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여행자의 詩

여인숙에서의 약속 - 이정록

Chris Yoon 2022. 3. 18. 05:47

 

 

여인숙에서의 약속       이정록

 

 

호텔도 아니고 여관도 아니고

주머니 탈탈 털어 여인숙에 들었을때,

거기서 내가 솜털 푸른

네콩 꼬투리를 까먹고 싶어

태초처럼 마음 쿵쿵 거릴 때,

슬프게도 나는 농사를 생각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어머니와 함께

농사짓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잠 좀 자자고 옆방에서 벽을 찰 때에도

나는 농사가 싫다고 말했다

네가 꼬투리를 붉게 여미고 살풋 잠에 들었을때에도

밭두둑 콩처럼 살기는 싫다고

슬픈 억척이 싫다고 나는 말했다

담장이나 울타리를 타고 오르는 완두콩도 싫고

일 잘하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며

며느리 밥그릇에 수북히 콩밥을 푸는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도 몸서리쳐진다고 말했다

여인숙 흐린 불빛 아래에서

나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너와 함께 땅 파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화물 열차가 지나가는

철로변 여인숙이었다.

 

 

 

아내와 아차산역에서 내려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구경하고 상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34평의 모델하우스는 마치 잡지책속의 사진처럼 모던하면서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담당직원과 상담을 나누고 돌아와 우연히 이정록시인의 [여인숙에서의 약속]을 읽었다.

묘하게도 연상되는 우리들의 신혼살림이 자꾸 떠오른다.

가난이 싫어서 고향을떠나와 직장생활을 하며 함께 살았던 젊은날들.

마치 철로변 여인숙처럼 남루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떠올리는것도 몸서리쳐진다고 이정록시인이 말했듯이

고향집에서처럼 땅파면서 살기는 싫었다.

그것은 또 다른 희망을 예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40여년. 우리는 많은것을, 아니 부족한 것이 없을만큼 모든걸 다 갖고있다.

죽기전까지 써도 다 못 쓸만큼.

그래서 먼저 죽을 내가 34평의 아파트 한 채를 아내 명의로 사주고

나머지 남는 시세차익은 내가 모두 써버리고 세상을 떠나려한다.   

 

그러나

호텔도 아니고 여관도 아니고

주머니 탈탈 털어 여인숙에 들었을때,

거기서 내가 솜털 푸른

네콩 꼬투리를 까먹고 싶어

태초처럼 마음 쿵쿵 거릴 때,

그때의 젊은 시절이 그립다.

우리는 그때 관악산 기슭 연립주택에 살면서

창문을 열면

관악산 기슭의 아카시아향기가 밤바람을 타고

침대 머리맡으로 마냥 들어왔었다.

 

- Chris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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