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사람들

흑백사진으로 전해온 감정들 - 주명덕 (朱明德, 1940~)

Chris Yoon 2022. 4. 25. 07:05

 

내가 사진가 주명덕(朱明德)선생을 만난건 서른한살 무렵이었으니까 나보다 여덟살 더 많은 주선생의 나이도 서른 여덟, 삼십대말이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고 처음부터 선입견없이 만났었다.

당시 나는 화장품광고를 하기위해 P회사 사장으로부터 그와 함께 사진 촬영을 하라는 부탁으로 그를 소개받았다.

그때만해도 나는 서른살을 갓넘긴 아트디렉터로로서 충무로의 젊은 상업사진작가들과 어울려 다니며 일을하다가 주명덕(朱明德)선생을 만난다는것은 약간의 심적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심적부담은 첫 촬영을 하고나서 여실히 나타났다.

봄 시즌을 맞아 화장품회사들은 저마다 봄신제품을 내놓고 색조화장품에 주력을 두며 광고 삼파전에 불이 붙어 있었다.

나는 연록색 숲을 배경으로 전속모델을 크로즈엎시킨 案을 고심끝에 그려서 준비를 해가지고 광릉을 장소로 잡아 그를만났다.

그는 만나자마자 내 案은 무시해버린체 자신의 취향대로 모델에게 지시를 하며 전혀 Consept을 무시하고 촬영을 마쳤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촬영된 필름을 판독해보며 나는 어이가 없었다. 화장품광고 원고이다보니 모델의 피부톤과 색조화장품의 정확한 색조가 살아야하는데 그가 촬영한 사진은 분위기만 치중했으므로 모두 노출부족이었다.

나는 암담했다. 다큐멘타리 사진가였던 그가 상업사진을 모르는 것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그래서 그와 조율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며 심하게 다투고 충무로의 사진작가와 다시 재촬영을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악연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그를 다시만나 다시 일을 할 기회가 생겼다. 화장품회사에서 매달 개간되는 잡지를 그와 함께 하기로 한것이다.

그때 나는 알게되었다. 그가 인물 사진에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그 후, 나는 그에게 많은 신세를 지며, 그에게 배워가며, 그의 은혜를 입었다.

 

 

 

● 주명덕 (朱明德, 1940~)은 1940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47년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하였다. 경희대학교 사학과 재학 시절 아마추어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작가는 1966년 개최한 개인전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으로 으로 한국의 현대적 기록사진을 시작한 장본인이자 사진매체의 순수함을 지켜온 대표사진작가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1968년 월간중앙에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한 그는 '한국의 이방', '한국의 가족', '명시의 고향' 등 다수 연작을 선보이며 기록 사진 세계를 구축한다. 이후 한국의 자연으로 주제를 점차 확장해나가며 기록성을 넘어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그만의 시선을 작품에 담아낸다. 한국 기록 사진의 전통을 통합하는 동시에 대상을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현대적 의미를 확장한 그는 한국의 독보적인 1세대 사진작가로 평가받는다.

 

주명덕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초기작을 거쳐 한국의 공간과 자연을 ‘흑백의 미’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1968년에서 1973년까지 중앙일보사 기자를 역임하고, < 한국사진역사>전 운영위원장,사단법인 민족사진작가협회 회장, 제1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이 낳은 기지촌과 혼혈고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한미군 주둔기지 주변에 ‘기지촌’이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지촌은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 일쑤였다. 바로 기지촌이 성매매 성행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빈곤한 시기 직업소개소를 찾은 어린 여성들이 주로 기지촌으로 팔려왔으며 이들은 포주의 감시 하에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1960년대 한국 정부가 ‘윤락행위 등 방지법’에 근거해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지했으나 이 지역은 예외였다. ‘특정 윤락지역’이라는 이름 하에 전국 104개소의 성매매지역이 설치되었고, 이 곳에서 미군의 성매매는 사실상 허용되었다. 더 나아가 미군 측에서 성병에 대한 우려를 표하자 ‘낙검자 수용소’를 통해 미군위안부 여성들에게 비인간적인 방식의 성병검사와 치료를 강제하는 등 정부는 기지촌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외화벌이의 역군’ 또는 ‘민간외교관’이라고 치켜올렸으나, 대중에게 이들은 한국인도 아닌 외국남성에게 몸을 파는 ‘양갈보’ 혹은 ‘양공주’일 뿐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3년에 발표한 <기지촌 혼혈인 인권실태조사>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한국 사회 내에서 ‘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의’ 최하층계급”이었다고 한다.

 

미군 남성과 기지촌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또한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부계혈통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에서 혼혈아들은 오점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튀기’ 등의 혐오표현을 마주해야 했으며, 길을 가다가도 사람이 지나가면 얼굴을 벽에 묻고 숨어야 했다. 자신이 누군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학교에 가더라도 놀림을 받아 그만두기 십상이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더미, 미군들의 무책임한 태도,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위안부 여성들은 아이를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입양을 기다렸다.

 

주명덕 작가, '한국적인 전쟁'을 기록하다

당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 기지촌 여성들의 현실과 고아원 속 혼혈아들의 이야기들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 주명덕 작가였다. ‘사실성’과 ‘기록성’에서 사진의 가치를 발견한 그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불편한 현실을 가감없이 프레임 안에 담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회에게 질문을 던졌다.

혼혈고아를 그 대상으로 한 것은 우리의 현시점에서 사회와 국가와 민족이 다 함께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공동의 문제가 거기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긍정보다는 부정을, 밝은 이야기보다는 어두운 이야기는 매우 아픈 일이다. 고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두운 이야기를, 그리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문제점을 포착, 제시하려고 했다. 혼혈고아들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피어린 비극의 부산물, 그 책임을 이제 나는 누구에게 물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들을 되씹어본다. 6?25 전후 15년, 민족의식, 뒷처리… 이런 많은 의식 가운데에서 혼혈고아들의 문제를 들추어 내었을 뿐이다.

- 1969년 6월 주명덕

작가는 살롱사진이 유행하던 이 시기에 니콘카메라를 들고 한국사회를 누비며 묵묵하게 당시의 현실을 기록했다. 그를 통해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하던 이들의 삶을 조명하고,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시대의 증언이 되어 후대 관람객들이 이들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희미하게 기억되었다 사라지는 역사 속 소수자들에 대해 기억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 몸을 팔아야 했던 미군위안부들, 그리고 차별 섞인 시선 속 슬픔을 감내해야 했던 혼혈고아들. 벽에 걸려있는 이들의 사진과 눈을 맞추다보면 5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게 된다. 작가가 말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가치가 바로 이런 데 있는 게 아닐까.

 

홀트씨고아원, 1965-18, ⓒ주명덕

 

 

태생부터 희미했던 이름, 기지촌 혼혈고아

 

이 사진은 1965년에 주명덕 작가가 찍은 <홀트씨고아원> 시리즈 중 한 작품이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누나가 봉사하던 해리홀트기념고아원을 찾아가 만나게 된 혼혈고아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한다.

 

1966년 4월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던 이 작품들이 8월 8일까지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섞여진 이름들>이라는 큰 타이틀 아래 <운천>, <용주골> 등의 시리즈와 함께 전시되었다.

흑백 사진 속 동양과 서양의 느낌이 섞인 얼굴을 가진 아이가 물끄러미 프레임 너머를 쳐다보고 있다. 커다란 눈망울은 아이답게 천진난만하기보다 차분하고 담담하다. 마치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듯이. 혼혈아로 태어나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살아가는 이 아이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 앞에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다.

다만 슬픈 눈망울로 그 운명을 태연히 맞이할 뿐이다. 굳은살 같이 베긴 슬픔 속에 일찍이 성숙한 이 아이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 사진은 1965년에 주명덕 작가가 찍은 <홀트씨고아원> 시리즈 중 한 작품이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누나가 봉사하던 해리홀트기념고아원을 찾아가 만나게 된 혼혈고아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한다.

 

1966년 4월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던 이 작품들이 8월 8일까지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섞여진 이름들>이라는 큰 타이틀 아래 <운천>, <용주골> 등의 시리즈와 함께 전시되었다.

 

*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라는 문화예술 웹사이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9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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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집으로

집은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갈 수 있는 개인의 안식처이자 그 시작과 끝이 하나로 이어져 안심하며 머물 수 있는 곳, 삶의 흔적들이 몸을 이룬 그 곳은 한 사람의 고유한 존재방식입니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의 산과 들, 이웃과 함께 오가던 길, 집을 둘러싼 안과 밖이 서로 관계맺으며 세월을 따라 한 점에서 그 점을 둘러싼 우주로 점차 넓고 조화롭게 퍼져나갑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땅에 이어져 온 삶의 방식을 알기도 전에 현대 서구문명의 효율적이고 편리한 가치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고 매일 바쁘게 쫒기는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요.

물질적 가치로 환산되는 집이 아닌, 우리의 본향은 어디일까요.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오래된 찬송가의 그 시절보다 우리는 과연 안녕히 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전시를 준비하며 찾아간 안동의 작업실에서, 오래전 한 지면에 실린 작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 50대에 쓰신 <무엇을, 누구를 위해>라는 제목의 글에는, ‘나의 사진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진가로서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그의 공적인 소명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근원적인 질문,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오랜 질문이 그의 사진 속 말없는 풍경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선생님께서 긴 겨울을 지나 대동강 물이 녹는다는 우수 경칩에 안동 작업실의 물을 열고 사진 몇 점을 더 프린트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에게 암실은 사진가로서 가장 편안한 집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80년대 작가가 직접 인화한 초기 사진들과 바로 몇 주전 암실에서 새로 만든 프린트가 함께 있습니다. 전시를 위해 고른 사진들을 보며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소소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사진을 보지만, 이 사진들은 선생님의 발자욱이고 삶의 기억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021년 닻미술관의 첫 전시로 우리 땅에 닿은 빛의 기록자, 한국 현대사진의 아버지 주명덕 선생님의 <집>을 준비했습니다. 좋은 사진은 기억을 불러내고 그것을 기록한 이가 바라본 시선의 온도를 전합니다. 사진 속 집을 둘러싼 빛과 바람, 보이지 않는 공기에는 작가가 오래도록 지켜 온 이 땅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마음만은 풍족했던 옛 삶의 모습이 담긴 그의 사진 속 <집>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주상연_닻미술관 관장

 

 

 

 

 

고산문화재단은 2017년 10월21일부터 28일까지 석왕사 천상법당에서 주명덕 사진전 ‘고산스님’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회는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대가 주명덕 선생이 2017년 4월부터 9월까지 지리산 쌍계사, 부산 혜원정사, 통영 연화사, 부천 석왕사에서 고산스님을 촬영한 작품 42점이 전시되었다.
예술작품에는 ‘생명성’이 가장 중요하다.
작은 풀잎 하나하나에도 살아있는 생명성을 표현해내는 주명덕 선생은 선,교,율 뿐만 아니라 사판의 교화까지 겸비한 근대 선지식인으로서 추앙받고 계신 고산 대종사님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었다.
전시회와 함께 도서출판 반야샘에서 주명덕 사진집 ‘고산스님’과 2018년 달력이 함께 출판되었다.

 

고산스님
쌍계총림방장 고산큰스님께서는 1948년 사미계를, 1956년 비구계를 받은 이후, 기도와 정진을 쉬지 않고 경經, 율律, 론論 삼장을 습득하셨다. 1961년 당대의 대강맥으로 알려진 고봉高峯 큰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고 김천 청암사, 부산 범어사 등의 강원에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1972년에는 만하승림 성월 일봉 영명 동산 석암錫岩 대율사로 이어진 계맥을 범어사금강계단에서 전계傳戒를 받아 대한불교 조계종의 전계대화상을 역임하셨다.

 

 

 

이제부터는 나와 주명덕선생의 이야기다.

엄밀히 다큐멘타리사진과 상업사진은 차이가 있다.

다큐멘타리사진은 연출없이 그대로 찍어야 진가가 더 사는것이고 상업사진, 그 중 특히 화장품광고 사진은 연출을 하면서 하루종일 찍어야한다. 조명과 모델의 표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촬영도 피부톤과 색조를 살리기위해 조명도 간접조명을 써야하고 촬영하면서 노출계를 이곳저곳에 촬영들어가기 전 수십번 재야한다.

나는 주명덕선생에게 내가 의도하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했고 주명덕선생도 금방 알아듣고 내가 원하는 쪽으로 촬영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우리 둘은 차츰 익숙해지고 친해질 수 있었다.

아래 사진들은 회사에서 다달이 발간한 잡지들로 무척 많은 수량을 인쇄했던 중요한 홍보책자였다.

한때 유명했던 인물들이다. 생존해있는 나이가 든 여배우들도 있고 이미 타계한 여배우들도 있다.

그리고 금방 데뷰했던 트랜드가 딱 맞는 패션모델들도 있었다.

아니, 모두다 신인들이었거나 무명들이었다. 화장품 모델은 이미 스무살만 넘으면 환갑이라고 했었으니까.

나는 이들을 과감하게 기용하여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아무튼 한달에 한 명씩 저 유명인들을 찾아내느라고 나는 무척이나 애를 썼었다. 

 

 

83. 8. / 영화배우 김진아 : 처음으로 카메라앞에 섰던 김진아. 이 사진을 촬영한후 화장품광고 모델로 영화배우로 유명해졌다

83. 9. / Talent 김청 : 이때만해도 신인이었다.

83. 10. / 패션모델 변승미 : 무척 개성이 있는 패션모델이었다.

83. 11. / 미스롯데 김혜영

83. 12. / 1979년 미스코리아 진 겸 패션모델 서재화

84. 1. / Talent, 영화배우 한혜숙

84. 2. / Talent, 영화배우, 방송인 김미숙

84. 3. / 패션모델, 영화배우 유혜영

84. 4. / 영화배우, 원미경

84. 5. / 가수 이경미 : 현재 비구니로 유명. 처음 이봉조선생님이 표지모델로 써달라고 데리고 왔었다.

84. 6. / 패션모델, 영화배우 김부선

84. 7. / 패션모델, 오혜경

84. 8. / 1977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희

84. 9. / 영화배우 오수미 : 신상옥감독의 숨겨진 여인으로, 사진작가 김중만의 아내로 유명. 하와이에서 자동차사고로 사망. 그의 여동생 패션모델 윤영실도 실종사.

84. 10. / 모델 이복희

84. 11. / 패션모델 한명수 : 개성있고 모델라인 이사로 있었음.

84. 12. / 패션모델겸 '파리애마'영화배우 유혜리

85. 1. / 영화배우 원미경

85. 2. / 원랑 / Model

85. 4. / 1978년 미스코리아 선 이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