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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 in Venice (베니스에서의 죽다)와 5th Symphony of Gustav Mahler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Chris Yoon 2021. 10. 23. 03:57

Death in Venice / Morte a Venezia (1971)

베니스에서의 죽음

 

 

베니스의 죽음 ( Death In Venice, Morte A Vinezia , 1971)

; 또다른 제목 / 베니스에서 죽다.

 

이탈리아,프랑스/드라마/130min

 

감독 : 루치노 비스콘티

출연 : 더크 보거드, 비요른 안드레센

원작 : 토마스 만

 

 

<베니스의 죽음>은 토마스 만의 원작을 영화한 것인데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작가 토마스만을 동시에 묶어주는 명작이다.

중년의 음악가가 베니스에 도착하면서 미소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에 빠지며 그 애절한 사랑을 못다하고 서서히 죽어간다는 내용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고명한 명예를 얻은 늙은 작가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가 여행을 떠났다가 베네치아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거기서 어리고 아름다운 소년을 사랑하게 된다. (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소년은 그를 모른다) 그래서 소년을 좀 더 보려고 전염병이 도는 베네치아에 계속 머무르다가, 소년은 가족들과 떠나고 아센바흐는 죽는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 죽다>를 읽어보면 아센바흐의 캐릭터는 이렇다.

 

p305

재능있는 자가 정신의 품위를 의미심장하게 대변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사회에서 결국 권력과 명예를 얻을 때까지, 아무데도 상의할 곳 없이 가혹하게 혼자의 힘으로 고통을 겪고 투쟁해야 하는 성격을 지닌 고독이라는 궁정 예법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재능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데는 얼마나 많은 유희며 반항이며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센바흐가 내보인 것에는 무언가 공적이고 교육적인 요소가 들어가게 되었다.

나중에 가서 그의 문체는 거리낌 없는 대담함과 미묘하고 신선한 음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대신 표준적이고 고정된 문체, 세련되고 전통적인 문체, 보존적이고 형식적이며 심지어는 상투적인 문체로 변해갔다. 그리고 루이 14세가 그랬다고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듯이, 나이가 들어가는 그 작가는 자신이 쓰는 용어에서 천박한 단어를 모조리 추방해 버렸다.

 

이런 남자가 어느 날 길에서 인피모자를 쓴 남자를 보고 여행의 충동을 느낀다.

 

p298

잠시 휴식을 취하는게 필요했다. 여름을 그럭저럭 견뎌 내고 생산적으로 만들려면 즉흥적인 삶,

빈둥거리는 생활, 먼 곳의 공기, 새로운 피의 수혈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는 거다.

그는 이런 생각에 만족했다. 아주 멀리 가지는 않더라도, 호랑이가 사는 곳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침대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매력적인 남쪽의 어느 세계적인 휴가지에서 서너 주 동안 낮잠을 즐기면서 말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전차가 웅어러 거리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전차에 올라타면서 오늘 저녁에는 지도와 안내 책자를 들여다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센바흐가 애초에 베니스를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고, 이리저리 향하다보니 베니스가 되었다.

베니스는 즉흥성, 빈둥거림, 먼 곳, 새로운 피로 규정된, 이곳이 아닌 그 어떤 모든 곳의 총체가 된다.

그러나 이곳이 아닌 그 어떤 곳으로서의 베니스의 풍경은 실제로는 굉장히 추하다.

전염병을 실은 열풍이 돌고, 더위가 가시질 않으며, 자격 없는 뱃사공과 아첨하는 호텔 지배인과, 화장으로 늙음을 감춰주는 이발사와 짐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그런 곳이다. 아름다운 것은 소년뿐이다.

 

아센바흐가 늙었고, 죽는다는 결말에 비춰 생각해보면, 이 여행은 일종의 인생의 종막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에의 비유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이 아닌 그 어떤 곳에서 죽음에 직면했다는 상황은 정상적인 삶으로부터의 이탈이기도 하고,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규범 체계에 지배되는 상황에서라면 인정하지 않았을, 내면의 본질적 욕망을 인정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베니스는 거대한 죽음을 도시공간으로 바꾼 듯한 이미지다.

모든게 끝장나 있다는 이런 암시가 너무 강해서, 동성애는 둘째치고, 미성년자를 향한 소아성애의 암시를 진하게 풍기는 사회적으로 죄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연애담마저 심정적으로 자연스럽게 용인하게 만든다. (분위기는 용인인데, 토마스 만 소설의 문장은 그렇지않다. 사색들이 너무 길어서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 들여진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소설로는 내가 읽어본 것중에 이보다 더 관념적인 건 없는데, 그래서 소설의 종결 부분에,

소년이 친구와 놀면서 당하는 굴욕, 진흙에 얼굴을 처박혀 버둥대는 것을 아센바흐가 목격하는 장면을 볼 때의 해석이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 습한 날 보면, 꽤 에로틱하게 보이고, 마른 날 읽으면, 지극히 건전하게 보인다.

소년의 얼굴이 거세되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이 자세가 암시하는 건, 에센바흐의 짝사랑이 마침내 정신적인 것에서 신체적인 것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현실의 섹스, 마침내 구체화된 성욕에의 암시인가?

아니면 플라토닉한 연심이 죽음과 노화로 인한 신체적 무능력, 아니면 구해줄 수 없음 때문에 완전히 소실해서 그 열기를 꺼뜨리고 죽음을 맞는다는 그런 암시일까?

그런데 소설 첫 부분에 아센바흐가 인피 모자를 쓴 청년을 보고 여행을 결심하고, 베네치아에서 소년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가 청년을 지나쳐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소설의 서술방식이, 소년에 대한 아센바흐의 사랑이 유년기나 생의 애착을 상징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그도 그럴것이 아센바흐는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소년의 얼굴, 소년의 미소, 소년의 몸에 반하는데 소년이 한번 웃어 주는것 뿐이고, 서로 인사하고, 말을 트고,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고, 수작 좀 부리다가 침대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장면은 한번도 없다. 이렇게 정신적인 측면이 완전히 부재했으나, 그렇다고 소년과 섹스를 원한다는 구체적인 묘사도 없어서, 아센바흐의 소년에 대한 집착은 다분히 소년의 용모가 상징하는 젊음과 지나간 청춘에의 갈망처럼 읽히는 것이다.

 

그는 소년을 진짜로 사랑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상실해버린 인생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라면 소년을 향한 금지된 열정은 되돌이킬 수 없는 삶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 열정과 포기할 수 없는 끈덕진 애착같은 것이 될 것이다.

 

소설은 그런데, 영화는 좀 더 직설적이고, 구체적이다.

영화 속에서 아센바흐는 프로페서 구스타프라고 불리우는 음악가다. 말러가 모델이라는데, 말러의 음악들이 영화가 끝날때까지 내내 떠나질 않고 맴돈다.

구스타프의 시선을 따라가는 카메라가 계속 소년을 잡고, 소년은 틈틈이 이쪽을 돌아본다.

살짝 비껴서, 교대로 잡히는 소년과 남자는 서로 암묵적으로 의식하고 있으며, 심지어 소년이 이쪽에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까지 한다. 구스타프의 분장은 그를 추하게 보이도록 할 뿐이라서, 카메라가 소년을 잡지 않을 때는 그 사랑의 불가능성이 너무나 분명한데, 소년이 눈에 들어오면 자신의 그런 몰골을 잊고, 더불어 그런 카메라와 시선이 일치하는 관객은 현실을 기억하면서도 함께 잊는다.

 

죽음과 질병과 공허로 가득한 베니스의 건물들의 흐릿한 색조는 이 늙은 남자와 일체처럼 어우러지는데, 그 풍경이 바로 이 남자같아서 그 외양의 추함이 확대되고, 그 내면의 욕망이 더욱 간절하게 보인다.

반면에 빛과 어우러지는 바다와 모래는 자연의 생명력으로 빚어낸 듯한 소년의 이미지와 어우러진다.

구스타프가 소년에게 느끼는 사랑은 완전히 신체적인 것이고, 그래서 정신적인 의미도 없고, 깊이도 없지만

소설처럼 담백한 방식으로의 해석은 불가능한 건 배경음악때문이었다. 굉장히 질척하고 그런데도 비장해서, 강렬하게 따라 다닌다.

욕망에 대한 어떤 미화도 없다는게, 이 영화의 대단한 점이고, 지루한 점이고 그렇다.

양복에 타이까지 매고, 구두를 신은 채, 격식높은 차림새로 해변가를 거니는 이 남자는 자신의 외모로서 내면의 욕망을 재판하고, 비난한다. 결국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사랑의 실현가능성을 높여보고자 얼굴에 분칠하고, 입술을 붉게 바르고, 꽃을 꽂고, 흰 양복을 입은 순간, 그의 욕망이 그의 외양을 바꾼 그 순간에, 소년은 떠나고 그는 영영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영화의 중간에는 소년을 보고 그가 회상하는 과거 시점의 장면들도 예술가에게 타락이 필요한가 하는 직설적인 논쟁이, 소년에의 시선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걸 관객에게 친절하다 못해 거의 노골적으로 주입하듯이 해설하고 있기도 하고.

 

영화 속에서 실제 정사장면은 없고, 소년은 키가 꽤 크기 때문에 어린애라고는 말 못하겠으니, 소아성애도 아니고, 애를 너무 사랑해서 난도질했다는 치정살인도 아니고, 그냥 보기에 예뻐서 두근거렸다는 것 뿐이라고 덮어두고 싶지만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욕망, 그 어떤 사건도 행동도 유발하지 못하는 욕망이라서, 그 실현성의 완전한 결여가 욕망의 강도를 훨씬 더 높인다.

카메라의 심리묘사가 탁월해서 감정이입이 더 잘 된다.

 

구스타프의 내면세계와 감정적 리듬은 건물들이 그렇듯이 영화 속에서 베니스를 휩쓰는 전염병과도 어느 정도 파고를 맞추고 있다.처음엔 호텔측의 실수로 남게 된 거지만, 그는 병이 도는 것을 알고도 떠나지 않고, 떠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심하게 자각한다. 그 욕망의 부도덕성은 전염병의 존재를 소년의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하는데도 드러난다.

그것은 옳은 일을 가로막는 욕망이고, 따라서 타락이고, 퇴폐이며, 부도덕이다. 베니스와 같은 죽음에 가까운 도시이기에 꿈꿀 수 있는 긍정적 비현실이고, 베니스처럼 폐허이기에 아예 실현가능성이 없는 생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 모든게 공식처럼 딱 떨어진다.

 

병이 절정에 달하자, 소년이 떠나고, 구스타프는 죽는다는 결말은 거의 진부해 보일 정도로, 뻔하고 예측가능하게 이 영화의 모든 화면이 완전히 계산된 채 정교하게 다듬어져서 제공되어진다는 인상도 받는다.

 

소설은 단편이라 쉬이 읽히는데, 영화는 나한테는 좀 길다 싶기도 하다. 욕망을 규범과 어긋나는 '惡' 내지는 ‘타락’이며, ‘퇴폐’로 전형적으로 규정하는게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겨진다면, 나도 문제가 있는 정신적으로 피폐한 현대인은 아닌지...

 

토마스만과 비스콘티 감독 모두 동성애자였다고 한다

이영화가 소아애호증적인 동성애적 코드에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다 보니 보는 관객에 따라서는 다소 심기가 불편할 수도 있으나, 영화를 보다보면 비스콘티 감독의 특별한 아름다움에 대부분 매료되게 된다.

작가인 토마스만과 비스콘티 감독은 이 작품을 그저 '아름다움의 치명적인 매혹'으로 봐달라고 주문하는것 같다.

소설은 구스타프 말러가 모델로,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소설가이나 루치노 비스콘티는 말러로 바꾸어 음악가로 했다고 한다.

 

 

Thomas Mann / Gustav Mahler / Luchino Visconti

 

 

 

Mahler Symphony No. 5 - Adagietto [Herbert Von Karajan]

Mahler Symphony No. 5 - Adagiet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