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무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나무 - 류시화
이른 봄날, 나무아래 서서 귀를 기우려 보았는가?
꽃샘바람 속에서도 나무는 수분을 빨아올려
꽃피울 생각으로 바쁘게 수런거렸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봄 날,
장엄하게도 꽃봉오리를 일제히 터뜨렸다
그 꽃들의 함성 -,
들어 보았는가?
봄 날, 그 화사했던 햇살만큼이나
싱그럽게 웃던 하얀 얼굴들
제각기 난분분, 난분분... 떨어졌다
그 하얀 나비떼들의 죽음
바람은 그 꽃잎들을 어디로 데려갔나?
그리고...
그 나무아래에서 봄 날이 다 가도록 누가 울었나?
떨어진 하얀 꽃잎 시들기도 전에
장끼 한 마리 날개깃 털며 날아들었다
강한 숫컷냄새를 풍기며 컹컹 우짖더니
까투리를 불러들이고 그곳에 살림을 차렸다
나무 아래에는 매일 뜨거운 정사가 치뤄졌다
봄 날, 그 낮술에 취한 만큼이나 혼미했던 날들
하루에도 몇 번씩 치뤄지던 대낮의 정사, 정사...
나무는 가지를 드리우며 그 현장을 비밀스럽게 가려주었다
신록이 우거지면서 하나, 둘...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났고
푸른잎들은 그 생명들을 감싸주며 길렀다
무더웠던 여름 그 나무 아래에선
하루종일 새로운 생명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나 또한 여름 한 나절을 그 아래에서 보내며
끓어오르는 욕정을 달랬었다
장엄한 자연의 심포니를 들으며 수없이 자행했던 수음(手淫)
나에게 흰 머리칼이 생기듯
나무잎도 차츰 붉게 물들었다
얼마나 근사한가? 저모습...
생의 절정에 선듯 가을의 나무는 품위가 있다
그렇구나 미련없이 모든것 다 털어버리고
심플한 자신의 몸 내놓을적에
저토록 세련의 극치를 보여주는구나
곱게 물든 잎들을 나무는 오늘도 하나씩 떨어뜨리고 있다
자신의 떠날 때를 알고
떠날 준비를 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나무는 모든 걸 떨궈내고 조용히 서서 기다린다
그를 보고 어찌 한 여름날에 초록잎들을 달고 서 있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나무에게는 꽃을 피웠던 봄도,
초록의 그늘을 만들었던 여름도,
붉은 단풍을 물들였던 말년의 절정도,
모두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제 곧 오겠지, 겨울...
그러면 나무는 눈밭에 裸身으로 서있게 되겠지
삭풍속에 그렇게 서있어도 결코 혼자는 아닐거야
누가 다녀갔을까? 저 무수한 발자욱들.
아름다웠던 지난날들, 나무는 추억을 떠올리며 서 있을거야
나무의 일생...나의 일생...
나는 일년, 아니 최근 몇년동안 나무를 관찰하기 위해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뀔때마다, 매일 같은 장소로 가서 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나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마치 또 다른 내 모습을 보는듯...
글 / 사진 :: Chris Nico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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