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사람들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IV - 케네디와 재클린, 그리고 마릴린 먼로... 그리고 또 오나시스.

Chris Yoon 2022. 5. 14. 01:21

이름 재클린 케네디

본명 Jacqueline Kennedy

출생 1929년 7월 28일

사망 1994년 5월 19일

학력 조지 워싱턴대학교

특이사항 미국 역사상 세번째로 젊은 퍼스트레이디

 

1929년 뉴욕의 명문가인 프랑스계 보뷔르 가문에서 태어난 재클린은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한 후 여기자로 일하면서 뉴포트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다.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부인인 재클린 케네디는 별칭 "재키""Jackie" 로 불리며 젊은 영부인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그녀의 패션 또한 "재키 스타일" 로 불리며 많은 관심을 받은바있다

그러면 그녀 재클린(Jacqueline)은 어떤 여성이었나?

 

 

재클린은 1929년 7월 뉴욕에서 월 스트리트의 증권 브로커인 아버지 잭 부비에와 어머니 자넷 노턴 리사이에서

첫딸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고 11살때는 전국 승마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승마 실력이 좋았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알콜 중독과 외도, 그리고 1929년 월 스트리트의 대폭락 이후 경제적으로 가족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재클린의 부모는 별거를 거쳐 이혼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휴 오친클로스라는 증권 브로커이자 변호사와 재혼하게 되었다. 양아버지인 휴 오친클로스 역시 재혼으로 재클린과 여동생은 의붓 남매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가족들과 / 고등학교 졸업 당시 아버지와 / 케네디 집안과 친했던 아일랜드계 신부와 함께 한 재키.

 

재클린은 뉴욕 바사대학에 입학한 후 4학년때 조지 워싱턴 대학교로 편입학하여 프랑스 문학 학위를 받았다

이때 그녀는 워싱턴 타임즈 헤럴드에서 기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기자로 일하던 시절인 1951년 재클린 부비에는 예일대학교 출신의 주식 브로커이자, 뉴욕상류층 자녀이기도 했던 존.G.W. 허스티드와 만나 약혼을 했었다고 한다. 그후에 메사츄세스 상원의원이었던 존.F. 케네디 를 만나게 되면서 그 약혼은 깨어지게 됐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 축하 무도회때 재클린을 동반한 이후부터 두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그녀는 1953년 25세의 나이로 37세의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8년 뒤인 1961년 대통령의 부인이 됐다.

1951년 한 저녁 만찬에서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를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 존 F.케네디는 그녀보다 12살 연상이었다.

같은 해 케네디는 상원의원이 된 후 재클린에게 청혼하였고 그녀는 이 청혼을 받아들여 1953년 6월 공식적으로 결혼이 발표되었다

그녀는 1953년 25세의 나이로 37세의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8년 뒤인 1961년 대통령의 부인이 됐다.

 

 

1953년 9월 이 둘은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세인트 메리 성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의 양아버지의 별장에서 피로연이 열렸고 이때 참석한 인원은 1200명에 달했다.

당시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는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디자인이었고, 교황의 축전이 올만큼 화려하고 큰 결혼식이었다

재클린의 웨딩 드레스는 보스턴의 케네디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행복한 결혼식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결혼생활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케네디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여러번 척추 수술을 받아 몸상태가 좋지 않았고, 늘 염문도 끊이질 않았다

 

 

그 상대 중 하나가 당대 최고 섹시 여배우 마릴린 먼로였고, 이 사실을 재클린이 알게 된 후 부부의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설명 :: 좌 상: 어린시절의 피츠 제랄드, 마릴린 먼로. 존 F. 케네디 / 중: 뇌살적인 마릴린 먼로의 자태 / 스크린 속의 마릴린 먼로 / 큰 사진이 문제의 사진이다. 창가에 선 마릴린 먼로의 뒤에 존 F. 케네디가 마릴린 먼로의 목을 애무하고 있는 모습을 파파라치가 찍었다. 이들은 집무실에서도 자주 대낮에 정사를 벌렸다고한다. 젊고 멋있는 존 F. 케네디 와 섹시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만남은 최고의 환상적 커플이었을 것이다.

 

Happy Birthday, Mr. President

생일 축하해요, 대통령

1962년 5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케네디의 45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매디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 )에서 열린 대규모 파티에서 " 생일 축하합니다, 대통령 "을 불렀다 .

 

Happy Birthday, Mr. President

 

"생일 축하해요, 대통령"은 실제 날짜 1962 (5월 29일)를 10일 앞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45세 생일 축하 행사에서 1962년 5월 19일 배우이자 가수인 마릴린 먼로가 부른 노래이다. 먼로는 케네디의 이름으로 " 미스터 프레지던트"가 삽입된 전통적인 " 해피 버스데이 투 유 " 가사를 섹시하고 친밀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녀는 그녀가 특별히 케네디를 겨냥한 새로운 가사를 썼던 클래식 노래 " Thanks for Memory "의 일부로 노래를 계속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당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유 에스 스틸(US Steel)을 다루는 방식과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승리한 전투에 대해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은 큰 생일 케이크를 선물로 받으며 무대에 올라 먼로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달콤하고 건전한 방법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줘서 이제 정계에서 은퇴할 수 있다"고 농담했다. 이 공연은 3개월 후인 1962년 8월 4일 그녀가 사망 하기 전, 그녀의 마지막 주요 공개 공연중 하나가 되었다. 민주당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는, 하루를 자녀인 존과 캐롤라인과 함께 런던 헌트 홀스( Loudon Hunt Horse Show)에서 보냈다.

 

 

케네디 대통령의 내연녀였던 마릴린 먼로는 그의 남동생과도 스캔들이 있었다

먼로는 직접 재클린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했다

실제로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케네디 형제와 관련 있다는 주장이 있으며, 그녀의 죽음에도 여러가지 의문점이 있다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는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다.

마릴린 먼로는 언젠가부터 케네디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와 달리 케네디는 그녀와의 정사를 즐겼지만, 아름답고 지적인 아내 재클린과 이혼하면서까지 먼로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케네디가 대통령직에 취임한 후에도 이어졌다. 카라일 호텔이나 로포드의 비치 하우스에서 데이트를 즐겼을 뿐 아니라,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함께 여행도했다. 점차 두 사람의 관계는 위험수위를 넘었고, FBI나 사설 흥신소가 그들의 불륜에 대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수면제와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밥 먹듯이 드나들고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1962년 8월4일 매제이며 영화배우인 피터 로퍼드, 로스앤젤레스 경찰 출신 개인 경호원 등 두 명을 데리고 먼로의 집으로 찾아가 먼로에게 최면제의 일종인 펜토바르비탈(약품명 넴부탈)을 주사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먼로가 정신을 잃은 사이 비밀내용을 담은 먼로의 일기장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먼로가 깨어날 것 같자 이들은 또다시 넴부탈을 주입했다.

책에 따르면 먼로의 애완견이 짓는 소리에 방을 들여다본 집사가 현장을 발견하고 앰뷸런스를 불렀는데, 당시 출동한 구급대원은 “일반적인 약물 과다 복용자와 달리 구토하지 않았고 입에서 약물 냄새도 나지 않았다”면서 먼로가 의식은 없었지만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먼로의 정신과 주치의인 랠프 그린슨이 나타나 거대한 주사기로 먼로의 가슴에 넴부탈을 주사하면서 먼로가 결국 숨지게 됐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주치의 그린슨 또한 먼로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런 사실은 로버트 케네디한테 약점으로 잡혀 있었다. 여러 음모론이 있지만 로버트 케네디의 사주는 거의 맞는거 같다.

 

 

마릴린 먼로가 자택에서 사망한 후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지만 잇따른 유산과 사산으로 재클린의 몸과 마음도 많이 지치게 되었다. 아이들을 낳은 이후 미국 국민들은 영부인 재클린와 아이들의 모습을 궁금해했지만 재클린은 언론에 노출되는걸 조심스러워했다. 그녀는 대통령 부인으로는 처음으로 비서관 파멜라 터뉴어를 고용했고 공개적인 발언을 피하며, 아이들의 사진이 찍히는 것도 경계했다

 

이처럼 아이들과의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 역사와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백악관 복원을 위해 힘썼다.

영부인 최초로 백악관 큐레이터를 고용하여 백악관 초기 유물과 가구들을 다시 찾아오려고 했다.

 

1962년 TV 를 통해 국민들에게 백악관을 소개하며 모두에게 선보였고 전국에서 5600만명이 이를 관람했으며 106개국에 배급되기도 했다. 이 TV 투어를 통해 재클린은 1962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재클린은 남편의 재임기간동안 수많은 외국 국가들을 방문하였다.

전세계적으로 그녀의 인기가 높아 케네디 대통령은 "나는 재클린 케네디를 따라 파리에 온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프랑스어는 물론 스페인어로도 능통하게 연설하였다

 

1963년 그녀는 임신을 하였고 응급 제왕수술로 패트릭 부비에 케네디라는 남자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병원으로 옮겨진 뒤 이틀 후 사망하게 되었고 재클린은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1963년 11월 22일, 재선 출마 1년을 앞두고 케네디 부부가 함께 참석한 텍사스 선거 유세, 카 퍼레이드 도중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하게 된다

 

 

 

1968년 재클린은 미국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 와 재혼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둘은 오랜 친구 사이로 오나시스는 재클린의 여동생 리 리지드월과 사귀였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죽자 내연녀의 친언니인 재클린와 가까워지고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리지드월은 재클린와 의절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 후 그녀는 재클린 오나시스 Jacqueline Onassis 라는 법적 이름을 갖게 되었고

미국 정부의 대통령 미망인 경호에 대한 권리를 잃게 되었다

 

결혼 후 재클린은 오나시스의 경제력 덕에 풍요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오나시스의 소유한 개인섬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뉴욕과 그의 개인섬을 오가며 생활했다

 

하지만 몇년 후 이 둘은 불화를 겪게 되었는데 오나시스는 재클린의 사치를 문제 삼았고 재클린은 오나시스의 바람기에 참을수가 없었다

 

1973년 오나시스의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 오나시스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1975년 암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그는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유산을 남겼지만, 재클린과 이혼 준비중이었기 때문에 전 재산을 딸에게 상속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재클린이 소송을 걸어 2년간의 법적분쟁 끝에 2600만 달러를 지급받게 되었다.

 

오나시스와의 결혼으로 미국에서의 그녀의 인기는 떨어지게 되었다.

영부인으로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재클린이 갑부와 재혼하며 사치스러운 이미지가 생겨버리게 된 것이다,

 

두번쨰 남편 오나시스의 사망 후 재클린은 뉴욕으로 돌아와 도서 편집자로 활동하며 저술활동과 자선 사업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이미지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녀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10년만에 모습을 드러내며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한 영부인 시절부터 관심 있었던 문화, 건축 보존 사업에도 꾸준히 참가하여 맨해튼의 여러 구조물을 보수했다

 

이후 벨기에 출신의 보석상 모리스 템펠스만 Maurice Tempelsman 과 사귀였는데 뉴욕의 아파트에서 함께 동거하였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

 

1993년 재클린은 림프종을 발견하였고,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5월 19일 64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그녀가 남긴 말은 '난 평생 존 F.케네디를 잊을 수 없었어요.
그를 사랑해서가 한 가지 이유고 그에게 더 잘해 주지 못해서가 다른 한 가지 이유에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는 내 마음 속에 아직 있어요..`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TV로 생중계 되었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첫번째 남편 존 F.케네디와 일찍 세상을 떠난 두 자녀의 곁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1999년 갤럽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기도 했으며 사망후에도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영부인으로 일컬어진다.

 

 

존 F. 케네디는 죽었지만 케네디 신화는 아직도 살아 있다.

그녀를 뒤쫓는 사람들의 발길은 1968년 10월 20일 그녀가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결혼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재클린은 케네디의 영원한 부인으로 작은 불길이 꺼지지 않는 알링턴국립묘소에 두사람이 함께 잠들었다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것은 선박왕 오나시스에게 재혼했다가 다시 돌아와 알링턴 국립묘지 케네디 옆에 묻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