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영화 이야기

안소니 퀸 (Anthony Quinn)유감 [遺憾 / regret ]

Chris Yoon 2022. 8. 24. 01:21

우리가 보는 영화들은 영화로 제작되기 이전, 원작의 캐스팅을 위해 이 세상의 수많은 얼굴들중 한 사람을 찾아내어  원작속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것이 보통이다.

원작의 이미지에 따라 배우가 운동으로 체중을 조절, 또한 평소 자료가 남아있다면 행동이나 습관, 버릇등을 캐치하여 캐릭터를 완성시킨다.

그런데 우연히 한 배우를 보았는데 한 작품을 떠올리며 '아. 이 배우...!' 할 정도로 딱 맞는 배우의 모습이 있었다.

바로 안소니 퀸 (Anthony Quinn)의 얼굴이다.

안소니 퀸 (Anthony Quinn)의 얼굴은 천의 얼굴이라고 할 수있을 정도로 나오는 역마다 적격이다.

안소니 퀸 (Anthony Quinn)은 젊은시절 지성이나 품위라곤 찾아 볼 수도 없고 그저 막돼먹은 불량자나 양아치군단에 속하는 외모였다. 그런 그가 나이가 들면서 내적, 외적 명품의 연기를 발휘할 적에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고 볼 수있다

 

 

 

사실 그의 과거 어린시절부터의 행로도 별다름 없었다

안소니 퀸은 1915년 멕시코의 치와와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명했던 멕시코의 혁명군 판초 빌라 휘하에 있던 아버지가 혁명이 와해된 후 미국으로 이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 로스엔젤스에 정착했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졸지에 가장이 되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허드레 잡일을 전전하던 안소니 퀸은 그의 최대의 약점인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 배우학원에 들어갔다가 연기에 빠져들게 된다. 18세에 처음 연극 무대에 섰고 21살 때 파라마운트사의 단역 배우 모집에 응시해 영화에 데뷔했다. 당시 유명 감독인 세실 B. 데밀 감독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데밀 감독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연기자의 길에 오르게 됐다.

 

 

내가 처음 안소니 퀸 (Anthony Quinn)의 영화를 본것은 학생단체로 갔던 에스키모인들의 이야기 <바렌>이었다.

(원제 / The Savage Innocents (야생의 순수), 1960 제작 )

그때 까지도 안소니 퀸의 존재를 몰랐었다. 그저 영화를 찍은중에 에스키모 한 사람인줄 알았다.

영화속에는 광활한 빙산세계의 이누크족과 피터오톨, 다니요코 등 유명배우들도 나왔는데 그때까지도 안소니 퀸 (Anthony Quinn)의 존재감은 없었다.

그후, 나바론 요세 (The Guns Of Navarone, 1961), 페세이지(The Passage , 1979 제작)등에서 유명배우들 틈에 끼어 얼굴을 알리는 3류 흥행배우에 지나지않았다.

 

 

그렇던 안소니 퀸 (Anthony Quinn)이 달라졌다.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 1954>에서 천사처럼 순진한 소녀 젤소미나를 울리는 난폭한 차력사 잠파노, <노틀담의 꼽추, 1965>에서 흉측한 몰골의 종지기 콰지모도, <희랍인 조르바, 1964>, 아라비아의 로렌스, 바라바,  25시, 타고난 낙천성으로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 농부 조르바 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된다

 

 

1940년대 반공극우주의 열풍으로 살벌하게 변한 헐리웃을 떠나 뉴욕 브로드웨이로 무대를 옮긴 안소니 퀸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말론 부란도가 했던 코왈스키 역으로 호평을 받아 엘리아 카잔 감독의 눈에 들었다. 1952년 카잔 감독이 연출한 <혁명아 자파타>에서 자파타의 조력자로 출연해 처음으로 오스카를 수상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5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네오 리얼리즘으로 각광받던 펠리니 감독의 <길>에 차력 곡예사 잠파노로 출연해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안소니 퀸은 <열정의 랩소디, 1956>에 커크 더글라스(고호 역)와 함께 폴 고갱 역으로 출연했는데 커크 더글라스보다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1950~60년대가 안소니 퀸의 전성기였다. <노틀담의 꼽추, 1965>,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 등에서 선이 굵은 남성으로 각인시킨 그는 <희랍인 조르바, 1964>를 통해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섰다. 그리스 민속 무용인 조르바의 춤은 지금까지도 플러시몹의 빈번한 소재로 수많은 동영상이 소개될 정도이다. 이런 안소니 퀸에게 아카데미 위원회는 1987년 평생공로상인 세실 B. 데밀상을 헌정했다.

 

 

 

앤소니 퀸은 1952년 <혁명아 사파타>에서 에우페미오 사파타 역, 1956년 <열정의 랩소디>에서 폴 고갱 역으로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을 2회 수상했다.
1940년대에는 주로 이민족 악역을 맡았던 퀸은 1950년대 브로드웨이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공연에서 말론 브랜도 대신 스탠리 코왈스키를 연기함으로써 새 출발을 했다. 그는 전기 영화 <열정의 랩소디>에서 반 고흐의 친구이자 화가인 폴 고갱 역을 맡아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퀸은 타히티 여인들을 그린 에로틱한 그림으로 유명한 정열적인 화가에 적격이었다. 퀸은 이들 작품에서 아카데미상을 탈 만큼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면서 주연을 맡기 시작해 순박하고 남성적인 스타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앤소니 퀸은 특이한 외모와 얼굴형, 약간 쉰 소리의 목소리로 다른 여배우들과 조화가 되지 않을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기후였음을 알게된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 1954>에서는 여주인공을 감안해서 안소니 퀸이 그렇게 보여야할 이유가 있었다하더라도

비르나 리지와 공연한 25시(The 25th Hour , 1967), 소피아로렌, 지나롤로 브리지다, 안나 마냐니, 다니 요코 등 많은 여배우들과 공연을 하면서도 더없이 좋은 조화를 보여줬다.   

 

 

그러더니 끝내는 상상을 초월한 캐스팅이 나왔다.

잉그릿 버그만과 공연한 <봄비, A Walk in the Spring Rain,1970>가 도저히 상상을 못하겠다.

제목만 들어봐도 <봄비>는 멜로이다

잉그릿 버그만은 단아함의 결정 그 자체로 멜로의 여왕이 아니던가!

그러나 앤소니 퀸은 사건을 주제로 몰고다니는 영화였지 절대 멜로는 없었다

 

앤소니 퀸의 연기와 목소리가 잉그릿버그만과 어느정도 맞았을런지가 궁궁하다.

나는 이 영화를 끝내 못 보았다.

 
 

 

그는 세계인물사전에 영화배우, 화가, 작가로 소개될 정도로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회화와 함께 조각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는데 198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선포 4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에 그의 그림이 실릴 정도였다. 퀸은 우리나라에도 몇 번 방문했는데 1998년 조각가인 아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서 작품전을 열어 국내 팬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안소니 퀸의 노익장은 해외 토픽에도 자주 등장했다. 첫째 부인인 캐서린 드밀과의 사이에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고 캐서린과 사별한 뒤 재혼한 졸란다와 31년을 살면서 세 자녀를 더 가졌다.

1997년 82세의 나이에 40세 연하인 비서 케시 벤빈과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벤빈과는 이미 동거 중이던 1993년 78세의 나이에 딸 안토니아를 낳아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입장이 곤란했던지 안소니 퀸은 막내딸을 아들인 던컨 퀸의 양녀로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세 번의 결혼과 함께 9남 4녀의 자식을 둔 그는 보스턴에서 폐렴 치료를 받던 중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그의 뜨거운 삶에 박수를 보낸다.

 

 

사막의 여인 (Desert Lady) / 대리석(30.5x61x35.5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