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사람들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VI - 암살

Chris Yoon 2022. 5. 16. 01:33

케네디 대통령은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쪽 후보는 애리조나 주 상원의원인 배리 골드워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골드워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규모 개혁입법을 밀어붙일 힘이 되는 국민적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계획에 한 가지 장애가 되었던 것은 부통령 존슨의 고향인 텍사스 주의 주지사 존 B. 코널리와 상원의원 랠프 야버러(둘 다 민주당 인사) 사이의 불화였다.

이 두 사람의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은 이 두 사람과 함께 텍사스 주를 순회하기로 결정했다.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케네디 대통령과 재클린 케네디는 무개차(無蓋車)를 타고 댈러스 시 중심가를 관통해 천천히 자동차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12시 30분 한 저격범이 이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총탄 2발이 대통령의 목과 머리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파클랜드 메모리얼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곧 사망했다.​

당시 첫발은 빗나가 길바닥을 맞췄고 두번째 총탄이 케네디의 목을 관통해 앞좌석에 타고 있던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까지 부상을 입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바로 옆에 앉아있던 재클린이 이상함을 인지하는 순간 3번째 총성이 발사 되었고 이는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향했다

 

이들이 탔던 링컨 켄티넨탈 차량은 특수 제작된 차량으로 방탄 기능이 있었지만 퍼레이드를 위해 지붕을 열어둔 상태였기 때문에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총격을 입은 후 재클린이 보닛으로 올라타는데 반사적으로 케네디의 머리에서 튄 파편을 잡으려고 한 행동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사고 직후 대통령을 태운 차량은 근처 병원으로 이동하였고 30분 후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되었다

사건 약 한시간 후 미국 정부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발표하였다

 

이때 체포된 암살범은 자신은 희생자라고 주장하였고, 감옥으로 옮겨지는 도중 한 남자에 의해 살해당하는 등

석연치 않은 상황으로 인해 암살자나 배후에 대해 여러가지 의혹들과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이 암살 사건 이후 뉴욕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딴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건 당시 영부인 재클린의 모습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당시 샤넬의 핑크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옷을 갈아입지 않고 피 자국이 그대로 있는 채로 병원으로 이동했다

 

사망선고를 받은 후에도 재클린은 이 옷을 갈아입길 거부했고, "그 사람들이 잭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보길 원한다" 말했다. 또한 얼굴과 손의 피를 씻은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재클린은 이 복장 그대로 부통령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할때 곁에 있었고 에어포스원에 탑승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 당시 그녀의 피로 얼룩진 분홍식 투피스를 기억하고 있다

이 옷은 1964년 미국 국가 기록원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재클린은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 후 2주간 백악관에 머물렀다

존슨 대통령은 재클린의 문화 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높이 평가해 프랑스 대사직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거절하였다

 

재클린은 백악관을 나오게 되었고 그녀와 아이들은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64년 1월 재클린은 TV를 통해 많은 국민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자신과 아이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조지타운의 집을 처분한 후 맨해튼의 펜트하우스를 구입했다

 

코널리 주지사는 중상을 입었지만 회복되었다. 같은 날 오후 2시 38분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24세 된 댈러스 시민인 리 하비 오즈월드가 저격범으로 체포되었다. 이틀 뒤 오즈월드는 댈러스 경찰서 지하실에서,

현지 나이트클럽 경영인 잭 루비의 총에 맞아 죽었다.​

 

 

댈러스 암살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오후 12시 30분, 중부 표준시 (CST)에 댈러스에서 암살당했다 . 그는 자유당인 랄프 야보로우(Ralph Yarborough )와 던 야보로우(Don Yarborough) 사이의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텍사스를 방문했다. 댈러스 시내를 통과 하는 대통령 전용 차량 행렬에서 그는 등에 한 번 총을 맞았고, 총알은 목을 통해, 한 번은 머리에 총을 맞았다. 케네디는 응급 치료를 위해 파크랜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30분 후 오후 1시( CST )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의 나이 46세, 재임 기간은 1,036일이었다 . 총격을 가한 텍사스 학교 도서 보관소의 오더 필러인 리 하비 오스왈드( Lee Harvey Oswald )는 경찰관 JD 티핏 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후 케네디 암살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자신이 뚱뚱 하다고 주장하면서 누구에게도 총격을 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잭 루비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가 기소되기 전인 11월 24일. 루비는 오스왈드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루비는 유죄 판결과 사형 선고에 대해 성공적으로 항소했지만 새로운 재판 날짜가 설정되는 동안 1967년 1월 3일 병에 걸려 암으로 사망했다.

 

 

케네디 암살의 음모론과 진실

 

존슨 대통령은 암살을 조사하기 위해 얼 워렌 대법원장이 의장 이 되는 워렌 위원회를 만들라는 행정 명령을 신속하게 발표했다. 위원회는 오스왈드가 케네디를 살해하는 데 단독으로 행동했으며 오스왈드가 어떤 음모에도 가담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이 조사의 결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암살은 국가에 미친 영향과 그에 따른 정치적 반향으로 인해 미국 역사에서 중추적인 순간으로 입증되었다 . 2004년 폭스 뉴스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6%가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74%는 은폐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2013년 11월의 갤럽 여론 조사 에 따르면 61%가 음모를 믿었고 30%만 오스왈드가 혼자 했다고 생각했다. 1979년 에 암살에 관한 미국 하원 선택 위원회는 음모론에 대해 위원회의 1/3이 반대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 결론은 주로 총격 사건의 오디오 녹음을 기반으로 했다. 그 후, FBI의 기술 서비스 부서와 특별 임명된 국립 과학 아카데미의 조사 보고서위원회는 "신뢰할 수 있는 음향 데이터는 두 번째 총잡이가 있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법무부는 케네디 암살에서 "음모론을 뒷받침할 설득력 있는 증거를 확인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오즈월드

미국 연방 최고법원장인 얼 워런이 주도하는 대통령 직속 조사위원회는 저격범 오즈월드나 오즈월드의 살해범 잭 루비, 두 사람 모두 케네디 대통령을 살해하려는 국내 또는 해외의 음모와 연관되어 있지 않으며, 오즈월드는 단독범임을 밝혀냈다.

 

1963년, 집권 3년차이자 재선 출마를 1년 앞두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은 당시 자신의 지지율이 낮은 텍사스주 댈러스로 유세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고, 그 해 11월 22일, 영부인 재클린과 함께 에어포스원을 타고 댈러스에 도착했다. 그는 준비된 링컨 컨티넨탈 차량을 타고 댈러스 시내인 딜리 플라자 인근으로 향했는데 오후 12시 30분 경, 총성이 딜리 플라자에 울려 퍼졌다.

첫 발은 빗나가 길바닥을 맞췄으나 또 다시 총성이 울려 퍼졌고, 두 번째 총탄이 케네디의 목을 관통한 이후, 앞좌석에 있던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까지 부상을 입혔다. 옆좌석에 앉아있던 재클린 케네디 여사는 남편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남편에게 손을 뻗는데 이때 3번째 총탄이 발사, 목을 부여잡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해버렸다. 병원 도착 당시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케네디 대통령을 태운 차 내부는 피로 흥건했다고 한다. 링컨 컨티넨탈은 특수 제작된 차량으로 방탄 기능이 있었지만, 퍼레이드를 위해 지붕을 열어둔 상태였기 때문에 방탄 기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머리를 저격당한 직후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차량의 후방 보닛으로 올라타 정신없이 도망가는 듯한 장면이 있는데 뇌조각을 줍기 위해서라거나 뒤에서 올라타는 경호원을 잡아주기 위함이라는 일부 의견이 있기도 하다.

대통령을 태운 차량은 급히 인근에 위치한 파크랜드 메모리 병원에 도착했고, 뒤이어 린든 B. 존슨 부통령이 병원에 도착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30분 가량 호흡이 붙어있었지만 결국 과다출혈로 숨졌다. 세 번째 총탄이 두개골을 부숴버리고 뇌의 상당 부분을 날려버렸기 때문에 운 좋게 살았다 해도 식물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 정부는 사건이 벌어진 지 약 1시간 후인 오후 1시 30분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것을 알렸고[3], 경찰과 FBI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엘름가 교과서 건물을 포위, 건물 6층에서 탄피 3개와 암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 총기를 발견했다

 

 

리 하비 오즈월드와 그가 사용했던 이탈리아제 Carcano M91/38 라이플

경찰은 대대적으로 암살범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사건 발생 2시간쯤 뒤 근처 극장에 숨어있던 교과서 보관 직원이었던 미합중국 해병대 출신의 리 하비 오즈월드(Lee Harvey Oswald)를 암살 혐의로 체포했다. 그러나 오즈월드는 자신의 범행 사실을 부인함과 동시에 "나는 희생양이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오즈월드는 이틀 뒤 경찰서에서 감옥으로 압송되던 도중 댈러스의 나이트클럽 경영자 잭 루비(Jack Ruby)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 살해 장면도 TV에서 생중계되었다. 이 잭 루비는 마피아와 잘 알고 있는 자였는데, 이 남자 역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지병인 암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2개월만에 감옥에서 병사한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자 의회는 당시 연방 대법원장인 공화당원 일 워렌을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 통칭 워런위원회(Warren Commission)를 발족, 케네디 암살에 대해 조사하게 했다. 워런 위원회는 총알은 암살 현장 옆에 있는 교과서 배급 건물(Texas School Book Depository) 6층에서 발사되었으며, 오즈월드의 단독 범행이라고 결론냈다. 특히 루비와 오즈월드의 연결점을 조사했으나 둘은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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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다한 후에도 인기가 높았던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1963년 11월 22일 댈러에서 암살당했다. 케네디가 사망하자 부통령인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이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전 미 해병대원인 리 하비 오스왈드는 암살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이틀후 잭 루 에게 총에 맞아 사망했다. 실상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FBI와 워렌 위원회는 모두 오스왈드가 단독으로 행동했다고 결론지었다. 케네디가 사망한 후 의회는 1964년 민권법 과 세입법을 비롯한 그의 제안중 다수를 제정했다. 운명이 다한 대통령임에도,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의 여론 조사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의 사생활은 1970년대에 그의 만성 질환과 마릴린 몬로와의 관계에 대한 대중의 폭로이후, 상당한 지속적인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 케네디는 가장 최근에 암살된 미국 대통령이자 가장 최근에 사망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家의 저주

 

로버트 에프 케네디

1968년 6월 5일  로버트 F.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은 캘리포니아 민주당 대선 경선 에서 승리한 날 밤 로스앤젤레스 의 앰배서더 호텔 에서 Sirhan Sirhan 에게 총 을 맞았다 . 로버트는 다음날 아침에 사망했다.

 

데이비드 에이 케네디

1984년 4월 25일 - 데이비드 A. 케네디는 플로리다 팜 비치 호텔 방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 David는 그의 아버지가 가족의 호텔 방에서 라이브 TV에서 암살되는 것을 보았을 때 12살이었다. 교통사고 후 David는 진통제를 남용하기 시작했고 어린 시절 내내 해독 시설을 들락날락했다. 데이빗은 사망한 날 방금 뇌졸중을 앓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팜 비치에 있었다.

 

마이클 르모인 케네디

1997년 12월 31일 - 마이클 르모인 케네디가 콜로라도 주 아스펜에서 나무 에 부딪힌 후 스키 사고로 사망했다 .

 

존 에프 케네디 Jr.

1999년 7월 16일  John F. Kennedy Jr.가 조종 하던 비행기가 매사추세츠 주 Martha's Vineyard 해안 에서 대서양에 추락하여 사망했다 . 추락은 조종사의 실수와 공간적 방향 감각 상실로 인한 것이었으며 그의 아내 와 며느리도 배에 타고 있었다.

 

카라 케네디 , 로버트 케네디의 부인.

2011년 9월 16일 - 카라 케네디가 워싱턴 DC 헬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카라는 9년 전 폐암에 걸렸다가 오른쪽 폐 일부를 절제한 후 회복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밖의 케네디 일가

 

2012년 5월 16일  마리 리처드슨 케네디(Mary Richardson Kennedy)는 뉴욕주 웨체스터 카운티의 베드 포드(Bedford)에 있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2019년 8월 1일  로버트 F. 케네디의 손녀인 시얼샤 로이신 케네디 힐 이 케이프 코드의 매사추세츠 하이애니스 포트 에 있는 케네디 화합물에서 우발적인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

2020년 4월 2일 - 마에브 케네디 맥킨( Maeve Kennedy McKean )은 체서픽베이(Chesapeake Bay) 에서 짧은 카누 여행을 하던 중 8살 난 아들 Gideon과 함께 사라졌다. 매에브의 시신은 4일 후 다이버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기디온의 시신은 이틀 뒤인 4월 8일에 발견되었다. 미국은 Maeve가 아들의 공을 되찾기 위해 노를 저었고 바람과 조류가 카누를 뒤집었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