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사람들

시인 고은의 일기 / 바람의 사상

Chris Yoon 2021. 12. 4. 03:06

시인 고은의 일기 / 바람의 사상

교보문고에서 촬영

바람의 사상

 

저자 / 고은 지음 출판사 / 한길사| 2012.12.10 형태 / 판형 B6 | 페이지 수 1067 ISBN 10-8935662178
ISBN 13-9788935662173 정가 / 27,000 원

 

 

몇 일 전, Blogue로 정보를 나누는 분에게 신간서적 정보를 전해듣다가

고은 선생의 신보<바람의 사상>을 구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보문고를 찾았다

무려 1067페이지가 말해주듯 두터운 책의 분량에 우선 놀랐다. 가격도 조금 비싼 편에 속하는 27,000원.

그러나 이내 그 책이 말하듯 고은 선생의 몇 년간의 일기를 모아놓은 것을 알고 그 가격을 바로 인정했다

 

그렇다, 유신시대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써내려간 고은 선생의 일기...

시인 고은의 1970년대 일기 『바람의 사상』. 이른바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시인이 어떻게 역사의 풍랑에

휩싸이면서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문학가가 되어 가는지 정밀한 다큐멘터리처럼 기록한 책이다.

1973년부터 1977년 4년의 일기를 모은 이 책은 박정희 유신체제가 폭력화되어가는 과정과 그대로 겹친다.

냉정한 역사적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번뜩이는 시인의 아포리즘은 엄혹한 시대의 산 모습을 증언한다.

이 책에는 또 한가지 크게 놀랄 일이 있다

훗날 ≪만인보≫를 쓸 수밖에 없을 만큼 숱한 인물군상과 시대상황이 세밀하고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한국 현대의 정신사, 문화사, 정치사에 없어서는 안 될 기라성 같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풍경들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김병익, 김윤식, 박맹호, 김현, 황석영, 백낙청, 천경자, 박경리,최인호...까지 비롯하여

신문학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박목월, 서정주, 김동리 등에 걸쳐 이어지는 문단 인맥을 엿볼 수 있으니,

이는 개인의 삶의 역사가 아닌 현대문학사ㆍ정신사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정신을 바짝차리고 읽다보면 어느 페이지인가 나도 혹시 등장할지 모를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 시기라면 내 나이 스물아홉살에 고은 선생의 화곡동 저택을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915 페이지에 내 이름이 또렷이 올라와 있기 때문이었다

 

 

선희, 미스 황 그리고 윤석영이 사보 연재 마지막회 잡지 가지고 왔다

 

그랬다, 그날도 나는 여기자 두 명과 고은선생의 화곡동 집을 찾아갔었다

젊은시절부터 여성들과 다니는 버릇은 나의 주특기였다

생각난다. 선희는 시집을 갔는지 그후 조용하고 미스 황은 훗날 가격이 비싸기로 소문난 아기용품점<아가방>의

홍보이사가 되어 아주 오래도록 그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걸로 알고있다

 

윤(尹)이 내가 죽으면 건(巾) 쓰게 해달라 한다.

나를 아버지로 삼고 싶다 했다.

 

고은 선생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가 죽으면 건(巾) 쓰게 해달라 했다니...

희미하게 시작된 그날의 내 기억은 점점 또렷해진다

그랬다. 아들노릇을 하겠다고 했었다

巾 : 요즘은 검정양복에 검정 타이까지 매서 폼을 내지만 원래는 굴건지복 (屈巾持服)이라고 상복을 입고

겉에는 누더기처럼 헤진옷을 입고 구두도 신지않고 짚신을 신었다. 여기서 巾이라 함은 이를 줄여서 한 말.

 

세 연놈과 소주 서너 병 마셨다

 

참으로 고은 선생다운 적절한 표현이다

세 연놈,... 선희와 미스황 그리고 나를 두고 쓴 세 연놈...

이 얼마나 사랑스럽다는 표현인가?

그 연놈이 싫었다면 어떻게 소주 서너병을 나눠 마셨을까?

또렷이 생각난다. 화곡동 선생의 집을 찾았을때 이불을 돌돌말고 앉아 앉은뱅이 밥상을 앞에 두고

원고를 쓰던 선생은 부시시하게 일어나 앉은 내복바람이었다

그리고 옆에다 청주병과 잔을 두고앉아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내가 들어서자 한 잔을 건네 주었다

그러면서 "술은 3배이니라" 하시며 홀짝 마시면 또 한 잔, 또 홀짝 마시면 또 한 잔,... 이렇게 몇 잔을 주셨다

그리고 취기가 오르자 " 야, 尹가야. 노래 하나 해라." 하고 지그시 눈을 감고 들으셨다

고은선생이 썼다는 <가을편지>를 불러 드리자 "참 좋다. 참 좋아..." 하시며 흥에겨워 하셨다

그러다가 "에잇, 나가서 한 잔 하러가자." 하고 옷을 주섬주섬 입고 마당으로 나오면서 한참동안 가을 하늘을

올려다 보더니 " 아! 비릿한 가을냄새가 좋구나."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 말 뜻을 몰랐었다. 가을 냄새가 비릿하다니...?

그리고 조금 걸어나와 선술집의 연탄화덕이 있는 드럼통 가에 둘러앉아 돼지갈비를 구우며 소주 너댓병을

마셨었다

물론 선희와 은경이는 안마시고 옆에만 있다가 취한 나를 데리고 회사로 복귀했다

 

 

 

이 사진이 그날의 사진이다. 일기에는 11월30일로 기록되어있다

내 모습이 저토록 젊다 못해 어려 보이니 선생의 나이는 당시 40중반 이었던걸로 미루어 생각된다

그나저나 약속은 약속, 그가 죽으면 건(巾) 쓰게 해달라 했고 아버지라 불렀으니 약속은 지켜야 한다.

 

그의 일기는 그 후, 끝을 맺는다

그 이후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피곤하게 회사생활을 하며 저녁마다 고은선생의 화곡동 댁으로 전화를 걸어

그의 안부를 얻어 들으려 애썼다.

그러나 연락은 끊어지고 그의 소식은 다시 들을 수가 없었다

..........................

그리고 세월이 무수히도 흘렀다.

 

Chris Nicolas

 

 

허무주의에서 시작해 현실참여의 선봉이 된 시인 고은의 삶과 문학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다.

사진은 1957년 고은선생이 선학원에서 수도하던 시절과 최근의 모습(작은 사진). 한길사 제공

 

 

(9.33)

[바람의 사상] 고은, 그를 키운 건 8할이 술이었다

 

한길사에서 지난달 출간된 고은 선생의 일기 모음, <바람의 사상>. 1973년~1977년까지의 일기다.

1,000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양이지만, 내용의 80~90%가 ‘대취(술 마시고 크게 취함)’, ‘원고 몇 장 썼다’로

이어진다. 또한 유신 독재 하에서 고난과 핍박으로 얼룩진 한 때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끼고

5일 정도를 끙끙 앓았다. 선생의 말처럼, 일상의 배설이 무슨 의미가 있을 지 모르겠지만, 한 줄 한 줄 그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커다란 시의 숲, 그 뿌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고개 숙이게 된다.

 

먼저 고은 선생 얘기를 좀 하자면, 10년 동안 일초란 법명으로 스님으로 살다가, 환속 후 문단의 큰 줄기로써

시대를 함께 한 시인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당시 어린 나이에 문단의 거목으로 대접 받았으니,

한편으론 그 천재성(서정주 선생이 평하듯)을 엿볼 수 있고, 어쩌면 해방 이후 우리 문학계의 어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몇 해 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에 줄기차게 오르고 있는 고은 선생. 작년 모옌의 수상으로 어쩌면 기약하기

힘들 지 모르겠으나, 최근 행보를 보면 올해가 적기인 듯싶다. <만인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지속되고 있고,

작년 연말을 기점으로 일기 모음집 <바람의 사상>,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이 한길사에서 나왔다.

아마도 이 두 책은 시리즈로 묶여 고은 선생의 개인사와 문학사를 한데 묶어내는 훌륭한 저작으로 탄생할 것

같다. 또한 선생의 대표시 240편을 묶은 <마치 잔칫날처럼>과 아내 이상화 님에게 바치는 최초의 사랑 시집

<상화 시편>이 창비에서 출간됐다.

 

얼마 전 민음사 회장인 박맹호 님의 <책>을 통해 고은 선생과의 인연을 소개한 적 있다. <바람의 사상>에서도

동갑내기(박맹호, 이어령)와의 극진한 우정이 소개된다.

박맹호 님의 <책>이 한국 현대 출판의 역사를 조망했다면, <바람의 사상>은 한국 문단의 생생한 한 때를

풍경화처럼, 때론 인물화처럼 그려놓았다.

 

수많은 문인들이 등장한다. 언론인, 정치인, 목사와 수녀, 이름 모를 수많은 독자와 대학생 들도 등장한다.

1933년생인 고은 선생에게 1977년 당시 문단의 선배로 대접 받은 사람은 김동리와 서정주 선생 정도다.

물론 조연현, 모윤숙 등 친일 혹은 유신의 앞잡이 노릇을 한 선배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은 선생의 후배들이

일기의 면면을 장식한다.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문지 4K(김현, 김주연, 김병익, 김치수), 최인훈, 유종호, 이문구,

박태순, 조태일, 김지하, 염무웅, 강은교, 사슴 마담 인숙 등과의 일상(90% 이상이 술 마시고 대취한 내용)이

펼쳐진다.

 

청진동 일대가 문인들의 거리로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 1960~70년대 민음사는 한국 문학, 문인들의 인큐베이터

로써 자리했다. 지금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당시 민음사에서 ‘문학과 지성’으로 독립(?)한

김현(을 비롯한 4K)의 순수문학과 백낙청을 주축으로 한 ‘창비’의 참여문학의 대결 양상은 지금도 흥미롭다.

그 경계에서 자유롭게 술 마시고, 글 쓰고, 책을 냈던 고은 선생이 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여담이지만, 이 책에서 ‘디오니소스’란 단어가 대략 6~7회 등장한다. 그만큼 술을 좋아했던 고은 선생이다.

‘아폴론의 밤, 디오니소스의 밤’의 열락을 즐겼던 그이지만, 문학에 대한, 시에 대한 명징하면서도 자기 파괴적인

분투는 끝없이 이어진다. 술 마시는 것만큼이나 매일 청탁원고를 쉼 없이 써 내려가고, 간간히 찾아오는 시들에

스스로 감동하기도 한다. 매일 같이 술을 그리 마시면서도 흔들림 없이 글을, 그것도 한차례의 퇴고도 없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순발력과 체력과 필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각종 강연 요청에 나가고,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나가고, 시국 선언 등에 앞장 서고, 또 책을 읽고, 또 글을 쓰는… 그러면서도

술독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란. 딱 내가 꿈꾸던 삶이었다.

 

어쩌면 유신 독재 체제 하에서 가장 극심한 감시를 받았던 문인 중 하나였기에 엄혹한 현실을 이기는 데에

술만한 친구가 따로 있었을까 싶다. 일기에 기술된 ‘남산’의 감시 체제는 혹독하기 그지 없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주변 문인들과 출판사, 잡지사를 조정하는 빅브라더의 면모란.

 

일기는 정확히 1977년 4월 11일로 마무리된다. 만약 일기가 이어졌다면 1979년 10월 26일 독재가 무너진 날

(물론 전두환의 뜬금없는 군부독재가 새롭게 시작했지만) 이후의 그의 일상을 알 수 있었을텐데….

독재의 칼날 같은 검열로, 육필 원고의 보전 문제로 많은 분량의 글들이 유실됐지만, 이렇게라도 시대의

어두운 현실과 그에 어우러지는 시인의 삶, 그 단초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는다.

 

일기를 읽어가며 스마트폰을 옆에 끼고 있었다. 등장하는 문인들을 일일이 검색하다 보니 책 읽는 속도도 더뎠다.

언급된 문인 태반이 이미 영면했다. 특히 고은 선생이 가장 아꼈던 후배이자 소설가였던 이문구 님은 예의 불을

가슴에 품은 사나이였다. 그 밖에도 몰랐던 당시 문단 상황을 되짚으며, 오해했거나 과대 평가했던

몇몇 문인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박목월이나 조연현, 모윤숙 등과 같은.

 

2012년이 다산을 읽는 해였다면, 2013년은 고은 선생의 작품과 함께 하고 싶다. <바람의 사상>을 기점으로,

<두 세기의 달빛>을 거점으로 <만인보>와 그의 전집, 그외 출간된 다양한 산문과 평론 들을 읽고 싶다.

비교가 적절한 지 모르겠으나, 고은 선생은 조지 오웰과 이백, 이상이 두루 체화된 하나의 ‘꽃’이 아닐까 싶다.

 

예전 홍지웅 님의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를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한 사람의 생애를 엿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도 드물다. 하지만 평전이나 자서전과 같이 누군가에 의해 덧대어진 삶은 무미건조하며, 울림이 적다.

외려 고은 선생의 일기처럼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닌, 팩트 위주의 소소한 기록이 더 진심에 가깝다.

 

술 마시고 주사를 부린 몇몇 장면(지금으로 보자면 진상에 가깝지만^^;), 문단 대선배인 김동리와 서정주와

대거리하는 장면, 자신보다 10여 년 이상 선배인데도 ‘00야’하며 부르는 배포, 민음사에 ‘사슴’ 술집을 내게

도왔던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술과 술과 술, 사람과 사람과 사람이야기, 최근 변절(?)로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시인 김지하에 대한 애틋한 마음, 알 듯 모를 듯 이어지던 이상화 님과의 연정… 이

1,000여 페이지의 일기 속에 스미듯 묻어있다. 결국 1976년부터 그를 살릴 건, 숙자였다.

 

Blogue yes24.com 에서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