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이야기

Wedding VI - 아직 끝나지않은 이야기들

Chris Yoon 2022. 11. 27. 01:30

오늘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갔고, 성공도 했고, 실패도 한 Wedding에 대해서 글을 끝맺으려 한다.

그러나 이 글을 써내려가면서 내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정리된것이 분명히 있다.

어떤 Wedding도 성공을 한것도, 또 실패를 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했던 Wedding에 만족을 하며 살었다면 성공한것이고, 늘 불만족스러웠다고해도 뭔가 느껴진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은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여기 몇 커플의 대상을 놓고 조금씩 그들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메시지를 전하려한다.

 

* 로맹가리(Romain Gary)와 진 세 버그(Jean Dorothy Serberg)

우선 나는 세기의 지성커플, 로맹 가리(Romain Gary)와 진 세 버그(Jean Dorothy Serberg)의 이야기를하겠다

세상에 많은 커플들이 결혼과 재혼을 한다. 결혼은 흔하고,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잘 사는 경우도 있다. 그들도 24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 재혼해, 8년간의 결혼생활을 했다. 둘 사이에 디에고가 태어났지만, 별거를 하고 끝내 이혼한다.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랑 이혼하고 다시 이혼녀와 살지 않았는가? 그에게 진 세버그가 마지막 연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로맹 가리는 일편단심이 아니다. 진 세버그도 한 번의 결혼을 더해 둘에게 서로는 마지막이지도 않았고, 완벽한 사랑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둘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무엇인가 있었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레스의 관계와 비교해 보자. 나이가 많은 멘토 역할을 하는 사람 소크라테스나 아킬레우스는, 멘티 젊은이 알키비아데스와 피피로우스를 보호해 주고 사랑해 준다. 알키비데우스가 성장을 하고많은 여인들과 정분이 난 것으로 보면 소크라테스와의 관계에는 ‘성(性)’중심 관계가 아니었다. 플라토닉 사랑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작가와 여배우의 관계에 대입을 해 보면, 남녀이기 때문에 육체적 교감도 있지만, 그래도 정신적 교감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흔들리는 젊은 영혼과 성숙한 영혼이 만난다. 성숙한 영혼은 성장하는 젊은 영혼을 보며 자신이 성장했던 때를 떠올리며,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고 그 성장을 지켜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다.

 

프랑스 최고 문학상을 수상하고, 외교관이며 인기 있는 작가인 그에게 비평가들은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썼고 공쿠르 상을 받았다. 그 생에 두 번째였다. “나는 ‘비행사, 외교관, 작가 …… 등으로서의 충만한 여러 가지 삶들’을 다룬 내 책들 뒤에서 절대적인 허무와 무력감, 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 그리고 말로만 하는 절대에 대한 취미를 읽었다.” 그는 ‘다양성에의 유혹’에 상처를 입고, 그것을 회복하려고 ‘자기 앞의 생’이라는 변신했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자기 욕구를 인식하고 있었고, ‘소설과 성생활’로 그것을 저울질할 수 있었던 그는 결코 우울하거나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짐작한다.

“나는 정신적인 면에서 볼 때 항상 새로운 변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뛰어난 수단인 소설과 성생활 덕분에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모든 것을 가졌고, 성숙한 로맹 가리는 사랑해줄 사람을 찾았고, 그 대상이 진 세버그다. 불안한 진 세버그는 그와 살아보기로 한다. 남자는 여자가 원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는 대가로 여자의 젊은 몸을 탐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됐고, 또 유명한 작가이자 감독인 남자 로맹 가리와 결혼을 하고,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했던 진 세버그(Jean Dorothy Serberg)는 적어도 처음에는 로맹 가리와 동등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인권에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그런 부류에게 정신과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영화 ) 게다가 FBI가 그런 그녀를 정치적인 이슈를 덮으려고 이용하고부터 그녀는 생명력을 잃었다.

 

어떤 이들은 로맹 가리의 극단적인 집착이 진 세버그와 헤어지게 된 이유를 설명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인권활동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사회적 불평등을 겪는 약자에게 자꾸 퍼주려는 진 세버그를 이해는 하면서도, 외교관이라는 안정적인 삶을 살아온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를 뼛속까지 이해하고 지원할 수는 없었나 보다.

 

“숱한 전투를 이겨낸 로맹 가리는 이것이 패배한 전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싸웠고, 진 세버그때문에 아파했다. 그래서 그는 아자르의 가면을 썼고, <자기 앞의 생>에서 유머와 애정과 염세적 기질을 총동원해 그가 느끼는 모든 절망을 글로 썼다.” 211쪽<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이 책에서처럼 로맹 가리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녀를 지지했다. 로맹 가리는 가명으로 많은 소설을 썼고, 진 세버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고, 로맹 가리는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걸 알았지만 법적으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들의 사랑은 끝났지만, 우정은 계속 이어졌다는 증거다.

 

8년간의 결혼생활을 종지부를 찍고, 로맹 가리는 둘 사이를 이렇게 말했다."도울 수도 변화시킬 수도, 결별할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우린 이혼이 갈라놓기에는 아깝다." 그는 그녀를 도우려 했지만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왔든 그녀의 영혼은 불안했고, 그녀를 사랑한 로맹 가리는 자신의 자살 이유가 진이 아니라고 했지만, 아들 디에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그녀의 죽음의 이후로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로맹 가리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Elizabeth Taylor -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결혼 스토리

1932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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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세기의 미녀"라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배우이자 출연하는 영화마다 엄청난 히트를 치며 30년(40년대~60년대) 가까이 명성과 인기를 한몸에 받은 헐리웃의 배우이다.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7위에 선정되었다.

미의 상징이 된 많은 미녀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흔히 절대미의 배우라고 불린다. 다른 미덕들은 차치하고, 이상적인 외모 자체를 타고났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당대 미의 표본이었다.

누구보다 사진을 잘 받는, 어느 각도에서 촬영해도 결점이 없는, 가장 포토제닉한... 등의 수식어가 붙는 아름다운 비율(比率)과 이목구비의 완벽한 얼굴로 평가 받는다.

10살부터 아역으로 타고난 연기자였으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번이나 수상한 뛰어난 연기력까지 갖춘 여배우이다.

알 사람은 아는 필모그래피와 연기력이지만 미녀 배우들이 그렇듯이 대중들에게 쉽게 연기파 배우로 조명되지 않는다.

그녀가 미의 기준으로 군림했던 당시 할리우드에서의 존재감을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결혼과 이혼인데, 힐튼 호텔의 후계자 콘래드 힐튼 주니어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자그마치 8번의 결혼과 이혼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이덕분에 롤스로이스 팬텀 구매를 거부당했다.

결혼까지는 안 갔다 하더라도 그 외에도 수많은 남자 배우들과의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말년에는 콜린 파렐과 친해졌는데 그는 엘리자베스와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젊은 여배우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Rosemond Taylor)는 1932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1950년대 로맨틱 영화에 출연하여 성숙한 역할로 전환할 때까지 아역 배우로 할리우드에서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60년대에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영화 배우가 되었다.

그녀는 3개의 오스카상과 4개의 골든 글로브를 가진 화려한 수상 경력의 여배우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전성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간주되었으며 “miracle of construction”으로 묘사되었다.

그녀의 화려한 머리, 모래시계 모양의 바디 라인, 희귀한 보라색 눈, 두 줄의 속눈썹(유전적 돌연변이)은 그녀를 매우 미적으로 만들어 일부 연구자들이 그녀의 특징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이 자신을 어른이 되기를 갈망하게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일련의 결혼을 촉발시켰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그녀의 화면 이미지가 그녀를 진정한 여성이자 아내가 되고 싶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혼을 독립적인 성인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보았다. 그녀는 또한 "불치의 로맨티스트(incurable romantic)"임을 인정했다.

 

 

그녀는 18세에 첫 남편과 결혼했고,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23세의 호텔 상속인 콘래드 "닉키" 힐튼 주니어(Conrad 'Nicky' Hilton Jr.)였으며, 결혼했을 때 겨우 18세였다, 1950년 5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단 8개월 동안만 함께했다.

힐튼은 호텔리어 콘래드 힐튼(Conrad Hilton)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한 결혼 생활은 14주간의 유럽 신혼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보도에 따르면 두 사람은 힐튼의 나쁜 습관으로 결별했다.

 

 

그녀는 두 번째 결혼에서 엄마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52년 2월에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녀보다 20살 많은 영국 배우 마이클 와일딩(Michael Wilding) 이었다.

그들의 유니언은 2명의 아들 마이클 주이어(Michael Jr.)와 크리스토퍼(Christopher)를 낳았다.

한 기사에서 크리스토퍼는 "어린 시절 엘리자베스가 골든 글로브(Golden Globe) 트로피를 가지고 노는 것을 허용했지만 오스카(Oscar)는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커리어가 압도적으로 증가했을 때 와일딩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리고 결혼 5년 만에 각자의 길을 갔다.

 

 

 

세 번째 남편은 “charm”이고, 그에 걸맞게 화려한 선물과 보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마이클 와일딩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한 달 만에 테일러는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 마이크
 
토드(Mike Todd)와 결혼한다. 부부에게는 Liza라는 한 명의 자녀가있었다.

​토드는 파리에서 날아온 특별 기내식부터 마당에 전체 보석 전시를 설치하는 것까지 멋진 선물로 아내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1958년 토드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면서 갑자기 끝이 났다.

 

 

 

그녀의 네 번째 결혼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마이클 토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여배우 데비 레이놀즈(Debbie Reynolds)와 결혼한 에디 피셔(Eddie Fisher)와 사랑을 시작했다.

친구의 남편! 전 세계적인 스캔들이었다.

1959년 가수 에디 피셔와의 결혼은 잘못된 이유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들의 결혼식을 위해 그녀는 그녀의 유명한 보라색 눈과 그리 전통적이지 않은 짙은 녹색 앙상블을 입었다.

​그리고 이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부정적인 평판을 초래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40년 동안 허니문을 즐기겠다고 했지만, 5년 만에 결별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녀의 5번째(그리고 6번째) 남편과의 격렬한 관계는 폭풍우처럼 전세계를 뉴스로 덮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영화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세트에서 배우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과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회오리 바람처럼 로맨스가 되었다.

피셔와의 결혼 생활이 끝난 지 9일 만에 테일러는 60년대 패션의 절정이었던 미묘한 겨자색 웨딩 의상을 입고 배우 리처드 버튼과 결혼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극도로 열정적이기로 악명이 높았으며,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특정 기관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이혼에 관한 TV 드라마에 두 사람이 주연을 맡은 후, 버튼과 테일러는 1974년 10년 간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챠드 버튼은 1975년 보츠와나에서 두 번째로 결혼식을 올렸다.

 

리챠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74년 10년 간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고  16개월(1975년 10월) 후에 그들은 다시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다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버튼을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두 번째 결혼은 1년도 채 지속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결국 다른 남자들과 더 많은 결혼 서약을 교환하게 된다.

 

 

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지난 두 번의 결혼이 잘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두 전 남편과 좋은 친구로 남았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여섯 번째 배우자는 정치인 존 워너(John Warner)였다.

여배우는 화려한 모피 트리밍 트위드 캐시미어 코트와 프린트 터번을 매치했고, 신랑은 심플한 양복과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매치했다. 그리고 자신의 농장에서 워너 상원의원과 결혼했다.

그들은 말에 대한 공통된 사랑으로 연결되었지만 거의 6년 만에 이혼했다.

그녀의 마지막 결혼 남자는 그녀보다 20살 어린 건설 노동자 래리 포텐스키(Larry Fortensky)이다. 마지막 결혼식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네버랜드 목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달리 포텐스키는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하지 않았고 결국 1996년에 일을 끝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남은 생애 동안 워너와 포텐스키와 연락을 유지했다.

 

 

실패한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남은 여생을 목적을 가지고 살았다.

 

말년에도 테일러는 텔레비전과 무대에서 계속 활동했다. 그녀는 자신의 보석과 향수 라인을 가지고 있었고 HIV/AIDS 치료제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재단도 설립했다.

테일러는 또한 그녀의 자선 활동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영예를 얻었고 음악 스타 쥴리 앤드류스(Julie Andrews)와 함께 Dame Commander로 작위를 받았다.

테일러는 2011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이전에 그녀가 "사랑을 주고,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고, 친구가 될 운명"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의 삶을 살았던 방식이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어둑한 밤……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듭니다.
73세가 넘은 피아니스트(백건우)가 슈베르트 즉흥곡을 연주합니다.

여리고 잔잔한 선율에 빛과 어둠이 엇갈립니다.
아내(윤정희, 만 74세) 없는 삶을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음악가 남편이 지켜봅니다.

"여보 소금통이 비었네"
그러나 아내는 초점 잃은 눈으로 식탁만 내려다 봅니다.

"여보, 나야 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여보, 제발…… 얼른 내 얼굴을 좀 봐"

영혼마저 잿빛으로 시드는 치매 앞에서 남편은
영원할 줄 알았던 것이 영원히 사라졌음을 깨닫습니다.

이 익숙한 멜로디는
'리스트'가 연인에게 바친 "사랑의 꿈"입니다.
언젠가 피아니스트 백건우 독주회에서 아내 윤정희가 남편을 바라보며
남편 백건우의 연주에 맞춰 낭랑한 목소리로 읇었던 그 노래입니다.

당대 최고의 명배우 윤정희,..!
별처럼 빛났던 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내로 살아온 지 43년……

윤정희는 웬만해선 미용실에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40년을 넘게 이렇게 남편이 잘라주고 매만져 줬습니다
부부는 백건우를 뺀 윤정희,
윤정희 없는 백건우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늘 함께 다녔기에 휴대전화도 한 대를 같이 썼다고 합니다.


언젠가…
남편은 아내를 가리켜
"평생 꿈만 꾸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도
"삶의 마지막 모습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꿈꾸며 가고 싶다"고 했지요.

그랬던 그 아내가
10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남편은 밝혔습니다.

공교롭게도
윤정희의 마지막 영화 "시"에서 연기한 주인공 역이 치매를 앓는 할머니 역이었지요.

그녀는 이제 딸도 잘 알아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딸에게 "오늘 촬영은 몇시냐?"고 묻곤 한다는 말에서는 슬프게도
인생은 "Sad Movie(슬픈영화)"라고 했던
고교 시절 국어선생님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많은 대중이 사랑했던 여배우가 어둠에 갇힌 모습을 생각하면
늦가을 찬바람처럼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고 스산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아프고 난 뒤 피아노 소리도 달라졌다"는 남편의 말에서
그나마 따스한 위안을 받습니다.
어둠 속 아내에게 남편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줄 겁니다.

부부는 이런 건가 봅니다.
부부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윤정희(尹靜姬, 본명: 손미자(孫美子), 1944 - )는 1967년에 영화 ‘청춘극장’에 데뷔하였고 이후 7년 동안에 무려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 절정에 올랐다. 1974년에 서강대학교 총장의 도움으로 파리에 있는 ‘소르본느 대학교’에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알게 된 피아니스트 백건우(1946 ~ )와 1976년에 화백 이응노(1904-1989)의 주례로 결혼을 하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백건우 윤정희 부부는 화백 이응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박인경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958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이응노와 박인경(1926~) 부부는,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한국으로 압송된다. 징역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풀려난 뒤 이들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1977년 7월초 박인경이 윤정희 부부에게 접근하여,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미하일 파블로비크’라는 거부가 고령의 부모를 위해 음악회를 열고자 하는데 백건우를 초청한다는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초청장의 내용은 7월21일자로 된 초청장의 내용은 白씨의 음악을 듣게 되어 기쁘다는 것과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쇼팽 등을 듣고 싶으며 白씨 가족은 물론, 朴仁京씨도 초청, 경비를 다 부담하겠다는 것이었다. 파블로비크는 이 초청장에서 음악회는 고령의 자기 부모를 위한 것인데 그들이 유고 자그레브 교외의 별장에 살고 있다고 했다.

 

두 달 후로 예정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연주회 준비로 바빴던 백건우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박인경의 말이 백건우룰 추천한 자기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고 하여, 하는 수없이 초청에 응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사실 박인경은 연주회 초청 이전에도 ‘같이 해외여행을 가자’고 이들에게 두 번이나 제안을 했었으나 부부는 거절했었다.

 

1977년 7월 29일, 백건우 윤정희 부부와 그들의 생후 5개월 된 딸과 박인경이 파리에서 비행기로 취리히에 갔다. 공항에 내리니 파블로비크의 비서라고 하는 여자가 대기하고 있다가, 초청자의 노부모가 현재 유고의 자그레브 근교 별장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비행기를 갈아타고 자그레브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백건우는 비자 없이 자기들이 어떻게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로 갈수가 있느냐고 하니까, 그 비서라는 여자의 말이 초청자가 이미 입국수속을 하였다고 대답하면서 취리히발 자그레브행 왕복비행기표를 건네주었다. 그때 윤정희는 생후 5개월 된 딸을 위하여 요구르트를 사러 갔는데 그사이에 박인경과 그 비서라는 여자가 자리를 옮겨 흰 봉투 하나를 박인경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여비서는 취리히에 남고 백건우와 윤정희와 그들의 딸과 박인경이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탔다.

자그레브 비행장에 도착하여 주위를 살펴보니, 그런 지방도시 작은 비행장에 조선민항이라고 쓰여진 비행기 한 대가 눈에 띄었고 저쪽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여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유독 그 여자만 어울리지 않게 썬 그라스를 썼고 흰 저고리에 검정색 동강치마를 입고 있어서 전형적인 북한여성의 옷차림이라고 직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목격한 윤정희는 대단히 불안하였고 긴장하였다고 한다. 윤정희의 예감이 맞았다. 그녀는 북한공작원 허묵과 함께 백건우, 윤정희 납치공작에 참여한, 비엔나주재 북한대사관의 3등 서기관 이상준의 처인 방화자이었다.

 

그때 백건우가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는데 박인경이 취리히에서 그 여자비서로부터 받은 흰 봉투를 주었다. 봉투 속에는 ‘아미크’라는 이름과 주소, 그 집을 찾아가는 약도, 그리고 유고 돈 800 디나르가 들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거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국제적인 피아니스트를 초청해놓고 마중도 나오지 않고 택시를 타고 오라니 그런 결례가 어디 있나. 백건우는 이상한 예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자그레브 시가지를 벗어난 택시는 한적한 시골 길을 15분 가량 달린 뒤, 3층 집 앞에 도착했다. 행인이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택시 요금은 2백 디나르가 나왔다. 연주회를 한다면 방문객들도 많이 오고 그들이 타고 온 차들도 마당에 주차되어 있어야 하겠는데 주위가 너무 조용하였다. 수상하다고 느낀 백건우는 아내와 딸을 택시 안에 남겨두고, 박인경과 함께 나와 주변을 살피다가 박인경이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2층에 만찬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백건우가 따라 들어가 보니 1층은 방문이 모두 잠겨있고 창문도 커튼이 내려진 상태였으며, 2층에는 갑부가 마련하는 만찬이라고 믿기 어렵게 과일접시 하나와 빈 접시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3층에서 자기를 초청한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남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순간 백건우는 그가 북한공작원임을 직감하고 쏜살같이 택시로 달려갔다. 그 동양인은 “wait, wait" 를 연발하며 따라오고 택시가 출발하기 직전 거의 택시의 문손잡이를 잡을 정도로 접근하였다. 백건우는 그 택시를 타고 급히 그곳에서 빠져 나와 자그레브에 있는 미국영사관으로 달려갔다. 그자가 바로 북한공작원 허묵이었다.

 

그때가 1977년 7월 31일 오후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미국영사관의 문은 닫혀있었고, 도서관이 아직 열려있어 백건우 가족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마침 잔무정리를 위해 남아있었던 ‘크리스텐슨’이라고 하는 미국외교관이 백건우 가족을 만나 사정이야기를 들었다. 크리스텐슨은 즉시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가 임시로 묵고 있는 호텔로 안내한 후 자정 무렵에 4층 416호실로 옮겼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누가 416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박인경이 호텔 청소부가 왔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려고 할 때 백건우가 급히 제지하고 크리스텐슨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크리스텐슨이 그가 묵고 있던 3층에서 4층으로 올라왔을 때 거기에는 동양인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416호실 앞에 서 있었다. 그 중 한명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며칠 전 오스트리아 건국기념일 리셉션에서 보았던 북한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허묵이었다. 크리스텐슨은 즉시 백건우에게 전화하여, 지금 북한사람들이 문밖에 와 있으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북한사람들이 사라진 후에 크리스텐슨이 나와서 백건우 일행을 안전하게 공항까지 안내하고 파리 행 비행기 표를 구입하여 저들이 탑승하고 이륙하는 것까지 확인하였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서 지적된 박인경의 미심쩍은 행동은 다음과 같았다.
① 연주회 초청을 주선했다는 여자에 대해 “파리에 사는 사람이며 아주 친한 사람” 이라고 했다가 “어디 사는 사람인지 모르며 서너 번밖에 만난 일이 없다” 며 분명한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

② 초청장이 처음엔 우편으로 보내져 왔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비서라는 여자가 두고 갔다고 번복했는데 비서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③ 취리히 공항에서 파블로비크의 여비서가 아기에게 먹일 요구르트를 사러 갈 때 박인경이 따라가, 백씨 부부가 안보는 데서 자그레브 별장의 약도와 돈이 든 봉투를 받았다.

④ 자그레브 공항 도착 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 백건우가 두리번거리자 박인경은 봉투를 내주면서 “택시 타고 오라는 말인가 봐. 택시 타고 가자” 라고 말했다.

⑤ 별장 도착 후, 빈집을 앞장서 올라갔다 나오면서 “만찬회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올라가 봐” 라고 말했다.

⑥ 미국 영사관으로 가면서 “이 일을 크게 벌리지 말고 조용히 덮어두자” 고 말했다.

⑦ 미국 영사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말이 없어지고, 미국 공보관장이 집으로 초대했을 때는 호텔에 그냥 있자고 했다.

⑧ 북한 사람이 호텔 방문을 두드렸을 때 “내가 가볼까” 하면서 문을 열어주려는 것을 백씨 부부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⑨ 백건우가 한국대사관에 가서 신고를 하자고 하자 “나는 프랑스 정부와 손잡고 살 수 있다” 면서 거절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 후인 1977년 8월 31일, 윤·백 부부가 서울로 왔다. 부부는 중앙정보부에서 피해자 조사를 받았다. 이것으로 납치 미수 사건 수사는 종결되었고,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는 이응노 화백의 국내 전시회를 금지시키고 작품 유통을 막았다. 이후 이응노, 박인경 내외는 1983년 한국 국적을 버리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이들은 1987년,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이응노 화백 개인전을 열었다. 그 후 이 화백은 1989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박인경은 납치 사건 발생 17년 만인 1994년 1월초, 서울에서 열린 이응노 화백 5주기 展에 첫 입국한 후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1996년, 金正日의 본처인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은 자신이 쓴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동아일보사(1996)』에서 윤, 백 부부 납치는 평양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밝힌다. 1997년 북한에서 남파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된 이한영은 이 납치 사건에 박인경이 개입됐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이 납치미수사건 후 26년이 지난 2003년에는 북한이 이 납치공작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당시에는 자그레브가 유고슬라비아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신생국가 크로아티아의 수도이다. 이 문서는 현재 크로아티아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행정위원인 도부리보예 비디치가 북한대사 정광순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해 질문하자 정광순 대사가 해명한 내용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 납치시도 사건은 현지주재 북한외교관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평양에서 직파한 공작팀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1977년 7월 30일,  백건우ㆍ윤정희 부부 피랍 중 탈출했다

당시의 나는 생머리를 올백으로 묶고 탈출을하기위해 필사적으로 절박한 상황에서 애쓰던 두 부부의 사진을 보았다.

서로의 신원을 모른체 파리의 오페라극장앞에서 만나 서로 이끌리고 열평짜리 아파트에서 벽에 굴비를 걸어놓고 겉절이를 해서 밥을 먹으며 피아노를 연습하여 세계 순회공연에 이르고 어느 사막에서 가져온 모래에 촛불을 꽂고 함께 예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낙엽지는 공원에 앉아 드라마틱하게 표정을 지었던 부부!

함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사선에서 함께 탈출을 하고 세상에서 안해본 일이 없었던 이부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감춘다고 감출 수 없는 병, 알츠하이머.

현재 파리 근교의 요양병원에서 딸 진희씨가 간호를 하며 백건우씨는 계속 연주를 하고 시간을 내어 자주 들른다 합니다.

백건우씨는 이런 아내를 냉대하며 방치할 사람이 아니죠.

하루속히 윤정희씨의 알츠하이머 병이 호전되어 다시 옛날로 조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찰리 채플린과 오오나 (Charles Chaplin & Oona)

 

찰리채플린이 오오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을 때,

오오나는 찰리보다 30살 연하.

찰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결혼해줘. 너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고 나에게 죽는 법을 가르쳐줘...'

오오나는 대답했다,

'아니 찰리야, 나는 너랑 결혼해서 내가 성장하도록 가르쳐 줄거고, 나는 너에게

끝까지 젊음을 가르쳐 줄거다.'

88세 찰리에겐 죽기전까지는 멋진 결혼생활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나이 차이는 안타까운 결혼생활이었다.

'내가 떠날때 내게로 온 그대, 너는 4월의 빛, 나는 늦은 회색.'

결혼생활이 길었다고 반드시 행복했던것은 아니다.

 

찰리 채플린과 오오나외에도 이 지구선상에는 나이 차이가 많은, 연상연하 커플의 부부들이 많았다

결혼이란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필요에 의해 자연스레 합쳐지는 것이다.

그 시기가 반드시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감정보다 물질이 우선을 하면 안된다.

자연스러워야한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타고 내려온 감정이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갔으면 한다.

 

 

 

 

Chris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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