않는다 더군다나 原詩를 우리말로 번역해 놓았을경우엔 더 가관이다 이건 완전히 삿갓을 쓰고 양복을 입은 느낌이다 그래서 여간해서 외국詩를 브로깅한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번 경우, Georges Brassens 의 Sète 해변을 번역해 놓은 것은 좀 다르다 즉, 어떻게 우리말로 바꿔서 우리 감성에 맞도록 어휘를 바꾸어 놓았느냐? 가 관건이다. 이런 점을 참조하여 아랫詩를 감상해 보자. 주제는 죽음이다. 시인 Georges Brassens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詩를 쓰며 살다가, 죽어서 바닷가 마을, Sète 해변에 묻히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詩다. 나 역시 죽은후..

바다에 버리고 오다 - 기형도

Winter Sea... 바다에 버리고 오다 기형도 1. 도망치듯 바다로 달렸다 그 바다, 구석진 바위에 앉아 울고 싶어서 술을 마셨다 그냥은 울기가 민망해서 술기운을 빌려 운다 울 수 있을 만큼만 술을 마신다. 그러면 바다는 내 엄살이 징그럽다고 덤벼들었다 노을이 질 무렵, 파도가 한 웅큼의 피를 쏟아내었다 바다는 새벽을 잉태하기 위하여 날마다 하혈한다 일상의 저음부를 두드리던 가벼운 고통도 내 존재를 넘어뜨릴 듯 버거운 것이었고 한 옥타브만 올라가도 금새 삐그덕거리는 우리의 화음은 합의되지 못한 쓸쓸함, 그래 가끔은 타협할 필요도 없이 해결 되기도 했지만 나와 함께 아파 할 아무도 없다면 어떠랴 징징대는 감정을 달래느라 늘 신경은 하이소프라노로 울고 끝내는 당도하지 못할 너라는 낯선 항구, 파도가 쓸..

흘러온 사내 - 이용한

흘러온 사내 이용한 마흔이 다 된 사내가 손가락에 묻은 밥풀을 혓바닥으로 핥는다 시켜 먹는 밥을 천천히 식혀서 마감 뉴스가 끝날 때까지 비릿한 선창의 밤을 숟가락으로 뒤적인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 천장에 붙여놓은 물고기 판박이는 간신히 열린 창문 너머로 자꾸만 지느러미를 흔든다 아마도 포구의 철썩이는 것들이 속 좁은 여관의 삶을 흔들었을 것이다 야식 쟁반을 문밖에 내어놓을 때마다 사내는 불륜처럼 저질러 놓은 외로움을 신문지로 덮고 돌아선다 돌아서야만 하는 삶을 지겹도록 살아오지 않았던가 사실 길에서 순교하고 싶은 열망은 늘 길 위에서 저물었다 냉장고 문짝에 붙은 샛별다방과 금강야식 스티커를 손톱으로 긁어내며, 사내는 샛별 같은 배달부와 필경 금강에서 팽목까지 흘러온 어떤 삶을 생각한다 어떤 방에서는 신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