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이야기

오래된 흑백사진 III - 오후

Chris Yoon 2022. 11. 12. 01:27

 

 

나는 이 사진을 촬영했던 장소와 시간대를 지금도 분명히 기억한다.

이곳은 난지도였다. 난지도가 지금은 수색근방의 하늘공원이 되었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땅의 역사가 몇 번 바뀐 전설적인 땅인곳이다.

작은 모래섬, 난지도.. 그곳에 서울시는 거대한 쓰레기하치장을 만들어 강을 메꾸고 공원을 만들었다.

1970년대에는 난지도를 가려면 수색에서 버스를 내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했다. 작은 나룻배는 난지도라는 섬으로 농사를 짓는 주민들과 거둔 농작물들을 실어서 건너다주었다.

일요일이면 사진애호가들이 함께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 모래밭의 땅콩농사를 짓는 모습이나 황량한 벌판에 나붓기는 가을억새들, 저녁햇살을 받으며 반짝이는 한강물살들을 찍다가 다시 해가지면 배를 타고 건너와서 수색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시내로 돌아왔다.

 

나는 폐허같은 모래섬을 걷다가 빈집을 지키고 있는 누렁이 한 마리를 보았다.

누렁이는 콘크리트벽에 줄을매어 놓고 하루종일 맑은 바람과 햇살에 말리는 호박꼬지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일어나서 경계를 하더니 이내 아무일도 없다는듯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다시 등을 동그랗게 말고 또다시 잠을 잤다.

공교롭게도 벽은 그늘과 양지로 나뉘어져있고 그늘과 양지속에 잠자는 누렁이와 푸성귀를 말리는 멍석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해가 너머가기전, 늦은 오후의 여유와 한가로움이 묻어나는 사진으로 같은 장소에서 연타적으로 셧터를 눌러 얻은 운좋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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