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팔(望八)이 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의전을 관리하는 절차도 세련되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 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옹기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갔다.
원통하게 비명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는다.
부모를 따라서 화장장에 온 청소년들은 대기실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우리는 호상(好喪)입니다"라며 문상객을 맞는 상주도 있었다.
그날 세 살 난 아기가 소각되었다. 종이로 만든 작은 관이 내려갈 때, 젊은 엄마는 돌아서서 울었다.
아기의 뼛가루는 서너 홉쯤 되었을 터이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체의 먼 흔적이나 그림자였다.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죽으면 말의 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하듯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은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게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 딸아, 잘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정도면 어떨까 싶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스스로 '광야를 달리는 말(!)'을 자칭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미안허다.
를 남겼다.
한 생애가 4음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 더 이상 짧을 수는 없었다.
후회와 반성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좋은 유언이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었고, 대책 없이 슬프고 허허로워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퇴계 선생님은 죽음이 임박하자
― 조화를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라는 시문을 남겼고,
임종의 자리에서는
― 매화에 물 줘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제자들이 기록했다.
아름답고 격조 높은 유언이지만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드려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김용택의 어머니 박덕성 여사님한테서 직접 들었다. 몇 년 후에 김용택의
시골집에 가봤더니 그때까지도 연탄보일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퇴계 선생님, 김용택의 아버지,
이 세 분의 유언 중에서 나는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유언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
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정도 유언이 나오려면, 깊은 내공과 오래고 성실한 노동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죽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한다.
의술의 목표는 생명이고, 죽음이 아니다.
이국종처럼, 깨어진 육체를 맞추고 꿰매서 살려내는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충분히 다 살고 죽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품위 있게 인도해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파이프를 꽂아서 붙잡아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나는 행복한 사람 천하를 통일하고 불로장생 살고싶어 만리장성을 쌓았던 중국의 "진시황제나",
로마의 휴일에 공주역 으로 데뷰하여 오스카 상을 탄 아름답고 청순한 이미지의 "오드리 햅번",
권투 역사상 가장 성공하고 가장 유명한 흑인권투 선수 겸 인권운동가 "무하마드 알리",
연봉을 단 $1로 정하고 애플을 창시하여 억만장자가 된 "스티븐 잡스",
철권 통치로 영원히 북한을 통치할것 같았던 "김일성",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났다.
재산이 13조로 가만 있어도 매달 무려 3천억원의 돈이 불어나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도 병상에 누워있다 결국 고인이됐다.
"이렇게 화려하게 살다가 떠나간 사람중 누가 부럽습니까..?"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고,
또 카톡도 즐기며, 이렇게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닐까요?
*망팔望八은 71세를 뜻합니다. 고희古稀 다음 해이지요.
48년생인 김훈선생이 71세에 진입하며 쓰신 글인 듯.


오래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김훈선생의 단편 '화장'을 읽고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사람이 문학서적을 읽는다든가, 창작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연령이나 시대의 트랜드를 따라서 변하게 되어있다.
원래 김훈선생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화장'이전에 쓴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을 읽고 솔직한 작가의 생각과
거침없는 문체에 무척이나 매료당해 있던 터였다.
어느 해 4월 벚꽃 핀 전군가도 (全群街道 : 전주-군산 도로)를 달리다가, 꽃잎 쏟아져 내리는벚나무 둥치 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열려지는 관능에 진저리를 치면서 그것이 꼭 육신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으며 여자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었고, 그 그리움의 대상이 인간의 여자였다 하더라도 무방했으며, 들개나 염소의 암컷이라 해도 역시 무방했을 것이라는,
그것은 말하자면 종(種)과 속(屬)으로 구획되기 이전의 만유(萬有)의 '♀'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며, 그 그리움을 감당해내기 위해서라면 굳이 인간의 '♂'이 아니라도 또 한번 무방하였을 것이라는, 자신의 벗은 몸을 내던져 그 난해한 세계와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면 자신이 수캐라도 좋았고 염소라도, 수탉이라도 좋았을 것 이라는 그의 글에 공감을 했었다.
그리고 2004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 <화장>을 읽고는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다.
나의 내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전전긍긍했다.
하나의 텍스트가 나의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와 작렬하는 느낌, 감수성의 가장 예민한 곳으로 파고 들어와 찌르고 문질러대는 느낌. 김훈의 소설은 하나의 비수요 뇌관이었다.
김훈의 소설, 「화장」에는 두 개의 육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시들어 가는 육체요, 하나는 피어나는 육체다.
시들어 가는 육체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피어나는 육체는 연정을 불러일으킨다.
신파는 대체로 후자를 선호하고 도덕주의자는 전자를 선호한다. 김훈은 그 두 개의 육체를 교차시킨다.
욕망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연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연민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성찰과 반성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화장」은 성숙한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탐스런 육체를 바라보는 늙지 않는 욕망, 그 불꽃의 ‘에네르기’가 행간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2년 동안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내의 몸은 똥내, 지린내…. 악취의 창고다.
간병인은 아내의 기저귀를 갈아 채울 때마다 향을 피우고 마스크를 쓴다. 아내를 돌보는 사이에 그는 그가 맡은 음식의 냄새가 과연 음식의 본래 냄새인가를 의심하게 된다.
어쨌든 병든 아내의 몸에도 한때는 젊음의 싱그러움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한때는 그 몸에도 놀라운 탄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늘어진 피부에는 거뭇거뭇한 검버섯이 피어있고, 성기는 과연 그것이 생명을 수태하고 밀어냈던 문(門)이기나 했었던 것인지 축 늘어져 있다. 몸이랄 것도 없는 몸, 악취의 창고인 몸을 남편인 '나'는 씻긴다. 처연하다.
작가는 몸의 너저분함을 표현하는 데에 일체의 미학적 군더더기를 갖다 붙이지 않는다.
미화하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고, 더러움을 더러움 그 자체로 수용하겠다는 의지, 나는 너를 너로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 우리가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지. 그것이 추(醜)이든 미(美)이든 사랑은 대상을 똑바로 바라본다.
또 하나의 몸뚱이가 있다. 추은주(秋殷周), 그녀에겐 풋풋한 사과향이 풍긴다. 추은주, 5년 전에 그의 회사에 입사한 젊은 여자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보는 순간 잃어버린 고대 국가를 생각한다. 잃어버린 국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의 다른 이름이다. 무상(無常)의 다른 이름이요, 영속하는 것은 없다는 허무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입사한 지 5년 동안에 시집을 갔고 아이를 낳았다. 그는 그 5년 동안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긴다. 단지 그녀를 지켜볼 뿐이다. 하염없는 욕망의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보는 탐욕스럽지만 안쓰러운 눈이 바로 '그'다.
그러나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비밀에 헌신한다. 아무리 그가 추은주의 이름을 불러도 그 이름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껍데기다. 그러나 부재의 공간에 그녀를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다.
추은주의 몸에 손을 뻗고 싶지만 그에겐 병든 아내가 있다.
그의 내면은 격렬하게 추은주를 부른다. 그러나 그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그는 홀로 비밀을 간직한다. 그는 여전히 누군가를 의식해야만 하는 광장의 사람이다. 그녀를 갖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화장(化粧)을 필요로 한다.

김훈선생은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하였으며 빼어난 문체와 깊이 있는 사유가 드러난 문장으로 문학평론과 수필, 소설을 써왔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학교,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고려대학교 정외과에 입학하였다. 2학년 때 바이런과 셸리의 시를 읽고 영문과로 전과하였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시사저널〉 편집국장, 〈국민일보〉 부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 사회부 기자 등을 지냈다.
〈한국일보〉 재직시 썼던 기사를 모은 〈문학기행〉(1986),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은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관심을 모았다. 이후 전국을 자전거로 다니며 쓴 여행기인 〈자전거 여행〉(2000)은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1995)으로 불혹을 넘기고서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집필한 〈칼의 노래〉는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의 노래〉(2004), 〈화장〉(2004), 〈언니의 폐경〉(2005), 〈개〉(2005), 〈강산무진〉(2006), 〈남한산성〉(2007), 〈공무도하〉(2009) 등이 있고 수필집 〈풍경과 상처〉(1994),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2002), 〈밥벌이의 지겨움〉(2003), 〈공 차는 아이들〉(2003),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2004), 〈바다의 기별〉(2008)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2001), 이상문학상(2004), 황순원문학상(2005), 대산문학상(2007),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문학부문(2009) 등을 수상했다. 기자로서는 서울 언론인클럽 언론상 기획취재상(2002)을 받았다.

그의 저서중에 <연필로 쓰기>라는 산문집이 있다.
놀랍게도 그 많은 저서를 모두 연필로 썼다한다.
그는 컴퓨터로 글을 못 쓴다. 그러나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랜 기자생활을 하다보니 취재를 나가서 (당시는 노트북도 없었다)연필로 글을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습관이 들었을 것이다.
그의 연필글씨체는 일품이다.
작가들중 원고를 받아보면 알아보지도 못할 악필들이 많은데 김훈선생의 원고는 정갈하면서 보기 좋다.
아무튼 처음,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을 읽고 가슴속의 후련함을 느꼈고 <화장>을 읽고는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고
이번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 >를 읽고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드리게 되었다.
마치 그의 글을 읽노라면 동년배가 아닌, 집안에 마지막 한 분 남아계신 숙부(叔父)께서 담담하게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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