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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구월의 이틀 - 류시화

다시 찾아온 구월의 이틀 류시화 구월이 비에 젖은 얼굴로 찾아오면 내 마음은 멀리 간다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가장 먼 곳 오솔길이 비를 감추고 있는 곳 돌들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곳 내 시는 그곳에서 오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다시 숲에서 보냈다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려 양치류는 몰라보게 자라고 뿌리보다 더 뒤엉킨 덩굴들 기억이 들뜨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누르고 있는 바위들 그곳에 구월의 하루가 있었다 셀 수 없는 날들을 타야만 하는 불씨가 있었다 이곳에 오고 싶었던가 그렇다, 나는 이곳을 떠나왔다 그렇게도 오래 나 혼자 모든 흐름이 정지했었다 다만 어디서 정지했는지 알 수 없었을 뿐 어느 날 밤에는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맑아서 창에 이마를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떤 물결..

- 그의 애송詩 2021.10.15

구월의 이틀 - 류시화

구월의 이틀 류시화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 그의 애송詩 2021.10.15

동유럽 종단열차 - 이병률

동유럽 종단열차 이병률 왜 혼자냐고 합니다 노부부가 호밀빵 반절을 건네며 내게 혼자여서 쓸쓸하겠다 합니다 씩씩하게 빵을 베어물며 쓸쓸함이 차창 밖 벌판에 쌓인 눈만큼이야 되겠냐 싶어집니다 국경을 앞둔 루마니아 어느 작은 마을 노부부는 내리고 나는 잠이 듭니다 눈을 뜨니 바깥에는 눈보라 치는 벌판이 맞은편에는 동양 사내가 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긴긴 밤 말도 않던 사내가 아침이 되어서야 자신은 베트남 사람인데 나더러 일본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을 뿐 그에게 왜 혼자냐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어디를 가느냐 물으려다 가늠할 방향이 아닌 듯해 소란을 덮어둡니다 큰 햇살이 마중나와 있는 역으로 사내는 사라지고 나는 잠이 듭니다 매서운 바람에 차창은 얼고 풍경은 닫히고 달려도 달려도 시간의 몸은 극치를..

- 그의 애송詩 2021.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