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영화 이야기

동양 최고의 美女, 金芝美의 결혼

Chris Yoon 2022. 11. 26. 05:24

 

6,70년대를 휩쓸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배우, 김지미,

그녀는 뛰어난 미모로 당시 여성들에게 '김지미를 닮았다'고 하는 말은 최고의 찬사였다.

그만큼 그녀는 미모면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만큼 독보적인 평가를 받아왔는데 당대의 다른 기존 여배우들을 압도할 만큼 최고의 원탑 이었으며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지금까지 거의 없을 정도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의 영화계는 흑백영화로 후시녹음이었다. 그래서 그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김지미는 미모에만 유명한게 아니고 오직 영화만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김지미의 인생은 영화였다.

그러나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리면서 한국 영화를 부흥시킨 최고의 주역이었던 그녀는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으로 세상을 온통 뜨겁게 만들었었다. 당시 6,70년대에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그녀가 택했던 금지된 사랑은 그녀에게 큰 댓가를 톡톡히 치루게 했다.

 

1세기가 지나도 나오지않는다고하는 미인으로 손꼽히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영화감독 홍성기로 당시 김지미는 소위 길거리 캐스팅을 18살 나이로 당하며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첫 출연을 하며 얼굴을 알리게 된다.

김지미가 얼마나 예뻣는지 그녀가 다니던 덕성여고 골목은 이미 등교시간만되면 새까만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로 골목이 메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김지미는 곧 홍성기감독의 영화 ' 산넘어 바다건너'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세상을 온통 뒤집어놓는다.

당시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게 유명감독과 신인여배우는 영화가 힛트를 하면서 세상의 이야기거리가되고 결혼을 하게된다.

 

 '홍감독이 저보다 12살 많은 늙은 총각이긴 했지만 당시 유명한 감독이었어요. 사실 영화를 찍는건지 현실인지 모를 정도로 어수선하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와중에 결혼식을 치뤘죠.' 그녀는 이야기한다.

 

 

 

둘은 1959년 결혼을 하고 첫 딸을 낳지만 3년 뒤 바로 이혼을 하게된다.

당시 어린 김지미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모르고 결혼을 했던것도 사실이지만 이혼의 다른 사유는 홍성기감독의 첫 칼라영화 제작, 춘향전의 실패였는지도 모른다.

김지미는 당시 '서유기' 영화촬영차 홍콩에 머무르고 있었다.

상대배우가 최무룡이었는데 나이든 홍성기와 또 다른 사랑을 느끼고 연애감정에 빠져들었다.

'결혼 후 국제극장에 속한 당대 최고 영화사에 최무룡씨와 제가 전속 배우가 됐어요. 일주일에 한두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죠. 그 나이에 가정이나 남편이 중요하게 보였겠어요?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이혼에 이르게 되더군요.'

 

남편 홍성기를 볼 시간은 별로 없고 잘 생긴 최무룡과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고 이들을 둘러싼 사건으로 당시 한국사회는 온통 떠들썩했다.

최무룡의 본처 강효실에게 간통으로 고소를 당하고 두 사람은 영창에 갇히게 된다.

거의 매일 만난 셈, 어쨌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러다 1962년 당시 한국 최고의 톱스타 최무룡과 간통 혐의로 함께 구속되었다.
수갑을 찬 두 사람의 행복해 하는 모습에 당시의 언론은 연일 화제가 되었다.
지금 관점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지만, 당시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초대형 스캔들이었다.
결국 1963년 최무룡은 아내인 배우 강효실과 이혼하는데, 이 때 이혼 위자료를 김지미가 지불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위자료인 400만원을 지급하면서 또 다시 화제가 되었다.
당시 400만원은 이루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액이었다.
심지어 6년 뒤 최무룡과 이혼할 때도 김지미가 이혼 위자료를 전부 부담했다고 한다.
당시 여성 혼자 그정도의 재력을 갖고 있기가 힘든 시대였고, 통상적으로 이혼 위자료를 남성이 다 책임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김지미의 위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0대의 여배우가 이 정도의 사건에 연루되면 한국 연예계에서는 퇴출이나 은퇴를 해야했지만 김지미는 그 후에도 변함없이 영화를 찍고 전부인이 낳은 아이를 양육하며 셋집을 전전하면서 건재를 과시한다. 당시 그녀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한편에서는 '당당하게 잘했다'느니 내가 못하는것을 대리만족으로 통쾌하다.'느니 라는 얘기를 편지로 보내오기도 했다.

 

그렇게 김지미와 최무룡은 재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었지만 이도 오래 가지못하고 딸만 남고 아들은 사고로 잃는 비극을 맞으며 7년  뒤 또 이혼하게 된다. 최무룡의 계속되는 영화 흥행 실패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1969년 두 사람은 결국 이혼한다.

그렇게 김지미는 최무룡과 헤어지게 되고 이번에는 11살 연하의 나훈아와 만나게 된다.

당시에 연상연하커플이 드물었기때문에 또 한번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다만 김지미는 훗날에도 나훈아와는 결혼 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데 김지미는 '나훈아가 노래를 잘해서 우리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와서 노래를 몇 번 했죠. 남녀관계니까 육체적 문제가 좀 있긴 있었지. 그러니 아니라고 할 수가 있나요? 그래서 또 공개하게 된거예요.'

나훈아와의 관계는 '연하의 남자와의 긴 연애와 같았다'며 그와의 관계에 선을 그었는데 두 사람은 결혼하지않고 76년부터 82년까지 동거를 했으니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당시 김지미는 세상의 비난을 받으며 '김지미 영화 안보기'라는 된서리까지 맞았는데 대전에서 나훈아에게 일식집까지 경영권을 주며 여장부답게 신탄진 공장을 경영하며 T.V.에 나오는 나훈아를 응원나와서 꼭 '우리 바깥양반'이라는 호칭으로 사는날까지 흔들림없는 면모와 빈틈을 보이지않았다. 역시 대범하고 통큰 여성이다.

 

 

 

하지만 김지미는 나훈아와의 오랜 동거에도 그와 결혼하지 않았는데 둘의 관계는 연인보다 스승과 제자에 더 가까웠다.

나훈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김지미가 예절및 서예등 다방면에 걸쳐 가르쳤기때문이다.

나훈아역시 훗날 회고하며 '김지미는 저를 남자로 만들어준 여성입니다. 하지만 김지미는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보다는 최무룡때 고백했던 것처럼 자신을 잡아줄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을 원했죠. 아마 자신이 원하는 것과 본성 간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후, 김지미는 또 한번의 결혼을 했는데 배우도 감독도 아닌, 심장병 전문의였다.

그리고 오랜 기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결혼 3년째부터 이상이 생겼던 두사람은 11년동안 서로 참다가 결국 이혼하게 된다.

'지지고 볶으면서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게 보편적이고 건전한 가정인데 저는 항상 '네, 그러세요.'라며 살았어요.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습니다.' '나가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이런 대화였죠.

'부부라면 싸움을 하고도 금세 '이리와봐' 하면서 끌어안기도하고 자기가 잘못해놓고 큰소리를 뻥뻥치기도하는데 격식을 차리다보니 거리감만 생기고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분이 '저 늦어요.'라고 하면 저는 '네, 알았어요.'라고 합니다. 몹시 피곤하더군요.

 

김지미는 자기 인생에 대한 깨달음도 남기는데 '살아보니 그렇게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구요. 나이 많은 사람과도 어린 남자랑도 살아보니 남자는 항상 불안한 존재더군요.'

 

'유명하고 파워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가정을 행복하게 이끈다고 생각하면 절대 오산이죠. 결혼은 인간대 인간으로 만났을때, 가장 편한 상대와 해야된다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았네요.'

 

 

 

어릴적부터의 김지미는 자신의 본능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도 있다고 스스로 이야기한다.

일례로 당시 최무룡에게는 갓 태어난 아들 최민수와 딸 3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정이 파괴되는 슬픔과 불안을 겪어야했다.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방의 배우자,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기본적인 진리를 알고있다. 그러나 김지미는 매우 인성이 올바른 여자다.

간통으로 고소를 당했을때 최무룡의 본처는 최민수를 낳고 7일째였다.

김지미는 집을 팔고 재산을 팔아 그 많은 위자료를 최무룡대신 물어주며 동시에 최민수의 양육도 맡았다. 최민수는 당시 리라 초등학교를 다니며 올바른 교육을 받았다. 또한 홍성기의 딸과 최무룡과의 사이에 낳은 딸도 잘 성장시킨것으로 알고있다. 정능집을 영화사로 쓰고 한국 영화사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한 통 큰 여성이다.

그녀에겐 결혼이란 이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남성들은 망서림없이 살아봐야하는 과정과 같은 것이었다.

나이든 김지미는 지금도 아름답다.

 

- Chris Yoon

 

 

김지미 金芝美

본명 / 김명자 (金明子)

출생 / 1940년 7월 15일 (81세) 충청남도 대덕군 북면 석봉리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

신체 / 160cm, 48kg

가족 / 전 배우자 최무룡, 나훈아, 홍성기, 이종구

          슬하 2녀 손녀, 외손주 6명

학력 / 신탄진국민학교 (졸업)
대전여자중학교  → 덕성여자중학교 (졸업)
덕성여자고등학교 (중퇴)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수료)

종교 / 불교가톨릭 (세례명 : 세실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