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사람들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II - Kennedy의 軍생활

Chris Yoon 2022. 5. 12. 01:19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We need men who can dream of things that never were.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존(John F Kennedy)의 부친 조지프 P. 케네디.


존(John F Kennedy)는 매사추세츠 주 브룩라인(Brookline)에서 당시 보스턴의 부유한 사업가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1888년 ~ 1969년)의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케네디 가문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그러하듯이 형편이 어려웠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사정이 나아져서 그의 아버지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는데, 조지프는 출세욕과 야망이 대단하여 학창시절부터 이미 인맥을 다지는데 공을 들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주식 투자, 영화 사업, 기업 M&A 등으로 엄청난 부호가 되었고, 그후 정계 진출을 시도하여 영국 주재 대사가 된 나름 입지전적스런 인물이었다.

 

 

이렇게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다진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는 자신의 야망이었던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 하나쯤은 나와야지'라는 방침에 따라 자신의 9명 자녀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며 어릴 적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게 하였다.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의 이런 태도는 "인간 성공의 척도는 돈이 아니고, 그가 만드는 가문의 종류이다."란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그에겐 돈을 떠나 어떤 가문의 전통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고 돈이 중요하지않다는 건 아니라, 일례로 케네디의 자녀들은 보스턴 시내 어디 상점이든 외상으로 물건 구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집안을 모르는 시민들이 없었기 때문. 물론 케네디가의 비서가 잔금을 늘 치렀다고 한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존 F. 케네디 뿐만 아니라 형제였던 로버트 F.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 등도 훗날 같이 정계에 입문하였다. 사실 집안에서 가장 기대를 한 인물은 차남 존이 아니라 장남 조 케네디였다. 조 케네디는 운동과 공부 모두 만능이었지만, 차남인 잭 케네디(존 피츠제럴드 '잭'네디)는 어려서부터 좀 왜소하고 잔병 치레도 많이 했으며 공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보딩스쿨인 초트 고등학교에서도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좋지 않았다. 허나 정계 유력 인사이자 히버드 출신인 아버지의 후광에 역시 명문가였던 친척들의 신원 보증을 얻어 프린스턴 대학교를 그만 두고 하버드에 입학했다. 사실 이때 본인은 프린스턴을 다니겠다거고 했지만 아버지는 차갑게 "형이 두려워서 그러는 거냐?"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조지프 케네디가 신임하던 장남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주니어는 제 2차 세계대전 도중이던 1944년 군용기 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젊은 시절

 

한편 존 케네디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고 학창 시절 유럽 여러 나라들을 탐방하면서 외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대필 의혹으로 논란이 된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1940)를 출간하여 정치 서적으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이 뮌헨 협정 등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에 대해 펼쳤던 유화정책을 비판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교수들은 이 논문이 굉장히 장황하고 내용이 반복된다고 하면서도 그 깊이는 인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아버지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는 당시 주영 미국대사로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적극 지지했고, 막 경제 대공황을 지나 온 미국이 또 다시 커다란 소용돌이인 유럽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네디는 주영 대사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생의 신분으로 구할 수 없는 미국과 영국의 외교 문서들을 탐독하고, 전속 속기사와 타이피스트를 고용하여 3개월만에 학위 논문을 써냈다 당시 케네디의 논문은 문장력 등과는 별개로 깊은 통찰력을 인정받았는데 케네디 가문 정도 되면 논문 내용도 사실 본인 머리에서 나온게 아니지 않을까 싶지만 훗날 보여준 외교 역량을 생각해보면 이 때부터 싹수가 있었던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존(John F Kennedy)는원래 부신피질 호르몬 분비 이상인 애디슨씨병을 앓고 있었고, 대학 시절 미식축구를 하다 등에 큰 상처를 입어 늘 진통제를 달고 살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입은 부상으로 더 악화되었다. 이 때 입은 등의 부상은 평생 영향을 미쳤다.

 

 

제2차대전중에는 해군에 복무, 대위로 전역했다. 원랜 에디슨병, 성병등의 부상으로 군대에 갈 수 없는 신체 조건이었지만 세계대전에 참가해야 향후 정치 활동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 입대했고, 아버지를 설득해 후방이 아닌 전선에 배치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참전용사라는 경력은 케네디가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부각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중위 시절, 어뢰정 PT- 109의 정장(艇長)으로 근무했는데, 1943년 8월 2일 솔로몬 제도 콜롬방가라 섬 인근에서 작전중 격침 되었다. 전날인 8월 1일 존 케네디를 포함한 15척의 어뢰정은 일본군의 병력 운반 발동선을 찾아 기관총으로 잡기 위해 흩어져서 작전중이었는데 존 케네디가 소속된 B편대 4정은 야간에 구축함 4대를 정면으로 마딱드려 4 vs 4 드림매치를 벌인다. 여기에 더해 일본 수상기 4대가 날아와 조명탄을 투하하고 기총 소사를 했지만 젊은 위관급 어뢰정장들을 과감하게 돌격하여 어뢰를 쏘고 빠지며 치열하게 싸웠다.  다음날 새벽 2시 15분에 어뢰정들은 전날 전투한 곳을 수색하라는 명을 받고 정찰중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 함을 발견하지 못해 구축함에 들이받히고 PT-109는 격침되었다. 아마기리측에서도 PT-109의 발견이 늦었고, 어설프게 피하는 것보다는 똑바로 들이받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으로 충각전술을 사용. 전날의 4 vs 4 전투때도 야간에 구축함을 돌격했다.


좌초 직후 케네디 일행은 근처에 있는 플럼푸딩 섬이라는 손바닥 만한 섬까지 헤엄쳐 갔는데 맥마혼 수병이 충돌로 화상을 입어 수영할 수 없자 케네디는 그의 구명쪼끼 한쪽 끈을 입에 물고 평형으로 4시간을 수영해서 데려 갔고 이후 홀로 3~4km를 더 헤엄쳐가 지나가던 아군 어뢰정을 기다렸지만 실패하고 이틀뒤 2km 떨어진 조금 더 큰 섬으로 이동하는데 똑같이 구명쪼끼 한쪽끈을 입에 물고 수영해서 갔다. 다음날 부장 로스 소위만 데리고 1km 떨어진 좀 더 큰 섬인 나루 섬으로 헤엄쳐 갔다가 연안감시대 소속 현지인 정찰대 원주민 가사와 쿠마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먹을 것은 커녕 마실 물조차 없어 탈진한 상황에서, 부하들을 위해 상어의 위험을 무릅쓰고 먼 바다까지 헤엄쳐간 것은 케네디의 투철한 군인 정신과 부하들을 위한 희생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사후 대처를 놓고 레전드급 활약을 한 셈이다.

이후 케네디는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승조원 본인포함 14명을 이끌고 6km를 헤엄쳐 인근에 위치한 무인도에 상륙했다가 구출 되었다. 물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케네디는, 구사일생 끝에 살아온 전쟁 영웅이 되어있었다
존은 전역 후 사망한 형을 대신해 아버지의 꿈도 안고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정계 활동과 대선 승리

 

1946년, 보스턴 시장 선거 출마로 인해 자리가 빈 메사추세츠 제11지역구에 출마, 73%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하원의원으로서 정치를 시작했다. 교육/노동 위원회와 재향군인 권익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대외적으로는 트루먼 독트린을 지지했다. 이 시절부터 이민법 완화, 공공주택 건설, 노조 권한 축소 저지에 힘 썼다. 3선 후 1952년에는 무려 3선 현직 상원의원인 헬리 캐벗 로지를 7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메사추세츠 사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중진급으로 성장했다. 그 다음 해인 1953년에는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 재클린 부비에와 결혼하였다.

 

존 케네디는 해군장교출신답게 재클린과 요트를 즐겼다


그는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유일하게 자유무역 확대에 찬성하는 상원의원이었으며, 선거인단 폐지 반대 및 노동 개혁 운동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민권법 제정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해외 원조도 적극 지지했다. 이런 활동들을 바탕으로 1956년 대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 지명 연설을 맡았고, 대선 후보였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뜻대로 당 대회에서 선출하게 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2위로 낙선, 대신 인지도는 높였다. 그러나 현직 아이젠하워의 인기가 좋았던 만큼 이 실패는 도리어 약이 되었다. 1957년《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058년에는 상원의원에 재선되었다.

 

 

 
상원의원 케네디

그리고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경선에서 거물 정치인이던 린든 B. 존슨을 꺾고 후보로 출마,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누르며 마침내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편 조지프 케네디는 아들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꿈을 이루는 듯 싶었으나, 아들의 취임 11개월 만에 뇌경색으로 반신불수 상태가 되었고, 2년 후 존에 이어 몇 년 후 역시 대선에 출마한 로버트마저 피살당한 이듬해인 1969년 향년 8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거동이 불편해진 것과 더불어,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거나 이루어줄 아들을 셋이나 먼저 떠나보냈다는 점에서 불우한 말년을 보냈던 셈이다. 거기에 넷째 아들 에드워드 케네디마저 조지프 케네디의 사망 직전에 여비서의 사망 사건(차파퀴딕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대권 가도에서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