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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기 / Picasso(피카소)광장에서 짚시들의 Flamenco를.

Chris Yoon 2021. 10. 21. 05:57

모로코 탕헤르에서 시작되어 내리기 시작한 비가 스페인 말라가(Malaga)에 오기까지 그치질 않는다.

스페인에 도착하면서 전화를 하여 짚시들의 Flamenco Dance를 보기로 했다.

짚시 여자가 마중을 나왔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우산 한 개를 함께 받으며 말라가 시내를 걸어갔다

Flamenco Cafe는 피카소 광장 부근에 있었다. 나는 입장권을 구입하여 술을 한 잔 받아들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무대앞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붉은 조명이 켜지고 두명의 짚시 사내들이 나오더니 의자에 앉아 한 명은 스페니쉬 기타를 연주하고 한 명은 노래를 부른다. 아, 저 끊어질듯, 심장이 멈출것같은 노래.짚시의 노래에는 깊은 애환과 한이 서려있다.

 

 

이윽고 짚시 여인들이 4명 등장을 하더니 번갈아가며 스페니쉬 기타에 맞춰 춤을 춘다.

치마자락을 펄럭이며 때로는 치마자락을 내 코 앞에까지 던지며 짚시춤을 춘다.

그럴때마다 나는 스페인語로 "올레~"를 외치며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쳐준다

짚시 춤을 추는 여인들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슬픔에 젖어있다.

그녀들의 표정, 숨소리를 들어보라고 나를 데리고 온 짚시여인은 감상포인트를 짚어준다.

그렇게 30분간 춤판이 끝나면 그녀들은 퇴장하고 쉬는 시간을 준다.

그렇게 세차례의 무대가 계속된다.

그 사이, 스페니쉬 기타를 연주하는 사내는 계속하여 연주를 하며 무대는 이어진다.

 

 

누가 스페니쉬 댄스를 여성들의 전유물이라 말하는가? 우리는 잘 못 알고 있다.

세번의 짚시여인들의 Flamenco춤판이 끝나고 짚시 사내가 나왔다.

그리고 아주 격정적인 춤을 추는데 그야말로 절정에 오른 오늘의 하이라이트다.

게다가 짚시 사내의 노래가 높았다, 낮았다 고조를 타며 심장의 고동같이 묘한 박자를 타고 가슴속의 애끓음을 자극한다나는 애궂은 술만 마셨다. 무대가 끝날때쯤 그나마 그 술도 다 마시고 나는 약간 취기에 올라 있었다.

 

 

 

 

 

 

 

짚시 Bar를 나왔는데 비가 계속 내린다.

나는 우산도없이 걸어서 피카소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피카소의 동상이 있다.

스페인 말라가(Malaga)는 피카소의 고향이다.

나는 비오는 밤에 피카소의 동상을 끌어안고 열열히 입을 맞췄다.

피카소가 좋아서도 아니고, 그의 그림을 좋아해서, 예술가로서 존경을 해서도 아니다.

단지, 한 시대를 굴곡지게 살며 그때마다 현명하게 대처하고 현실과 타협도 받아드릴 줄 알아

재산도 많이 모았지만 결국 한 생애를 마친 한 사내로 받아드리기에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에서였다.

 

윗 그림소개 / Picasso, , 1937, 캔버스에 유채, 782 x 351cm,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박물관 소장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의 그림을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봐왔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그러나 막상 그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고 그의 그림이 '추상파'가 아니라' 입체파'라는 사실도 몰랐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초창기에는 극히 사실적으로 그려졌다는 사실도 많이들 모른다.
그는 굴곡많은 인생을 살며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극히 현실적이었다.

살아 생전에 그림을 가장 비싸게 많이 판 예술가이며 인생의 징검다리를 가장 잘, 아슬아슬하게 건너 간 화가이다.

그는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마르셀 뒤상(Marcel Duchamp)을 만났기 때문에 조형미술의 혁명적인 진전을 이루었고 20세기 미술의 거장으로 떠올랐다. 말년에 그는 벨라스퀘즈(Velazquez)의 미술과 고야(Goya), 푸생(Poussin), 마네(Manet), 쿠르베(Courbet), 드라크로와(Delacroix)의 작품을 벤치마킹해서 작업을 했지만모티브는 가져왔어도 역시 피카소답게 독창적인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위대한 화가치고 살아있을때 그림 한 장 잘 팔아 돈을 번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는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래서 훗날, 자손으로 부터 유산싸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6명의 상속자들이 싸움을 벌였다.그러면 간단하게 그의 굴곡많은 인생을 요약해 본다.

 

 

젊은 시절의 Picasso(좌), 老年에 손자와 함께 놀고있는 Picasso (우)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아버지가 미술교사인 집안에서 태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급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했고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대해서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했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 규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시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1900년 그가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다음 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끊임없이 연애를 하였는데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장밋빛 시대로 바뀌면서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던 시기에 만난 여성들에게 창조적 에너지를 얻었고 그의 미술의 시대적 분전도 이루어진다. 그의 연인은 총 일곱명이었다.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당시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입체주의의 출발을 의미하였다. 피카소는 이 시기부터 기존 회화의 화법을 탈피하고 극단적인 단순함과 기하학적인 표현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이후 입체주의가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할 쯤 피카소는 다시 종이, 헝겊, 톱밥과 같은 오브제를 사용한 새로운 형태로의 변형과 실험으로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어갔고 판화, 포스터, 조각, 도자기 등에도 손을 대어 새로운 기법을 보였다.

23세 때 만난 첫 여인을 시작으로 72세에 만난 자클린 로크까지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한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작품의 수만큼이나 여인들과의 염문도 유명하다. 살아생전에 경제적인 부와 명예를 누린 피카소는 그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7명의 여인들과 동거했고 2번 결혼했다.

 


* 나는 Picasso의 그림을 아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벽에 걸어두고 언제나 바라보고 싶은 그림은 아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그림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Picasso의 드로우잉인데 이런 종류의 그림을 몇 장 가지고있다. 그의 본능과 실생활에서 나온, 충실한 드로우잉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