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영화 이야기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의 熱情的 삶

Chris Yoon 2022. 8. 22. 06:45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은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1942. 스펠바운드(Spellbound ) 아나스타샤( Anastasia)등과 같은 작품으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스웨덴 여배우였다.

스웨덴 출신의 국민배우. 스웨덴어로는 잉리드 베리만이라고 발음한다.
175cm의 큰 키와 아름다운 외모로 1940년대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정도로 연기력도 뛰어났던 배우이다. 심지어 스웨덴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이러한 대기록을 남겼다.

스웨덴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했고, 해당 언어로 모두 연기를 하였다.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은 세기적인 배우라고 말한다.

사실상 1세기에 단 한 명 나오고 명맥이 끊어진 여배우라고 볼 수 있다.

유명한 여배우들은 많았지만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정갈하면서도 정열로 가득찬 눈동자가 반짝이는 배우가 없었다.

굳이 약간의 공통점을 억지로 붙여본다면 모나코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있지만 전혀 느낌이 다른 배우였다.

잉그리드 버그만에게는 순박한 시골처녀의 느낌과 여왕처럼 세련되고 기품있는 분위가가 동시에 있었다.

내가 잉그리드 버그만을 처음 본것은 중학교에 다니면서 학생단체로 가서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다. 어수선한 객석과 잡담이 난무하는 속에서 영화를 감상, 이해하며 받아드릴 수도 없었고 파시스트군에게 부모를 잃고 성폭행을 당한채 머리를 삭발당하고 버려졌다가 게릴라에게 구출되어 파시스트에게 복수를 꿈꾸는 스페인의 시골처녀 마리아를 분석하고 가슴에 끌어들이면서 볼 수도 없는 상황과 연령대였다.

그리고 그당시의 나이로는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나름대로 평을 할 정도로 일가견이 있지도 못했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다시 상영된 이 영화를 보고 파시스트군에 부모를 잃고 성폭행을 당한채 머리를 삭발당하고 버려졌다가 게릴라에게 구출되어 파시스트에게 복수를 꿈꾸는 스페인의 시골처녀 마리아를 눈여겨 보게 된다.

가위로 모두 잘렸다가 이제 마악 자라는 쑥대머리, 맑고 아름다운 눈이었지만 이따금씩 지난날의 악몽을 떠올리는 공포어린 눈동자. 아무튼 그녀는 특별난 존재였다. 보통 산골처녀로 분장을 시켜놓으면 어딘가 한구석은 결코 손댈 수 없는 세련된 면을 숨길 수없다. 그러나 잉그리드 버그만에게서는 그저 순진하고 어여뻣던 산골처녀의 순수 자체가 묻어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사내아이처럼 보이시하기도 하고 약간 촌스럽기도 한 얼굴이었다.

그후 나는 그녀가 출연한 잔 다르크 - Joan of Arc (1948년)를 보며 그녀의 깊숙한 곳에 잠재해있는 남성성을 보기도 했다.

버그만은 평생 잔 다르크를 연극에서 두 번, 영화에서 두 번 총 네 번 연기했다. 어릴 때부터 평범한 소녀가 영웅이되는 잔 다르크의 서사를 사랑했다고 하며 잔 다르크를 연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처음 《잔 다르크》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가 잔 다르크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되었으며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인 동레미, 오를레앙, 랭스와 루앙을 방문했으며 동레미의 명예시민이 되기도 했다. 버그만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잔 다르크의 환생처럼 여겨서 당황했을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또한 잔 다르크의 고향 동레미를 굉장히 사랑했다고 한다. 다만 이 영화를 찍을 때 잉그리드 버그만이 이미 30대를 넘어서 10대 소녀인 잔 다르크를 연기한 게 어색하다는 평도 있다.

 

그녀는 고전적미인이다.

아무리 모자를 씌우고 하이패션을 입혀놔도 그의 얼굴, 눈동자와 입술, 그의 목소리는 고전이다.

따라서 무척이나 우아한 배우이다.

175cm의 큰 키와 금발벽안,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고전적인 외모의 소유자다.
'미국 초기 잉그리드의 작품중 일부는 걸작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무엇을 하던지 항상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녀의 얼굴,피부,눈,입,특히 입.등이 매우 이상한 광채와 엄청난 에로틱한 매력이 있었으며. 그것은 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그녀의 입과 피부, 눈과 관계가 있습니다.

훗날 헐리웃에서 그녀를 평가된 말이다.

 

생애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톡홀름에서 스웨덴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3살 때는 아버지마저 여의어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

그녀는 아버지의 렌즈 앞에서 춤추고, 옷을 입고, 연기하는 것을 즐겼다. “나는 아마도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많은 사진이 찍힌 아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가 13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마저 위암으로 사망했다 10대 초반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돌봄을 받아야할 유년시기의 상흔이 큰 트라우마가 되었으며 그녀스스로도 ‘통증을 평생 안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후 삼촌과 그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17세 때 스웨덴 최고의 명문인 왕립 드라마 스쿨(Dramatens elevskola)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영화계로 투신해 스웨덴과 독일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버그만의 어머니의 성이 애들러(Adler)인 것 때문에 독일계 유대인 혼혈이 아닌가 하는 말이 나왔고, 버그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었으나 실제로는 스웨덴-독일 혼혈이 맞다.

 

유럽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버그만의 배우 생활은 1936년에 출연한 《간주곡》으로 새 길이 열리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이 《간주곡》을 보고 버그만을 눈여겨보아 미국으로 초청한 것이다. 셀즈닉의 초청에 응한 버그만은 미국으로 건너와 《간주곡》의 리메이크작 《이별》(1939)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데뷔한다.

 

영화 가스등(Gaslight)1944외 그녀의 수상작들

인터메조에서 인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 년 8 월 29 일 ? 1982 년 8 월 29 일)을 본 미국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슬렌즈닉은 그녀를 고용하여 영화의 영어 리메이크에 출연시켰다 1939년이 영화가 성공한 후 제작자 슬렌즈닉은 버그만과 다년간의 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의 성공으로 버그만은 빠르게 본격적인 영화배우로의 길로들어선다 그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For Whom the Bell Tolls (1943)에서 게리쿠퍼와 공동 주연을 맡았으며 가스라잇(Gaslight (1944) 에서 남편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젊은 아내로서의 연기로 큰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조지 쿠커( George D. Cukor)가 감독 한이 영화에서 그녀는 첫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다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
할리우드 진출을 했지만 유럽에서 건너온 여배우를 써주는 스튜디오는 없었고, 버그만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출연 외 변변한 출연작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1942년 출연한 《카사블랑카》로 일약 스타가 되고 이후 찍은 영화들 역시 호평을 받으며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들 중 한명이 되었다. 당시 버그만의 인기는 만인의 연인 수준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를 영화화할 때에는 헤밍웨이가 직접 주인공 마리아 역으로 버그만을 지명했다고 한다. 이 시기 앨프리드 히치콕과 여러 영화를 찍었으며, 1944년 출연한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미국뿐만 아니라 모국 스웨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활동을 하며 수많은 명작들에서 명연기를 선보였다. 말년까지 영화, 연극, TV 모든 분야에서 활발한 연기활동을 펼쳤으며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을 모두 수상하였다. 통산 아카데미상 7회 노미네이트 및 3회 수상, 에미상 2회 수상, 토니상 1회를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카사블랑카》(1942),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 《가스등》(1944), 《잔 다르크》(1948), 《이탈리아 여행》(1954), 《아나스타샤》(1956), 《오리엔트 특급살인》(1974), 《가을 소나타》(1978) 등이 있다.


그녀의 작품을 다양화하기 위해 버그만은 브로드 웨이무대에서 조안 오브 롤레인(Joan of Lorraine )에 출연했다. 그 이후 다른 도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1948년 드라마 Joan of Arc 에서 타이틀 캐릭터를 연기했다 .이 영화와 그녀의 알프레드 히치콕 ( Under Capricorn)과의 마지막 협업은 영화 관객이나 비평가들에게 특별한 인상을주지 못했다. 처진 경력을 되살리기 위해 버그만은 이탈리아 감독인 로베르토 롯셀리니( Roberto Rossellini)에게 그와 함께 일할 기회를 요청하는 편지를 쓰게 된다. 
버그만은 로셀리니의 작품 독일 영년을 보고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로셀리니 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일어는 아직 잊지 않았고, 프랑스어는 썩 잘하지는 않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버그만은 정말로 로셀리니의 곁으로 달려가 로셀리니의 영화에 출연하며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로셀리니가 유부남이었고 버그만 역시 남편과 딸이 있는 유부녀였다는 것. 이 불륜 사건은 1940년대 후반 미국에 파란을 일으켰고 거센 비난 여론이 일으켰으며 버그만은 결국 할리우드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당시에는 지금의 할리우드처럼 유명인의 스캔들에 그대로 넘어가주지 않았고, 유명인의 싱글맘이나 혼외자녀는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에는 배우 경력을 위협했었다.또 버그만의 이미지가 너무 좋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진 할로 등 섹스 심벌 이미지나 좀 덜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배우의 스캔들과 달리, 버그만은 성녀 잔 다르크와 수녀처럼 청순하고 고결한 역할을 했던 국민 여배우의 타락이니...관중들은 너그럽지않았다.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었을 때도, 복귀하여 할리우드에 돌아왔을 때도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준 것은 배우 캐리 그랜트 단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때 앨프리드 히치콕도 버그만에게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었다. 스캔들이 터지기 전까지 버그만은 히치콕을 높이 평가했었고 히치콕 역시 버그만을 자신의 작품들에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특별하게 대우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감독을 찾아 떠나버리니 배신감이 적지 않았을 듯하다. 이후 그레이스 켈리에게로 페르소나의 자리가 넘어갔지만 보통 버그만 정도의 임펙트를 주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로셀리니와 함께 영화를 찍었으나 연달아 흥행에 실패했다. 다만 흥행에 실패했을 뿐이지 이때 찍은 《스트롬볼리》나 《이탈리아 여행》 같은 영화들은 소위 모더니즘 영화의 시초라 불리며 재평가를 받게 된다. 흥행이 거듭 실패한 것도 있었고 로셀리니는 버그만이 자신 이외의 감독과 작업하는 것을 매우 반대해서 둘 사이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스캔들과 역경

버그만은 영화 스트롬볼리(Stromboli )(1950)를 롯셀리니와 작업하는 동안 두 당사자는 국제적인 스캔들이 터졌고 당시 각자 다른 사람들과 결혼한 상황이었다. 당시 피터 린즈스텀과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롯셀리니의 아이를 임신한 버그만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한다 버그만은 이혼이 확정되기 며칠전 아들 로베르토를낳았다. 그녀는 곧 감독 롯셀리니와 결혼했지만 스캔들로 인한 이미지 손상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미국의 도덕주의자들과 팬들은 이전 우상이 몰락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분노를 표명하고 그녀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꽤 오랫동안 불행했지만 대중은 이전에 잉그리드의 성스러운 이미지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심지어 콜로라도의 에드윈 C. 존슨 상원의원은 잉그리드를“악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으로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했다.롯셀리니와 그 이후 몇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했지만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1958년 롯셀리니와 이혼하기전 딸 이사벨라와 이소타등의 두 자녀를 낳았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컴백과 아카데미상 수상

버그만은 로셀리니가 촬영으로 인도에 간 사이 할리우드의 제안을 받아 1956년 《추상(아나스타샤)》에 출연하며 6년만의 할리우드 복귀를 하였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버그만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는데 감독 아나톨 리트박이 버그만이 아니면 작업을 안하겠다고 선언을 하여 촬영할 수 있었다. 버그만은 《아나스타샤》로 두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성공적인 미국시장 복귀를 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1957년 로셀리니와 이혼하였다. 로셀리니는 잇따른 실패와 더불어 몰락해 제작비 지원을 못 받고 나중엔 텔레비전 연출가로 머물다가 사망했다.

 

불행한 결혼 생활

버그만은 1958년 파리에서 활동하는 스웨덴인 연극 연출가 라스 슈미트(Lars Schmidt)와 세번째 결혼을 하면서 로마에서 파리로 거쳐를 옮기고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연극에 많이 출연하였으며 전세계 순회 공연을 하여 토니상 등을 수상하였다. 세번째 남편과는 1975년 이혼하였고 이혼 후에는 런던으로 다시 거쳐를 옮겼다.

 

영화'성모 마리아의 종 (The Bells of St. Mary’s )1950

조지 픽(Gregory Peck)의 Spellbound (1945 )와 캐리 그란트( Cary Grant)의 Notorious (1946)에서 스파이 역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1945년에 The Bells of St. Mary 's 에서 Bing Crosby 반대편 수녀역을 맡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1974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Orient Express Murder)에서 또 다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잉그리드 버그만은 유방암진단을 받았으며 그녀는 질병과의 싸움중에도 일하기를 멈추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1978년 뮤지컬 드라마 장르 영화 ‘가을 소나타(Autumn Sonata)에 출연했다 그리고 1982년 티브이 영화시리즈 골다(Golda)에서 전설적인 이스라엘 지도자골다 미어(Golda Meir)역을 맡아 마지막 연기를 한다 골다 미어역으로 레이브와 에이미상을 수상했다

 


1972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으나 연기에 매진, 1974년 출연한 《오리엔트 특급살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78년에는 마지막 영화 출연작인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에서 명연을 펼쳐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다.

세번째 남편 라스 슈밋

정확히 67세 생일이던 1982년 8월 29일에 사망했다. 그것도 친구들과 파티를 개최한 뒤에였다. 유작은 텔레비전 영화였던 《골다라는 여인》으로 골다 메이어에 대해 그린 영화였고 그녀가 맡은 배역은 당연히 골다 메이어 역이었다.

버그만은 1982년 8월 29일 영국 런던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 몇년전 이혼한 영화제작자인 세 번째 남편 라스 슈밋(Lars Schmidt)이 끝까지 그녀를 지켜주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고전 카사블랑카를 포함하여 50편 이상의 영화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딸 피아 린즈스텀( Pia Lindstrom)은 텔레비전 기자이자 배우가되었고 이사벨라 롯셀리니(Isabella Rossellini)는 여배우로서 모델로서 다양한 경력을 쌓아가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딸 이사벨라 롯렐리니와 함께한 잉그리드 버그만

첫 남편 피터 린드스트롬과의 사이에서 딸 피아 린드스트롬을 두었고,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사이에서 아들 로베르티노 로셀리니, 쌍둥이 딸 잉그리드 이소타 로셀리니와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두었다. 이사벨라 로렐리니는 엄마를 닮아 상당한 미녀로 모델 겸 여배우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랑콤의 첫 전속모델로 1983년부터 1996년까지 활동하였다. 이사벨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아내이기도 했으며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도 출연하였다. 버그만의 손녀이자 이사벨라의 딸 엘레트라 로셀리니 역시 랑콤 모델로 활동 했다.

 

주요 작품

간주곡 - Intermezzo (1936년)
달러 - Dollar (1938년)
여자의 얼굴 - En kvinnas ansikte(1938년) ※ 1941년 할리우드에서 조안 크로포드, 멜빈 더글러스 주연으로 리메이크
하룻밤 - En enda natt (1938년)
이별 - Intermezzo : A Love Story (1939년)
여섯째 달밤 - Juninatten (1940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 Dr. Jekyll and Mr. Hyde(1941년)
카사블랑카 - Casablanca (1942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For Whom the Bell Tolls (1943년)
가스등 - Gaslight (1944년)
세인트 메리의 종 - The Bells of St. Mary 's (1945년)
백색 공포 - Spellbound (1945년)
사라토가 본선 - Saratoga Trunk (1945년)

스펠 바운드(Spellbound)1945
오명 - Notorious (1946년)

악명 높은Notorious (1946)
개선문 - Arch of Triumph(1948년)
잔 다르크 - Joan of Arc (1948년)
염소자리 - Under Capricorn (1949년)
스트롬볼리 하나님의 땅 - Stromboli(1950년)

유로파 51 - Europa '51 (1952년)
우린 여자 - Siamo donne (1953년) ※옴니버스 영화. 로셀리니 편에 출연
이탈리아 여행 - Journey to Italy (1954년)
불안 - La Paura (1954)
사랑 많은 여자 - Elena and Her Men (1956년)
아나스타샤 - Anastasia (1956년)
무분별 - Indiscreet (1958년)
여섯 번째 행복 - The Inn of the Sixth Happiness (1958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Goodbye Again(1961년)
방문 - The Visit (1964년)
노란 롤즈 - The Yellow Rolls - Royce (1964년) ※ 옴니버스 영화.
선인장 꽃 - Cactus Flower (1969년)
봄비 속을 - Walk in the Spring Rain(1970년)
외침과 속삭임 - Viskningar och Rop (1972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 - Murder on the Orient Express(1974년)
가을 소나타(Autumn Sonata)1978
골다라는 여인 - A Woman Called Golda (1982년) ※ 텔레비전 영화


 - Chris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