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사람들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III - 대통령이 된 기자

Chris Yoon 2022. 5. 13. 01:47

 

대학 졸업 논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다

 

그는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다. 하버드대학교 4학년이던 1940년에 그가 쓴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입체적이면서도 생생하게 풀어낸 덕분에 전쟁이 터진 뒤 수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케네디가 하버드의 상급생이었을 때, 그는 학업에 더욱 진지하게 임했고 정치 철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갔다. 1940년 케네디는 뮌헨 협정중 영국의 협상에 관한 "뮌헨 유화"라는 논문을 완성했다. 이 논문은 결국 "왜 영국은 잠들어 있나"(Why England Slept )라는 제목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60년 1월 2일 케네디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발표했다. 일부 사람들은 케네디의 나이와 경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의 카리스마와 웅변력은, 그에게 수많은 지지자를 얻게 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반 가톨릭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오히려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케네디의 목소리는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종교는 또한 그가 많은 가톨릭 유권자들 사이에서 열렬한 추종자를 얻게 했다.
스무 살이던 1937년 여름에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각 나라의 정치 지도자, 고위 장성, 관료들과 나눴던 대화 내용과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급박했던 정세를 바탕으로 전쟁의 발발 원인을 치밀하게 분석해낸 책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순간이었다.
실제로 이 젊은 기자는 전쟁 발발 전에 전쟁이 곧 닥칠 것임을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알렸던 인물이었다. 1939년 8월 친구와 함께 나치 독일의 베를린을 여행하다 독일군에게 체포당할 뻔했던 위기를 겪었던 그는 온 나라가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있던 독일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독일이 일주일 안에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비밀 메시지를 주영 미국대사이던 아버지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유럽 대륙은 6년 동안의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가 군대에서 예편하자마자 곧바로 특파원으로 유럽을 찾았던 건 잿더미에 파묻힌 유럽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예견하는 데 사용했던 식견과 판단력을 이제는 미래의 큰 흐름을 내다보는 데 쓸 시간이었다.
영국을 시작으로 독일, 프랑스, 아일랜드 등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그는 본국에 보낼 기사와는 별도로 자신만의 견문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사실과 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을 전달하는 기사와는 달랐다.

이 글에는 종전 이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던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한 그의 솔직한 전망들의 그대로 담겨있었고 그의 예측 대부분은 현실이 됐다.

종전을 계기로 창설된 UN(국제연합)이 결국 말잔치만 난무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과 얼마 뒤면 핵무기를 갖게 될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질 냉전에 대한 예측이 그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훨씬 더 중대한 문제는 강대국 중 어느 나라도 최종 분석에 따라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는 일을 안전보장이사회에 파견된 대표의 손에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사회의 권한이 겉돌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소 분쟁은 너무나 끔찍해서 글자 그대로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나라의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는 무기(당시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비밀리에 개발되고 있었던 원자탄을 가리킴)를 마침내 개발함으로써 무한정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전쟁의 공포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과학은 전쟁을 억제하는 수단으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상·하원 의원 시절

 

그는 공직에 출마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한 번도 선거에서 패배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1946년 첫 기회를 잡아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신체적으로는 허약했지만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 제11선거구의 민주당 조직을 이용하기보다는 자신의 가족, 대학동창, 동료 해군장교들의 힘을 빌려 선거운동을 펼쳐나갔다.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그는 차점자보다 거의 2배나 많은 표를 얻었다. 11월의 본선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는데, 그때 나이 불과 29세였다.

케네디는 민생(民生)에 관심을 기울이는 진보주의자로서 1947~53년 하원의원을 3번 역임했다.

그는 더 좋은 근로환경, 더 많은 공공주택, 더 높은 임금, 더 낮은 물가, 더 싼 주택임대료, 더 많은 노인복지대책을 지지했다.

외교분야에서는 처음부터 냉전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지지했으나 트루먼 행정부의 대(對)아시아 정책은 크게 비판했다. 그는 장제스[蔣介石]에게 압력을 넣어 마오쩌둥[毛澤東]과 연합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미국 국무부의 태도를 비난했다.​

 

1954년 그는 뉴잉글랜드 지방 출신의 상원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상호무역전(reciprocal-trade powers)의 연장을 지지했고, 센트로렌스 해로(海路)의 개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이전의 20여 년 동안 매사추세츠 출신 상·하원 의원 중에서 그 해로의 개방을 지지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또한 그는 양심상의 문제로 여론에 도전한 8명의 위대한 미국 정치 지도자들을 다룬 〈용기 있는 사람들 Profiles in Courage〉(1956)을 저술하여 1957년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상원에 다시 돌아온 케네디는 선거인단 철폐제안에 반대했고, 노동개혁에 앞장섰으며, 민권보호법안에 점점더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상원외교분과위원으로서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국가에 폭넓은 원조를 제공하자고 주장했고, 프랑스에게 알제리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워싱턴 정가를 경악시켰다.

이 시기에 그의 정치적 태도는 좌파적 경향을 띠었다.

하지만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영향력으로 민주당원 사이에서 존의 위치는 서서히 높아져갔고 마침내 그는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라이 E. 스티븐슨을 따르던 추종세력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스티븐슨은 2번씩이나 민주당 대통령후보에 올랐고 미국인들에게 이상주의를 호소함으로써 민주당의 면모를 일신시켜 케네디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다.​

 

 

38살의 상원의원이 병실에서 책을 쓴 이유

기자로서 유럽에 다녀온 이듬해인 1946년 그는 매사추세츠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이후 그의 앞에 어떤 인생이 펼쳐졌는지는 대부분의 독자가 알 것이다.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그는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꺾고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을 목표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던 시기, 정확히는 1956년 그는 한 권의 책을 내놓는다. 1954년 10월, 10대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고질병인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척추 수술을 받은 그는 덕분에 몇 달 동안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해서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시간을 자신이 그토록이나 쓰고 싶었던 글을 쓰는 데 투자한다. 이때 나온 책이 그에게 퓰리처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대학 졸업 논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다

 

그는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다. 하버드대학교 4학년이던 1940년에 그가 쓴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입체적이면서도 생생하게 풀어낸 덕분에 전쟁이 터진 뒤 수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케네디가 하버드의 상급생이었을 때, 그는 학업에 더욱 진지하게 임했고 정치 철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갔다. 1940년 케네디는 뮌헨 협정중 영국의 협상에 관한 "뮌헨 유화"라는 논문을 완성했다. 이 논문은 결국 "왜 영국은 잠들어 있나"(Why England Slept )라는 제목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60년 1월 2일 케네디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발표했다. 일부 사람들은 케네디의 나이와 경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의 카리스마와 웅변력은, 그에게 수많은 지지자를 얻게 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반 가톨릭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오히려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케네디의 목소리는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종교는 또한 그가 많은 가톨릭 유권자들 사이에서 열렬한 추종자를 얻게 했다.
스무 살이던 1937년 여름에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각 나라의 정치 지도자, 고위 장성, 관료들과 나눴던 대화 내용과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급박했던 정세를 바탕으로 전쟁의 발발 원인을 치밀하게 분석해낸 책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순간이었다.
실제로 이 젊은 기자는 전쟁 발발 전에 전쟁이 곧 닥칠 것임을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알렸던 인물이었다. 1939년 8월 친구와 함께 나치 독일의 베를린을 여행하다 독일군에게 체포당할 뻔했던 위기를 겪었던 그는 온 나라가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있던 독일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독일이 일주일 안에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비밀 메시지를 주영 미국대사이던 아버지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유럽 대륙은 6년 동안의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가 군대에서 예편하자마자 곧바로 특파원으로 유럽을 찾았던 건 잿더미에 파묻힌 유럽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예견하는 데 사용했던 식견과 판단력을 이제는 미래의 큰 흐름을 내다보는 데 쓸 시간이었다.
영국을 시작으로 독일, 프랑스, 아일랜드 등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그는 본국에 보낼 기사와는 별도로 자신만의 견문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사실과 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을 전달하는 기사와는 달랐다.

이 글에는 종전 이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던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한 그의 솔직한 전망들의 그대로 담겨있었고 그의 예측 대부분은 현실이 됐다.

종전을 계기로 창설된 UN(국제연합)이 결국 말잔치만 난무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과 얼마 뒤면 핵무기를 갖게 될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질 냉전에 대한 예측이 그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훨씬 더 중대한 문제는 강대국 중 어느 나라도 최종 분석에 따라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는 일을 안전보장이사회에 파견된 대표의 손에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사회의 권한이 겉돌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소 분쟁은 너무나 끔찍해서 글자 그대로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나라의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는 무기(당시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비밀리에 개발되고 있었던 원자탄을 가리킴)를 마침내 개발함으로써 무한정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전쟁의 공포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과학은 전쟁을 억제하는 수단으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50년 뒤에야 출간된 책, <대통령이 된 기자>


이 젊은 기자가 남겼던 견문록이 책으로 출간되는 데는 정확히 5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도 수십 년이라 흐른 뒤였다. 이 기자는 유럽에서 돌아온 지 1년 뒤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했는데 유럽 취재 동안 작성했던 육필 원고를 자신의 보좌진이었던 디어더 핸더슨에게 맡긴다.
1995년 노년에 접어든 핸더슨 여사는 보관하고 있던 원고를 묶어 한 권의 책을 펴낸다. 제목은 <리더십의 서곡>(Prelude to Leadership)이다.

훗날 세계 최고의 리더가 되는 인물의 젊은 시절의 기록을 담아냈다는 뜻이다. 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대통령이 된 기자>다. 지금까지 말했던 스물여덟 살의 젊은 기자의 이름은 존, 그는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다.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처럼 글로써 명성을 떨쳤던 백악관의 앞선 주인들처럼 케네디 역시 글솜씨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스물세 살에 졸업논문으로 썼던 글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대통령이 되기 전에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란 책으로 최고의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퓰리처상을 손에 쥘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면 우리는 그를 정치인이 아닌 뛰어난 작가나 역사학자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젊은 시절 그의 꿈꿨던 미래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대부호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원래 세상과 한걸음 떨어져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를 여행하는 작가로서의 삶을 꿈꿨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에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그의 형이자 집안의 장남인 조셉 케네디가 1944년 작전 중에 사망하면서 그는 인생의 항로를 돌려야만 했다. 반드시 자신의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열망에 충실히 부합하는 삶을 살았던 형이 죽음으로써 아버지와 가문의 기대는 차남이었던 케네디에게로 향한다.
케네디 역시 자신을 향한 아버지와 가족들의 기대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대부호이자 주영 미국대사까지 지낸 거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미국은 물론 세계 주요 국가들의 정치 지도자들과 만나왔던 그의 내면엔 정치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가를 꿈꿨던 젊은 이상주의자에게 정치에 입문하는 건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할 수 기회로 여겨졌다.

 

그는 공직에 출마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한 번도 선거에서 패배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1946년 첫 기회를 잡아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신체적으로는 허약했지만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 제11선거구의 민주당 조직을 이용하기보다는 자신의 가족, 대학동창, 동료 해군장교들의 힘을 빌려 선거운동을 펼쳐나갔다.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그는 차점자보다 거의 2배나 많은 표를 얻었다. 11월의 본선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는데, 그때 나이 불과 29세였다.

케네디는 민생(民生)에 관심을 기울이는 진보주의자로서 1947~53년 하원의원을 3번 역임했다.

그는 더 좋은 근로환경, 더 많은 공공주택, 더 높은 임금, 더 낮은 물가, 더 싼 주택임대료, 더 많은 노인복지대책을 지지했다.

외교분야에서는 처음부터 냉전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지지했으나 트루먼 행정부의 대(對)아시아 정책은 크게 비판했다. 그는 장제스[蔣介石]에게 압력을 넣어 마오쩌둥[毛澤東]과 연합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미국 국무부의 태도를 비난했다.​

 

1954년 그는 뉴잉글랜드 지방 출신의 상원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상호무역전(reciprocal-trade powers)의 연장을 지지했고, 센트로렌스 해로(海路)의 개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이전의 20여 년 동안 매사추세츠 출신 상·하원 의원 중에서 그 해로의 개방을 지지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또한 그는 양심상의 문제로 여론에 도전한 8명의 위대한 미국 정치 지도자들을 다룬 〈용기 있는 사람들 Profiles in Courage〉(1956)을 저술하여 1957년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상원에 다시 돌아온 케네디는 선거인단 철폐제안에 반대했고, 노동개혁에 앞장섰으며, 민권보호법안에 점점더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상원외교분과위원으로서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국가에 폭넓은 원조를 제공하자고 주장했고, 프랑스에게 알제리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워싱턴 정가를 경악시켰다.

이 시기에 그의 정치적 태도는 좌파적 경향을 띠었다.

하지만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영향력으로 민주당원 사이에서 존의 위치는 서서히 높아져갔고 마침내 그는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라이 E. 스티븐슨을 따르던 추종세력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스티븐슨은 2번씩이나 민주당 대통령후보에 올랐고 미국인들에게 이상주의를 호소함으로써 민주당의 면모를 일신시켜 케네디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다.​

 

 

38살의 상원의원이 병실에서 책을 쓴 이유

기자로서 유럽에 다녀온 이듬해인 1946년 그는 매사추세츠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이후 그의 앞에 어떤 인생이 펼쳐졌는지는 대부분의 독자가 알 것이다.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그는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꺾고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을 목표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던 시기, 정확히는 1956년 그는 한 권의 책을 내놓는다. 1954년 10월, 10대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고질병인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척추 수술을 받은 그는 덕분에 몇 달 동안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해서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시간을 자신이 그토록이나 쓰고 싶었던 글을 쓰는 데 투자한다. 이때 나온 책이 그에게 퓰리처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대통령후보와 대통령 시절

 

1960년 1월 존 F. 케네디는 대통령 입후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의 주된 경쟁자는 미네소타 주의 휴버트 H. 험프리 상원의원과 텍사스 주의 린던 B. 존슨 상원의원이었다. 케네디는 험프리에게 타격을 가하여 후보지명전에서 탈락하게 했고 개신교도가 대다수인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예비선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로마 가톨릭 신자에 대한 종교적 금기현상에 일격을 가했다. 그는 휴스턴의 개신교 목사들 앞에서 행한 텔레비전 연설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지지하는 자신의 소신을 공언함으로써 가톨릭 문제를 해결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그는 존슨을 자신의 부통령 러닝 메이트로 선택하여 민주당의 정·부통령 후보의 진용을 강화했다.

대통령후보지명 수락연설에서 케네디는 "우리는 뉴 프런티어의 한 끝에 서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때 이후 뉴 프런티어라는 말이 그의 모든 정책에 따라다니게 되었다. 또다른 문구인 '케네디 스타일'이라는 말은 대통령후보로서의

그의 정체(正體)를 감싸주었다.​

케네디는 총 유효투표수 6,833만 5,642표 중 11만 8,550표차로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리처드 M.닉슨을 가까스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기록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케네디는 "이 나라를 다시 한 번 힘차게 만들어봅시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는 실업, 침체된 경제상황, 미사일 갭(미·소 간의 핵장착 미사일의 보유수에 있어서 소련이 우세함을 가리키는 말),

아바나의 신생공산정권 탄생 등을 개탄했다.

대통령선거전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은 두 후보 사이에 벌어진 4차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회였다. 8,500만 내지 1억 2,000만의 미국민들이 1차례 또는 그 이상 그 텔레비전 토론회를 시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론회는 두 후보 모두 국정의 문제점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케네디의 멋진 용모와 텔레비전 화면상의 좋은 인상으로 인해 많은 시청자들이 케네디가 그 토론회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존 F.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행정부는 1,037일 동안 유지되었다.

취임 초기부터 그는 외교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인상적인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그는 "인간 공동의 적인 압제·빈곤·질병, 그리고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이고 힘든 투쟁의 부담을 함께 져나가자"고 요청했다.

케네디 행정부의 첫번째 외교정책은 대실패였다.

 
 
흐루시초프/ 피델 카스트로 /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기말년에 미국 CIA는 쿠바 침공을 위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쿠바 망명자들을 조직하여 무장시키고 훈련시켰다.

미국합동참모부는 신임 대통령인 케네디에게 이 병력이 일단 쿠바 해안에 상륙하면 쿠바의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총궐기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일치된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피그스 만 침공은 대실패로 끝났다. 쿠바 해안에 상륙한 특공대는 사살되거나 사로잡혔다.

케네디는 이 실패에 대하여 '단독책임'을 졌다. 그는 사석에서 아버지에게 합동참모부의 추천사항을 사전 검토 없이 그대로 수락하는 일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련의 총리인 니키타 흐루스초프는 1961년 6월 빈에서 케네디와 만나고 나서 이 젊은 대통령의 그릇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흐루시초프는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건축하라고 지시하고 동독과 단독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방위군과 예비군에게 동원령을 내렸고 흐루시초프는 단독평화협정 위협을 취소했다. 1962년 10월 소련제 중단거리 핵 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케네디는 그 미사일들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쿠바를 고립시키라고 명령했고 실제로 소련군함이 쿠바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해상봉쇄 조치를 취했다. 13일 동안 핵전쟁이 임박한 듯한 분위기였다.

그뒤 소련의 총리인 흐루시초프가 공격용 무기는 철수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10개월 뒤 케네디는 흐루시초프와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런이 참가한 가운데 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했는데 이것은 커다란 외교적 개가였다.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가까스로 이겼기 때문에 케네디는 의회접근에 조심성을 보였는데 또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회는 대체로 케네디가 제안한 법안들에 대해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회는 중남미 국가와의 '진보동맹'(Alianza)과 수천 명의 대학생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은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승인했으나 그가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2개의 법안, 즉 대규모 소득세 삭감과 포괄적인 민권보호조치에는 냉담했다.

결국 이 안건은 그의 사후에 통과되었다.

 
 
존 F. 케네디는 죽었지만 케네디 신화는 아직도 살아 있다.
 

재클린 케네디와 두 자녀는 백악관을 나와 워싱턴의 한 지구인 조지타운의 사저(私邸)로 이주했다가 다시 1964년 여름 뉴욕 시로 이주했다.

아래 사진들은 케네디와 재클린, 그들의 자녀들과 행복했던 한때이다.

 

- Chris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