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사람들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V - 생애와 정치경력

Chris Yoon 2022. 5. 15. 01:22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는 종종 그의 이니셜 JFK로 언급 되는 미국 정치인으로 1961년부터 3년이 끝날 무렵 암살 될 때까지 미국의 35대 대통령을 지냈다. 케네디는 갤럽의 20세기 널리 존경받는 인물 목록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테레사 수녀에 이어 3위를 차지 한 바 있다. 케네디는 냉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대통령으로서 일한 대부분이 소련및 쿠바 와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었다. 민주당원인 그는 대통령직 이전에 미 하원의 양원에서 매사추세츠를 대표했다.

 

 

카톨릭에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 존 F 케네디

 

매사추세츠 브루클린의 저명한 케네디 가문 에서 태어난 케네디는 1940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미 해군 예비역에 입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동안 그는 태평양 전역에서 일련의 PT 보트를 지휘했다 . 케네디는 PT-109의 침몰에서 살아남고 동료 선원들을 구조한 덕분에 전쟁 영웅이 되어 해군 및 해병대 훈장을 받았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케네디는 저널리즘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후 미국 하원 에서 노동계급 보스턴 지역을 대표했다.1947년부터 1953년까지. 그는 이후 미국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매사추세츠 주 하원의원을 역임했다.상원에 있는 동안 케네디는 그의 책 용기 있는 프로필( Profiles in Courage )을 출판하여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현직 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을 가까스로 물리쳤다 . 케네디의 유머, 매력, 젊음과 더불어 아버지의 돈과 인맥도 그의 선거 운동에 큰 자산이 되었다 . 케네디의 선거 운동은 TV로 중계된 첫 번째 대선 토론이후 더욱 탄력을 얻게 되었다 .미국 역사에서 그는 가톨릭에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그리고 친애하는 세계시민들,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

그의 연설은 온 세계 사람들에게 가슴을 울렸다.

 

케네디는, 1950년대를 전후해서 민주당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유세 도중 그는 미국이 소련보다 핵무기 개발 경쟁에서 뒤졌기 때문에 '미사일 격차'를 줄여야 함을 주장했다. 오하이오주의 선거인단을 장악해야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징크스를 깨고, 케네디는 유일 무이하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선례가 된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는 1961년 1월 20일 정오에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모든 미국인이 적극적인 시민이 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했는데 그는 전 세계 국가를 향해 "인간공통의 적, 즉 독재, 빈곤, 질병, 전쟁 그 자체"라고 부르는 것과 싸우기 위해 합류해 줄 것을 바랬다

 

"이 모든 것은 처음 100일 안에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처음 1000일 안에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행정부의 삶에서도, 아마 이 행성에서의 우리의 삶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작합시다." 끝으로 그는 더 큰 국제주의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다음과 같이 확장시키면서,, "마지막으로, 당신이 미국 시민이든 세계 시민이든, 우리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높은 수준의 힘과 희생을 이곳 에서도 요구하십시오."

 

최고의 명 연설, 존F. 케네디(John F. Kennedy)의 대통령 취임당시 연설 

"그리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1961년 1월 20일, 미 대통령 취임연설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에 태어나 1963년 11월 22일, 총탄에 쓰러지면서 한 편의 영화같은 삶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타고난 연설가로 손꼽았다. 부유하고, 좋은 교육을 받은 훌륭한 외모의 젊은 대통령. 이러한 그의 조건은 대중에게 다가가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시대적 특징과 낙관주의적 정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했으며,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들과 교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자질과 경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케네디가 상대적으로 젊다는 점, 그리고 경험이 없다는 점은 그를 낙천적이고, 참신하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또한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군복무를 마친 사람이었다. 그가 지휘하던 초계정이 솔로몬 제도 인근에서 침몰하자 부상을 무릅쓰고 가까운 섬까지 병사 한명을 끌고 와 생명을 구했고, 부하들의 안전을 일일이 확인했다. 케네디가 몸소 실천한 애국심과 자유, 봉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청중은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청중에게 분명한 비전과 도전의식을 불어넣었다.

케네디는 자신의 형신주의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는 극적이고 강력한 말로 취임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최초의 혁명의 계승자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시간, 이 자리에서 우리는 전쟁으로 강해지고, 힘겹고 가혹한 평화로 단련되고, 오랜 유산에 자부심을 갖는 젊은 세대들의 손에 그 혁명의 횃불이 쥐어졌음을 압니다. 우리는 미합중국과 전 세계가 함께 현재까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헌신적으로 수호하려는 인권이 점차 유린당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와 우방과 적들에게 알립시다."

 

 

케네디가 1962년 9월 12일, 라이스 대학교에서 했던 연설이다.

"루니는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고, 또 다른 일도 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목표가 우리가 가진 최고의 능력과 기술을 정비하고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루지 않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케네디의 많은 연설에는 행동하고 도전하라는 적극적인 요구가 담겨 있었고, 모두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설정된 대담하고 과감한 목표는 흥분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상상력에 불을 지피기 마련이다.

 

 

가장 적절한 도구와 기술을 이용해 최고의 효과를 내야 한다.

케네디는 다수의 청중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상대적으로 새로운 매체인 TV를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1960년 9월, 대선 캠페인 중에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TV로 중계된 대선토론에서 공화당 후보이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과 1:1 대결을 벌였다. 결과는 케네디의 승리였다. 라디오로 이 토론을 들은 사람들은 닉슨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를 TV로 지켜본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던 닉슨보다 느긋하고 여유로웠던 케네디가 진정한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했다.(또한 중요해서는 안되지만, 현실적으로 중요한 '외모' 에서 상대보다 뛰어났다.)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대결의 승패를 가른것으로 평가되는 당시의 대선토론 이후, TV라는 매체는 미국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청중의 마음을 이해하고 당신이 그들의 지지자임을 보여주여야 한다.

"Ich Bin ein Berliner." 이 말은 독일어로 '나는 잼이 들어 있는 도넛입니다.' 라는 뜻이다. 케네디는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 인구의 80% 이상이 운집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케네디가 멀리 독일까지 와서 왜 자신을 도넛이라고 표현했을까? 사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Berliner)' 였다.

하지만 당시 서독 청중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서독인들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뜻을 알리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가 독일어에 서투르다는 결점도 덮어 주었다.

 

능력있는 사람들과 일하고, 본인이 훌륭한 연설문을 쓸 수 없다면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과 함께 해야한다.

케네디는 훌륭한 연설가였지만, 뛰어난 작가들로 이루어진 팀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케네디의 측근 보좌관, 테드 소렌슨 이었다. 한 세대의 상상력에 불을 뭍인 건 바로 소렌슨의 표현이었고, 케네디는 이렇듯 훌륭한 표현을 세상에 멋지게 선보였다. 소렌슨은 그가 저서에서 카운슬러(Counselor) 커뮤니케이터로서 케네디의 자질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우리는 무언가 기억에 남을 일을 해야 한다.

케네디의 인생은 잊을 수 없는 순간들로 가득하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최대 갑부로 손꼽히는 아버지를 두었다는 점에서부터 전쟁영웅, 상원의원, 최연소 대통령이 된 사실까지 모두 인상 깊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의 감동적인 연설을 듣는 청중은 자신이 이미 그를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그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어쩌면 청중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그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갖고,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케네디는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기간 동안 그가 제안한 획기적인 입법안의 대부분은 그의 사후에 실행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은 특이하게도, 대통령 케네디의 유산은 구체적인 성과가 아닌 포부와 기백, 도전과 강인함, 그리고 그의 고귀한 성신이라고 표현된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유산은 정치적인 입장과는 관계없이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또한 각계의 지도자들은 그의 연설문과 연설을 배우고, 익히려 노력하고 있다.

 

재임기

 

취임사에서 케네디는 우방국들에 변하지 않을 우정을 약속하며, 식민지 통치 등에서 갓 벗어나 자유 진영에 편입된 신생국들이 독재 등 더 가혹한 환경에 놓여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원조와 빈곤 문제 퇴치를 언급하며,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그 일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나 그들의 지지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당위론을 내세웠다. 다만 세계인들이 미국에 바라는만큼 세계인들 스스로도 함께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자고 역설한다. 소련에 대해서도 역지사지하자며 대화를 제안한다.

특히 중남미 우방 외교에 신경써 중남미 여러 나라와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고, 평화봉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취임 두 달만에 CIA 뻥카말만 믿고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그만 침공 작전 실행을 승인했다가 거하게 실패하며 외교적으로 큰 부담을 지게 된다. 덕분에 국내에서도 큰 비난에 직면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사실 이 일은 신임 대통령이던 케네디가 기세등등하던 CIA와 군부 등쌀에 밀려 떠밀리듯 승인해준 것도 있어서 발 빠른 대국민 사과와 함께 비교적 조용히 넘어간다.

 

우리나라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그리고 베를린 위기를 통해 미숙한 자신을 테스트하는듯하던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죠프의 위협을 전면전으로 가지 않고도 적절하게 선방하여 서유럽 국가들의 여론을 다시 자기 편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하고, 피그만 침공 여파가 이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 즈음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흐루쇼프 정권과 대결한 결과,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대신에 소련은 미사일·폭격기 등을 쿠바에서 철수하고, 미국 측의 사찰을 인정함으로써 소련과의 극적인 타협을 이루며 대중의 큰 호응을 얻게 된다. 핵 위기의 반성으로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을 제창하여 이를 성사시켜 후일의 수많은 핵제한/감축 협정의 초석을 세운 것도 고평가를 받는다. 인공위성 스후트니크를 날리면서 미국을 추월한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계획한 것도 이 무렵이다

내정 면에서는 일종의 도전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뉴프런티어 정신을 내세우며 개혁 법안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정작 여대야소였는데 의회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법안이 많았다. 군사비도 증가했음에도 상기했듯 되려 군부와의 마찰은 심화되어 쿠데타설이 떠돌기도 하는 등 껄끄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으로 촉발된 흑인민권운동에 대해서는 호응하여 정권 기간 중 연방재판소에 최초의 흑인 판사가 취임하고, 흑인 검사를 10명에서 70명으로 늘리고, 오랜 악습이던 투표세를 없애 흑인은 물론 푸어 화이트 계층의 선거 참여율을 높여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이런 행보에 엇나간 보수파의 공격은 더 거세졌고, 일각에선 너무 급격한 변화로 중산층의 여론이 갈라지며 사회 분열을 가중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실제로 베트남전의 계기를 어느 정도는 제공했으며, 주변의 매파 때문이라고 해도 냉전을 축소시키려는 행동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미사일 격차 논쟁은 케네디가 촉발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복지 등 각종 개혁은 케네디 재임 중 입안됐지만, 그의 재임 중에는 예산 문제로 의회에서 난항을 겪었고, 그가 죽은 후 의회에서 잔뼈가 굵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이 의회를 거듭 협박설득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통과시켜 그의 공헌도가 더 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베트남전 관련해선 케네디 자신은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의 전임 아이젠하워가 프랑스의 직접 개입 요청을 끝내 거부하고 지원은 장비와 자금 등 물자 지원에 한정한데 반해, 케네디 정부 시절엔 군사고문만 1만명 가까이 파견하는 정책을 결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상황이 달라진 탓도 있었다. 실제로 베트남에 대해서 케네디는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 일단 재선을 한 다음에 베트남 철수를 다룰 예정이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와 연관이 있던 로버트 케네디, 로버트 맥나마라, 아서 슐레신저 주니어, 시오도어 소랜센, 마이크 멘스필드 등이 케네디에게 미군 철수의지가 분명히 있었다고 주장했다. 펜타곤 페이퍼 유출로 유명한 대니얼 엘스버그는 1967년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 인터뷰를 했는데, "지상군 파병은 안 한다는 형의 결심은 확고했다"고 얘기했다 한다.

1962년 초 케네디는 해리먼과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클 포레스털에게 어떤 계기라도 잡아서 우리의 개입 정도를 축소하라라고 지시했으며, 당시 국방장관이던 맥나마라는 남베트남 미군사고문단 총사령관인 폴 하킨스에게 남베트남 정부군에 대한 군사 훈련 지원을 종료하고 1965년 말까지 군사고문단을 철수하는 계획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1963년 5월부터 만들어진 계획에 따르면, 1단계는 그해 말까지 1,000명이 철수하고, 그 시점부터 본격전인 철수를 시작해서 1965년 말까지 완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케네디는 1963년 10월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 비망록 263호(NSAM 263)에 서명하는 것으로 철수 의지를 표현했다.

허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2년 사이 남베트남의 군사고문단 숫자는 900명에서 16,000명까지 증가했고, 이는 미국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사례가 된다. 제네바 협정 위반일 수 밖에 없는것이 당시 미군이 파병한 고문단의 활동범위가 단순히 남베트남 뿐만 아니라 라오스 캄보디아, 북베트남 국경지대를 아울렀기 때문이다. 케네디가 고문단 파병형식으로 무마하고자 했던 베트남 전쟁은 1963년 그가 지원하던 응오딘지엠과 그가 암살되면서 본격화 된다. 케네디의 후임인 린든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와의 차별화를 위해 베트남전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고, 1964년 통킹만 사건 조작이라는 희대의 무리수를 벌였으며, 1965년 부터는 말 그대로 지상병력까지 대규모 단위로 파병하면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버리고 만다.

 

 

존 F. 케네디의 업적들

 

케네디의 흑인 민권 운동

 

1961년, 지방의 분리적 법률들을 시험하기 위해 흑인 백인할 것 없이 구성된 비폭력적 단체인 "자유의 기수"는 버스를 타고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들어갔다. 백인 폭동자들이 그들을 공격하자, 당시 로버트 케네디 법무 장관은 질서를 복구하는 도움을 주기 위해 각 도시에 연방 보안관들을 보냈다. 1962년 수많은 반대에 불구하고 제임스 메러디스는 미시시피 대학교에 처음으로 등록된 흑인 학생이 되었다. 1963년 백인과의 동등한 인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와 경제적 권리를 찾기 위해 흑인들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서는 인종 차별에 대한 항의시위와 데모가 일기 시작했다. 5월에 버밍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다음 달에 케네디는 앨라배마 대학교에 흑백인의 공동 입학을 허용했다. 9월에는 앨라배마 주의 3개의 도시들에서 학교들의 공동 입학을 보증하기 위하여 다시 주군을 연방화시켰다 .케네디는 인종에 상관없이 공공장소에서의 손님들을 허락하는 데 입법을 통과시키기를 의회에 자문을 구했지만, 통과시키지 못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일본 나가사키 상공에서 1800m(59000피트)높이의 원자 폭발로 인한 버섯 구름

1962년 10월 14일, CIA U-2 정찰기가 쿠바에 중거리 탄도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소련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10월 16일 케네디에게 보여졌다. 미사일은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며 즉각적인 핵 위협을 제기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케네디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미국이 기지를 공격하면 소련과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지만 미국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경우 근거리 핵무기의 위협이 증가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한 것이 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이끌었던 쿠바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아이젠 하워 정부때부터 사회주의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61년 4월 17일 망명한 쿠바인 반란군들이 쿠바혁명으로 수립된 피델 카스트로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자기들의 모국을 침공하였다. 폭력은 큰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침투했던 1,500명 중 114명이 전사하고 1189명이 쿠바 혁명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케네디의 쿠바 전복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대통령으로서 미국에 의하여 계획된 불행한 침입을 위한 책임을 받아들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쿠바에 미사일을 세우는 것을 미국이 알아내자 1962년 10월에 또 다른 위기들이 일어났다.

 

핵 전쟁을 가깝게 만들었던 케네디의 지지율

 

리틀 보이(Little Boy),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 무기 모형

케네디는, 해군에게 쿠바를 봉쇄하는 명령을 내렸다. 군함들은 쿠바에 소비에트 연방의 미사일을 배달하는 배들을 돌려보내는 데 명령을 받았다. 또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대략 14,000명의 공군 예비병들을 부르기도 하였다. 1주 동안 전쟁은 호전된 듯했다.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 총리는, 모든 소련 미사일들을 철수시킬것을 명령했고 케네디는 해상봉쇄를 해제했다. 이 위기는, 전후 어느 때보다 세계를 핵전쟁에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상황으로 ,미국의 의지와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는 오히려 상쇄된 결과를 가져왔다. 케네디의 지지율은 그 직후 66%에서 77%로 높아졌다.

 

아메리카 원주민 관계

Kinzua댐 건설은 1794년 조약에 따라 점령한 10,000에이커(4,000헥타르)의 세네카 국가 토지를 침수시켰고 600명의 세네카가 뉴욕의 살라망카로 이주하도록 강요했다. 케네디는 미국 시민 자유 연합(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으로부터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개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홍수 통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그는 세네카의 곤경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정부 기관에 더 많은 토지, 피해 및 실향민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베트남 전쟁의 개입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남북분단 되었다. 미국의 아이젠 하워 정부는,분단된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친미 정권을 수립했고,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물적 인적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 응오딘지엠 독재 정권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1960년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른바 베트콩이 자생적으로 창설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케네디 정부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개입 정책을 더 노골적으로 바꾸었다.ㅜ케네디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키기 위해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시켰으며, 그 숫자는 1963년 불과 2년 만에 900명에서 16,000명으로 증가했다. 1962년 2월 케네디는 폴 하킨스를 사령관으로 하는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 즉 MAC-V를 수도 사이공에 설치하고, 12월에는 그 숫자가 이미 9,865명으로 증가했다. MAC-V 설치 10개월 안에 그 숫자가 2배나 증가한 수치였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권의 전략촌 건설과 베트콩 소탕에도 적극적으로 관여 했으며, 1961년 네이팜 폭탄 투하와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와 같은 인체에 치명적으로 해로운 고엽제 살포를 공식적으로 허용했다. 전략촌의 숫자는 1963년 가을까지 전국적으로 8,679개에 달했는데, 포로수용소나 강제집단수용소와 같은 이주에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였으며, 대부분의 전략촌은 농민의 지지를 받은 베트콩에 의해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