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Chris Yoon 2021. 10. 10. 06:38

2012. 10. 29.

 

 

 

이름 뒤에 숨은 것들           최광임


그러므로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헤어짐에도 제목이 없다
오다가다 만난 것들끼리는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다행이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마다 꽃피고 꽃지고, 수런수런
밤을 건너는 지금



아침에 훌쩍 떠나보겠다고 나선 여행길가는 길목마다 생각들이 발목을 잡는다

장흥쪽으로 가는길, 언젠가 선득한 기운에 잠을 깨보니 정발산역의 프렛홈 벤취였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 나는 무슨 마법에 걸려 술이 취해 여기까지 와서 앉아 있었던가

그 후로도 종종 그렇게 낯 선 거리에 술이 취해 앉아 있었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언제나 어긋나던 관계때문이었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그리고 속이 상해 술을 마시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떠돌았었다

마치 어긋나게 질주하는 두 개의 평행선 위의 기차들처럼...

왜 우리는 항상 같은 길로 갈 수 없고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가야했던 것일까

- Chris Nicol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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