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사람들

'한국 조각의 간판'이었다가 홀연 미술계에서 사라졌던 작가가..

Chris Yoon 2022. 4. 24. 01:29

사진집·시집 펴낸 강대철 조각가 - "수행하려다 특이토질 만나 [조각토굴] 지었으니 운명이죠"

 

20년전 미술계 떠난 조각가 강대철
전남 장흥에 대규모 조각굴 만들어.. 7개 100m 길이, 예수·부처 등 새겨

 

지난 10일 강화도 전등사에서 ‘관음전 점안법회’가 열렸다. 일반적인 불사의 하나일 수 있는 이날 법회에서 유독 눈길을 끈 것은 반가사유상을 닮은 ‘관세음보살상’의 독특한 형식만큼이나 남다른 조각가의 사연이었다.

“한마디로 경악, 그 자체였다. ‘한국 조각의 간판’이었다가 홀연 미술계에서 사라졌던 작가가 전남 장흥에서 토굴을 파고 수행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지난해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무려 7개의 토굴 속에 놀라운 조각품들이 새겨져 있었다. 예수가 석관에 누위있는 미륵불을 바라보고 있는 토굴입구 중앙홀의 조각부터 압권이었다.”

이번 관음전 불사의 자문위원을 맡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한국 최초의 조각토굴 미술관’을 발견한 순간이자 관세음보살상의 조각 적임자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처음엔 그저 십여평 정도 토굴집을 마련해서 인연 닿은 지인들과 차 한잔 나누며 마음을 어울리고자 했어요. 그런데 그 산기슭에만 있는 특이한 지질을 만나 꼬박 6년간 혼자 곡괭이질로 토굴을 파고 미친듯이 조각을 하게 됐죠. 한마디로 운명인 거죠.”

무려 17년 만에 작품과 함께 사진집과 시집을 낸 강대철(75) 조각가에게 ‘조각토굴 탄생기’를 들어봤다.

 

 

지난 4월10일 강화도 전등사 ‘관음전 점안법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회주 장윤 스님, 후불탱화를 그린 이수혜 작가, 강대철 조각가, 주지 여암 스님이 현판(성파 종정의 글씨)을 배경으로 함께했다. 김경애 기자

 

홍대 미대 나와 1978년 화려한 주목 / ‘한국 조각계 간판’ 27년 왕성 활동 / 2005년 성철 스님 기념물 이후 ‘은둔’
전등사 ‘관음상’ 맡아 17년만에 복귀  /
전남 장흥 사자산에 토굴 7개 완성 / “6년간 홀로 곡괭이질하며 ‘나’ 찾아”

 

좌 / 강대철 조각가는 2015년 전남 장흥 사자산 기슭에서 특이한 지질을 발견하고 곡괭이질을 시작해 6년간 7개의 조각토굴을 짓게 됐다. 살림출판사 제공 

중 / 강대철 조각가가 맨처음 토굴 입구 벽에 새겨 만든 ‘예수와 미륵불’.

전체 조각토굴의 주제가 되었다. 살림출판사 제공 

우 / 천정 높이 5미터에 지름 1미터의 하늘 창을 낸 토굴 입구의 중앙홀. 살림출판사 제공 

 

거대한 땅굴, 7년간 매일같이 그것도 혼자서 굴을 팠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돈벌이로 한 것도 아니다. 굴을 다 파놓고도 자랑은커녕 문을 닫아걸었다. 전남 장흥의 사자산 자락. 평범한 시골이지만 굴은 예사스럽지 않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갖가지의 조형물이 가득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거대한 지하 조각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면적 1650m²(약 500평) 규모에 굴 길이만 합쳐도 100m 정도는 될 것 같다. 굴 속 각종 이미지는 부조 중심으로 50가지 정도다. 한 작가의 구도자적 수행 공간으로 시작한 특이한 지하 현장이다.

 

주인공은 조각가 강대철이다. 한때 미술계의 혜성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는 1978년 중앙미술대전에서 ‘생명질’로 대상을 받았다. 고루한 구상 조각계에 신선한 새바람이었다. 그가 키운 ‘K 씨 농장의 호박’은 호박 가운데를 군홧발로 짓이겨 시대 상황을 상징하기도 했다. 경기도 이천의 조각공원을 조성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고, 개인전 등 작품 발표도 활발하게 했다. 1998년 페루 리마 국제 조각심포지엄에서 최고작가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선불교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작업은 수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예 수행 목적의 건물도 지어 도반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했다. 그런 결과였는지 해인사 백련암의 성철 스님 동상을 만들었고, 이는 경남 산청의 성철 스님 기념관 조형물로 이어졌다(2015년). 수행은 미술계를 떠나게 했고, 은둔 생활로 이어졌다. 강대철의 잠적. 은둔 생활은 작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지리산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옮긴 살림터가 현재의 사자산 자락 아늑한 곳이다. 이곳에 ‘차 마시는 방’이라도 하나 만들려고 땅을 팠다. 토질이 특이했다. 압착된 마사토와 황토는 그 나름대로 점력이 있고 견고했다. 양질의 흙을 만나는 바람에 높이 5m의 10여 평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명상의 방’으로 훌륭했다. 하지만 흙벽은 조각가의 삽질을 불렀다. 게다가 성철 스님 기념관 일도 끝냈기 때문에 여유가 생겨 본격적으로 굴 파기 삽질을 시작했다. 구불구불, 여기저기 굴을 팠다. 네 개의 굴을 파는 데 만 3년이 흘러갔다. 굴이 깊어지자 파낸 흙 버리기가 중노동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눈만 뜨면 땅굴 파기 작업에 매진했다. 흙 파기 작업 자체를 구도의 방편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술가의 길이나 구도자의 길이나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환갑 나이에 새로운 땅을 선택했고, 토굴 파기에 7년을 보내고, 이제 7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렀다.

“반복되는 곡괭이질 덕분에 어깨 위에 춤사위가 얹어졌는지 앉아서 쉴 때도 어깨가 들썩인다. 신명 난 이가 흥에 겨워하듯 들썩인다. 땅을 파는 곡괭이질이 나를 찾아가는 여행길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지를 모른 채 살아온 세월, 이제야 곡괭이와 더불어 대자유인이었던 나를 찾아가네.” 작가는 혼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토굴 입구에 조성한 ‘예수 재림’. 석관에 누워 있는 미륵불을 예수가 바라보고 있다. 범종교적으로 성자들의 메시지를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왼쪽 사진). 토굴 앞에 선 강대철 작가. 그는 “토굴을 완성하려면 2, 3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했다. 강대철 조각가 제공

 

제일 먼저 만나는 공간은 ‘예수 재림’, 그러니까 미륵과 같은 모습이다. 벽면과 바닥의 관 속에 누운 성상은 제도권 속에 갇힌 현실 풍자이기도 하다. 첫 번째 굴은 오온(五蘊)을 염두에 두고 굵은 뿌리 형태 위에 뇌의 형상과 해골을 조각했다. 뿌리는 생명의 근원이다. ‘나’의 실체를 찾아가는 실마리로서의 모습이다. 두 번째 굴은 석가모니불상을 조성했고, 세 번째 굴은 오온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식의 실체를 표현했다. 네 번째 굴은 무상관(無常觀)으로 백골을 선택하여 생사일여의 자각을 담았다. 이어 불교의 유식론의 근원을 염두에 두고 아뢰야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무의식의 세계를 의미한다. 거대한 뿌리 형상 곁에 경계의 대상으로 파충류의 모습을 넣었다. 화를 잘 내고 다투기 좋아하는 동물은 의외로 악어나 도마뱀 같은 파충류라 한 동물학자의 연구를 반영했다. 여섯 번째 굴은 길이만 해도 20m에 이르렀다. 여기에 고행상을 조성했다. 나무 뿌리 다발은 뇌 신경망과 같고 연기(緣起)의 어떤 구조와도 같다.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삶. 일곱 번째 굴은 법륜을 비롯해 뿌리 형태와 뇌의 구조를 새겼다. 좌뇌와 우뇌 가운데에 태아를 새겨 넣었다. 한마디로 ‘강대철 토굴’은 한 작가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그것도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의 방편으로, 조성한 특이한 공간이다. 대중적 호기심의 측면으로만 봐도 놀라움, 바로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미술계를 떠난 지 20년 이후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애초 치밀한 계획 아래 작업을 시작했다면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노동량을 계산했다면 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흙은 계속 삽질을 요구했고, 벽면은 갖가지의 조형물을 허용했다. 그래서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어두운 땅굴에서 외로운 작업을 수행해 낼 수 있었다. 위로가 되었다면 벽면 위의 감실에 켜놓은 촛불이리라. 깜깜한 땅굴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는 형상들. 거기에 한 은둔 생활자의 집념과 삶의 단면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반도 땅끝 자락에서 일군 경이로운 ‘지하 미술관’ 아니 ‘깨달음의 선방’이다. 강대철은 ‘장흥 토굴’을 마무리하고 근래 강화도 전등사를 위해 관음상을 제작했고, 곧 점안식을 거행한다. 1980년대 ‘날리던 조각가’의 화려한 변신이라 할까, 잠적한 작가의 조용한 개선이라 할까. 하지만 강대철의 ‘지하 미술관’을 공개하는 나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세속적 호기심만 자극하는 것 같아서 더욱 그렇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전남 장흥군 월암마을 사자산 기슭. 성인이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토굴 입구에 들어서니 지름 30m가량의 대형 원형 공간이 나타났다. 아치형 기둥이 돔 모양 천장을 받치고 있고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내부를 밝게 비췄다.

한쪽 벽면 조각상이 눈길을 끌었다. 나무 뿌리로 둘러싸인 석관 안에 누워있는 부처를 예수가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주위에는 허리를 굽혀야 지날 수 있는 작은 입구들이 있다. 그 안에는 총 길이 100여m에 이르는 크고 작은 토굴 7개가 서로 이어져 있다. 각각의 토굴 안에는 나무뿌리, 해골, 동물 등을 형상화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반가사유상 등 불상을 새겨 놓은 공간은 현대의 석굴암 같은 느낌이다.

 

 

강대철씨가 21일 전남 장흥군에 직접 만든 토굴에 앉아 있다. 안쪽으로 반가사유상이 보이고, 벽면에는 나무뿌리를 표현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그는 “근원의 자리를 찾는 명상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했다. /김영근 기자

 

전남 장흥군 월암마을 사자산 기슭. 성인이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토굴 입구에 들어서니 지름 30m가량의 대형 원형 공간이 나타났다. 아치형 기둥이 돔 모양 천장을 받치고 있고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내부를 밝게 비췄다.

한쪽 벽면 조각상이 눈길을 끌었다. 나무 뿌리로 둘러싸인 석관 안에 누워있는 부처를 예수가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주위에는 허리를 굽혀야 지날 수 있는 작은 입구들이 있다. 그 안에는 총 길이 100여m에 이르는 크고 작은 토굴 7개가 서로 이어져 있다. 각각의 토굴 안에는 나무뿌리, 해골, 동물 등을 형상화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반가사유상 등 불상을 새겨 놓은 공간은 현대의 석굴암 같은 느낌이다.

대규모 ‘조각 토굴’을 만든 이는 조각가 강대철(75)씨. 21일 만난 그는 “나의 종교관을 표현하고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7년째 토굴을 파고 조각 작품을 만들고 있다”며 “계획을 정해놓은 게 아니라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토굴과 조각을 추가해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20여 년간 미술계에서 이른바 ‘잘나가는 조각가’였다. 월남전 참전 후 홍익대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1978년 국전(國展) 문공부 장관상, 1998년 페루 리마 국제 조각 심포지엄 최고작가상을 받았다. ‘황영조 동상’으로 알려진 스페인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의 마라토너 동상도 강씨 작품이다. 그러나 2002년 돌연 미술계를 떠나 산중 생활을 시작했다. 지리산 생활에 이어 2005년 지금의 장흥 사자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언제부턴가 저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분들의 요구에 맞춰 조각을 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돈과 명성은 얻을 수 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은 이런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미술계를 떠났습니다.”

2015년 토굴을 처음 팔 때 계획은 10여 평 남짓 작은 토굴을 만들어 명상 공간으로 쓰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흙을 파다 보니 조각을 하기 좋은 지질이 이어져 나왔다. 조금씩 조각을 새기며 확장하다 보니 현재 규모가 됐다. 직접 포클레인으로 흙을 퍼내 큰 원형 홀을 만들고 시멘트로 구조를 안전하게 만든 뒤, 다시 삽과 곡괭이로 7개의 작은 토굴을 파들어갔다. 그는 “수없이 곡괭이질하고 쌓인 흙들을 밖에다 퍼나를 때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진다”며 “그 자체가 신성한 명상이더라”고 했다.

강씨는 최근 자신의 토굴과 그 속의 조각들을 소개하는 사진집과 작업하며 느낀 감상을 담은 시화집을 동시에 펴냈다. 사진집에 해설을 쓴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강씨의 토굴을 “경이로운 지하 미술관”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아직은 토굴을 일반에 공개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내 명상을 위해 만든 공간인데 대중에게 공개해 돈이나 명성을 얻으려 한다면 미술계 떠나기 이전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도자기를 하는 부인과 함께 / 강대철 조각가가 판 7개의 조각 토굴

 

 

강대철 조각토굴(강대철, 살림, 2만5000원)=조각가로 활동하다가 홀연히 전남 장흥으로 떠난 강대철이 사자산에서 6년간 토굴을 판 과정을 기록했다. 본래는 30㎡ 정도 되는 조용한 공간을 마련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독특한 느낌의 흙이 보이자 호기심이 일어 토굴 파기를 지속했다고 설명한다.

 

 

 

 

 

 

 

강대철조각가와 나는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졸업했다.

그는 월남전선을 다녀와 대학을 늦게 들어왔으므로 내가 3학년때 1학년 신입생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았다.

그는 내가 대학 미전에 출품할 작품을 할때 전날 술을 잔뜩 퍼마시고도 취기가 있는체 이튿날 나와서 내 작업을 도와 주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어찌어찌하다보니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눈빛 하나로도 그의 심중을 알게 되었고 나보다 더 연장자로 어느새 그는 내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나는 군대에서 외출을 나와서도 학교앞 작업실에 있는 그를 찾아가곤 했다.

그리고 내가 직장에 들어가서 신입사원 생활을 고달프게 할때도 술집에서 만나 어느정도 술이 올라서 늦게까지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때 세검정에 집을 짓고 산다면서 비가 온후에 누워있으면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졸 귀에 들린다면서 퍽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월남전 전투에서 있었던 피묻은 이야기를 술이취해 웃으면서 해주었다. 나는 그때 그의 눈을 보면서 섬뜩함을 느꼈다.

그후 그는 고향 이천으로 들어가서 그 넓은 이천의 땅에 호박농사를 지으면서 주제를 호박으로 작품을 만들어 개인전을 열기도했다.

몇년후 나의 직장생활도 자리를 잡자 나는 이천으로 두 번 그를 찾아갔다.

그는 소설가 이문열씨와 이웃해서 황토흙으로 명상센터를 크게 짓고 후배들을 양성하며 베지테리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항상 그의 끽다연(喫茶緣 : 차 마시는 방)에는 황토벽에서 좋은 에너지가 풍겨나오는듯했고, 향냄새가 피어올랐고, 가끔씩 날이 궂은 날에는 페치카에 불을붙이고 넓은 끽다연에 앉아 도자기를 빚는 그의 부인이 손수빚은 자기접시에 식물성 음식으로만 만들어진 점심을 먹었다. 따라서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갈때는 생명이 있었던 것들은 어림도 없고(심지어 그의 식탁엔 멸치를 넣은 반찬도 없었다) 다시마 라던가 건미역, 말린 나물같은 것들만 사들고 갔다. 

그리고 몇년후 그는 홀연히 떠났다.

가끔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지리산으로 떠났다는 말도있고 종교미술에 집착하며 돌아가신 성철스님의 동상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미련을 버리고 훌훌 떠나간 사람, 구태여 연락을 안해도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리라 생각하며 가끔씩 그를 생각하며 나도 나이를 먹었다.

그러다 오늘 인터넷으로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본 그는 이제 도인이 되어있었다.

긴 흰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흰 수염을 기르고 7년간 토굴을 팠다는, 그것도 그냥 토굴도 아니고 7개의 토굴에 예수와 부처가 들어가있고 절묘한 나무뿌리같은 그의 특징있는 조각이 벽면을 가득메운, 어찌보면 유럽의 어느 신전같은 토굴을 파고 詩와 사진을 실은 명상도서 '강대철 조각토굴'이라는 출판물을 냈다고.

인터넷 신문으로 그를 검색해 보면서 나는 그와의 추억과, 감동과, 그와의 그동안 멀어진 거리감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디서 무엇이되어 다시 만나랴... 나는 불교적인 질문을 혼자 던져본다.

 

- Chris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